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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윤의 흔적을 좇아서 도착한 곳은 삼엄한 경비로 보호되는 산채였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 위에 안착한 율리히가 멀리 위치한 산적 소굴을 내다보았다. 거인신의 눈에서 탄생한 요정족답게 그 시력은 무척 좋아서, 까마득한 점으로 보이는 먼 곳도 눈앞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제법 인간들의 수가 많았다. 눈에 보이는 이들만 백여 명. 실제 그 수는 두 배라 추측해도 좋으리라.
“윤의 망토가 보여. 이곳이 맞아.”
산채의 중심에 있는 마당, 그 위에 윤이 입고 있던 망토가 보였다.
“적의 수는?”
“백에서 이백 사이. 수는 많지만 모두 허접하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너무 힘 빼지 않는 게 좋아. 진짜 힘써야할 곳이 어딘진 알지?”
율리히는 나무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뒤, 바닥을 딛고 서서 목을 양옆으로 꺾으며 가볍게 풀었다. 그가 스태프를 소환했는데, 지팡이의 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마치 창을 쥐듯 앞을 겨누었다.
“어떡할래? 정면 돌파? 아니면 기습 공격?”
“당연한 걸 왜 묻나. 정면으로 돌파하겠다.”
아스탄은 차가운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 최대한 살기를 억눌렀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이 새어 나와서 사방으로 퍼졌다. 푸르른 녹음을 자랑하던 나무가 순식간에 시들기 시작했다.
아혼이 입술을 덜덜 떨었다. 몸이 이상했다. 잠들어있던 감각이 깨어난 듯 날카롭게 그의 오감을 후벼 팠다. 떨리는 제 어깨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어린 나이에 검재(劍才)를 보여 예화 상단주의 숙부에게 입양되었으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기감을 느낄 수 있는 재능은 제게 없었다.
“저, 저 요정님. 혹시 아가씨는… 여경 아가씨는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덜덜 떨리는 몸과 별개로, 아혼은 자신보다 더 중요한 여경의 행방을 찾았다.
“글쎄. 정확하진 않지만 저 왼쪽 건물인 것 같군.”
율리히는 아혼에게 보이지 않을 건물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는 아가씨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보아하니, 여경 아가씨를 구하러 가실 상황이 아닌 거 같군요.”
“……뭐 그렇긴 한데.”
“일단 일면식도 없는 저희를 돕기 위해 나서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립니다. 언젠가 예화 상단이 다시 일어선다면 반드시 은인께 보은하겠습니다.”
아혼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 지금 그 몸으로?”
율리히는 아혼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혼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있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서 있는 게 고작인 상태를 정확히 꼬집었다. 아혼은 민망함에 귀 끝을 붉혔다. 물론 저들보다는 약한 건 사실이다. 여경을 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순 없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도 좋을 텐데.”
율리히는 복잡다단한 얼굴로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혼을 도와 여자를 구할 듯 망설이는 모습에 아스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 셈인가. 저자를 끌고 온 건 네 선택이었지.”
“그야 쓸모가 있으니까.”
“작전을 짠 건 네가 아닌가. 상황이 달라졌으니 꽁지라도 뺄셈인가?”
아스탄의 비꼼은 칼로 쑤시듯 날카로웠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악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언제 발 뺀다고 했어?”
율리히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검지로 제 미간을 누르며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혼은 간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좋아. 일단 여자를 구하고. 그녀는 안전한 곳에 숨긴다.”
이내 생각을 마친 율리히가 검지와 엄지를 튕기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저 놈의 허락도 받아. 그리고 윤을 구할 때 너도 반드시 따라가는 거야.”
율리히가 아스탄을 가리켰다. 아스탄은 살벌한 눈빛으로 율리히를 노려보았다. 아혼은 그 시선이 제게 향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
아스탄은 율리히를 응시했다. 율리히는 뻔뻔한 얼굴로 ‘당연히 승낙할 거지?’ 라고 무언의 답을 강요했다.
“저, 저…. 부, 부탁드립니다.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아스탄이 원한다면 오체투지라도 할 기세였다. 여기서 예여경이란 여자를 구하는 계획을 거절한다면 천하의 악독한 인간이 되고 만다. 게다가 거절한다면 윤에게 뻔뻔한 얼굴로 모든 것을 알리겠지. 자신의 백성도 아닌 여자가 어찌되던 상관없었지만, 윤이 알게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좋다.
세 사람은 곧장 여경이 납치한 장소를 향해 달렸다. 율리히에게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갈 때와 달리 아혼은 절박한 마음으로 앞장서듯 뛰었다.
“여긴가.”
율리히가 중얼거리며 건물을 바라보았다. 무척 비좁았다. 두 녀석이 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을 쥔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산적 주제에 제법 체계적이잖아.”
“그래봤자 산적이다.”
“하긴.”
율리히가 가볍게 스태프의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스태프에서부터 흐린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이내 감옥을 감쌌다.
갑작스럽게 흐려진 시야에 산적들이 어리둥절해하던 것도 잠시,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사내는 우두둑, 동료의 기괴하게 목이 꺾이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이내 그 역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칼날에 절명하고 말았다. 고양잇과 짐승처럼 날렵하게 뛰어내려서 산적을 처치한 이는 아스탄이었다.
보초를 서던 산적들을 빠르게 처치한 그들은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갇힌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미쳤군.”
납치당한 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마력 구속구에 입과 손목을 틀어 막힌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조인족 소녀도 있었다. 날개가 기괴한 각도로 반쯤 부러져 있었다. 그 수가 적을 뿐,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이종족이다. 저렇게 제압할 수 있는 건 평범한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가리온이 개입한 게 틀림없었다.
조인족 소녀를 가둔 감옥의 쇠창살 역시 마법진을 그려서 반마력장이 흐르도록 만들어졌다. 단순한 유희라 하기엔 너무나 악랄했다.
“비켜라.”
아스탄이 굳은 얼굴로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쇠창살을 단숨에 잘라냈다. 조인족 소녀가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구석을 향해 기었다. 아스탄 역시 인간이라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율리히가 감옥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마력 구속구를 제거했다.
“……고생 많았다.”
소녀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리며 율리히의 품에 안겼다.
아혼은 긴장한 눈으로 갇힌 여자들을 샅샅이 살폈다. 모두 아벨라르인으로 차 대륙의 검은 머리카락을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벌써 팔려간 건 아니겠지. 초조함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데, 가장 구석에 있는 감옥 안에 몸을 옹송그린 여자가 보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무척 익숙했다.
“아가씨!”
“아혼!”
여경이 눈을 크게 떴다. 험하게 다뤄진 듯 그녀의 고운 얼굴에 생채기가 군데군데 나 있었지만, 눈에 띌 만큼 큰 상처를 입진 않았다. 여경이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창살에 매달렸다.
“지금 구해드리겠습니다!”
아혼이 쇠창살을 붙잡은 채 마구 흔들었다. 검으로 내려치기도 했지만, 불티만 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쇠가 아닌 듯 보였다. 이종족을 제외한 여자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 이게 왜.”
“너도, 저 여자도 비키도록 해. 가까이 있으면 위험하니.”
아스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검기로 자물쇠를 잘라냈다. 문이 열리자 아혼이 감옥 안으로 뛰어들었다.
“네가 구하러 와줄 거라고 생각했어!”
“아가씨!”
여경과 아혼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포옹도 잠시, 두 사람은 “핫!” 소리를 내며 다급히 떨어졌다. 그러나 연정으로 붉어진 얼굴만은 숨기지 못했다. 위기가 해결되자 연인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셈이 되었다. 눈꼴신 모습에 율리히는 “괜히 구해줬어.”하고 바닥을 발로 찼다.
그 사이 아스탄은 감옥에 갇힌 여자를 모두 구해냈다. 여자들의 수는 약 십여 명. 보호하며 싸우기엔 상황이 너무 나빴다. 그들은 이제 윤을 구하기 위해서 황룡 가리온을 상대해야했다.
“흠. 어떡한다.”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율리히가 스태프의 끝으로 땅을 강하게 찍었다.
“황혼보다 짙은 어둠이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귀한 물질이여. 여신의 흐름에…….”
율리히의 괴상한 주문은 이번에도 계속되었다. 아혼과 여경은 상식을 파괴하는 요정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구해준 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저 요정은 기괴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가만… 저 금발 남자가 요정족 장로라 하였던 거 같은데.’
아혼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이성이 자체적으로 삭제하였던 부분을 생각해냈다. 요정족 장로가 저런 존재였다니, 저자와 거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컴컴해졌다. 여경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내 땅에서 문이 생겨났다. 문을 열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함께 계단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자들이 숨을 공간을 만들어낸 율리히의 이마는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이곳에 숨어 있어. 싸움이 끝나고 나면 구해줄 테니.”
“……다, 당신은 요정의 율리히님 맞으시죠? 저, 저희도 따라가면 안 되는 건가요?”
조인족 소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위험해. 반드시 구하러 올 테니까. 기다려.”
율리히가 고개를 저은 채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윤은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듯 둔탁한 두통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 아름다운 얼굴이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마치 금에서 실을 뽑아낸 듯 반짝거렸으며, 이목구비 역시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했다. 아마 인세에 나타났다면 성별에 관계없이 나라를 멸망시켰을 미모였다.
“…가리온?”
“그럼 내 이름이 가리온이지, 용가리겠어?”
가리온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윤이 놀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가리온이라는 이름에서 용가리가 연상되어 몇 번 그리 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단코 그가 듣는 곳에서 언급한 적 없었다. 가리온은 그리 기분 나쁜 눈치가 아니었다.
“나를 그렇게 하찮은 별명으로 부리는 인간도 네가 처음이지. 이상하네.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아.”
가리온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전 황제의 모습을 빌었을 때와 달리,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룡이라 그런지 귀여운 척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니 없었던 일로 해줄게.”
“고, 고마워.”
윤이 당황을 숨기며 대꾸했다. 가리온이 생글거렸다.
“그거야, 넌 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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