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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94화 (9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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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전편을 읽고 오지 않았더라면 읽고 와주셔요!

다음날 아침, 윤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이 된 기분을 맛보았다. 온몸이 나른한데다가 다리가 휘청거려서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아스탄의 도움을 받아 욕조에 들어간 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을 떠올리자 어지간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윤조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스탄은 끊임없이 그를 탐했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땐 허리 밑에 베개를 받친 채 그의 어깨에 종아리를 걸친 자세였다. 몸이 반으로 접힐 만큼 거세게 그를 밀어붙였다. 쾌락에 젖은 얼굴이 무척 야하다고 생각했다.

윤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제게 이끌었다. 어깨에 얹혀 있던 다리가 스르르 떨어지면서 몸이 빈틈없이 꽉 달라붙었다. 입술을 벌리지 않는 남자에게 먼저 혀를 내밀었다. 이윽고 잡아먹을 것처럼 거친 키스에 응해왔다. 씁쓸한 풋내가 남아 있는 타액마저 달다고 생각했다.

“하아.”

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리 한숨을 내쉬는 건가.”

“누구긴 누구야, 너 때문이지. 때린 놈은 발뻗고 잔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어오는 아스탄을 향해 물을 팍 튀기며 가볍게 흘겨보았다. 윤에게는 버거운 밤이 그에게는 보약으로 작용한 듯 얼굴이 아주 빤지르르했다. 아스탄이 뻔뻔하게 웃었다.

“돌아가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수배해야겠군. 초월자인데 어째서 체력이 달리는 거냐.”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뻗어 있겠어? 그러는 너야 말로 나 몰래 보양식이라도 먹고 있지?”

“글쎄,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이런저런 영약들을 먹었던 기억이 나는군.”

“역시. 범인은 금발머리…!”

윤은 실없는 소리를 중얼중얼했다. 아스탄이 허튼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따뜻한 물을 어깨에 부었다. 윤은 마치 노인처럼 “아. 좋다.”하며 골골거렸다.

“어린 연인을 사귀려면 그에 맞는 노력을 해야지. 네 얼굴은 나보다도 어려 뵈니 괜찮지만, 체력이 문제로군.”

아스탄은 황룡을 만나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구는 모습에 윤은 몸을 웅크려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쪽방 바깥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욕조 만들어서 씻어? 얼른 문이나 열어.”

때를 맞춘 듯 율리히가 윤을 불렀다. 아스탄이 문을 열자 훅 끼쳐오는 습기를 손으로 휘휘 저어 쫓아낸 율리히가 안으로 들어온다.

“다 씻었어? 얼른 우린 옷이나 입자.”

율리히의 팔에는 여행자용 경장이 걸쳐져 있었다. 율리히는 아스탄을 내쫓아버리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넌 출발할 준비 하고. 여관 주변이나 한 바퀴 돌아보고 와.”

“그렇게 하지.”

아스탄은 율리히에게 허튼짓 하지 말라는 듯 강하게 노려본 후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쾅 닫히자마자 율리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윤을 응시했다.

“……어린 애인이 그리 좋디? 재미 많이 본 거 같더라?”

“어… 어떻게 알았냐? 방음 잘 된다고 하던데.”

“인간들은 못 들을 정도였지만, 난 귀가 너무 좋아서.”

율리히가 자신의 뾰족한 귀를 톡톡 건드렸다.

“그걸 다 들었다고?”

삽시간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격렬한 움직임에 물이 출렁거리며 나무 욕조 밖으로 흘러넘쳤다.

“임마,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물에 옷이 젖잖아.”

“야!”

“부끄러우면 일을 치지 말던가. 너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까 적당히 해.”

율리히의 심드렁한 대꾸에 무어라 할 말이 없어진 윤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자, 물기 닦아내고 옷이나 입자.”

커다란 수건을 가져온 율리히가 물기를 대강 닦아냈다. 햇빛에 그을지 않은 윤의 몸은 붉은 잇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벌써 푸르스름하게 변하는 흔적을 보며 그가 혀를 쯧쯧 찼다.

“다 늙어서 어린 놈 만나니 네가 고생이 많다. 치료나 하자.”

스태프를 꺼낸 율리히가 주문을 영창하며 손목을 튕겼다.

“자, 이 주문은 아벨라르 대륙력 56년에 시작되어 사람들의 몸을 낫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지금은 당신의 몸을 치유할 것입니다.”

“……그 주문은 뭐야.”

엉망진창의 주문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마치 처음부터 잇자국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그런데 말이야, 윤. 네 애인 녀석이 얼마나 잘허냐… 읍! 읍읍읍!”

“제발 닥쳐, 넌.”

윤은 번개처럼 날쌔게 움직여서 친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숨통까지 틀어 막힌 율리히가 윤의 팔을 마구 때렸다.

“다시 안 놀릴 거지?”

율리히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얼굴이 다른 의미로 붉게 변했다. 산소가 부족해 시퍼렇게 변하기 일보 직전에서야 윤이 손에서 힘을 뺐다. 율리히가 푸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제 아무리 초월자이고 이종족이라해도 숨을 쉬지 못했을 때 죽는 건 똑같았다.

“너 나 진짜 죽일 셈이었냐?”

율리히는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아직도 얼얼한 입가를 문지르며 곱게 흘겨보았다. 마치 노인처럼 웃으며 혀를 끌끌 찼다.

“에휴, 청춘이니 뭘 더 못하겠냐. 그래도 몸은 적당히 챙겨가면서 해, 너는 스무 살 아니야. 인간 나이론 일흔 할아버지라고?”

“……응.”

“그럼 옷부터 입자.”

율리히는 윤의 대답에도 마치 칠칠맞은 동생을 보는 듯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서 여자 옷을 입으며 윤은 계속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아닌데. 하며 생각했지만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허리를 꽉 졸라매고 가슴엔 천을 구겨 넣어서 봉긋하게 솟아오르도록 만들었다. 눈을 감은 후엔 몇 번 보드라운 가루에 얼굴 위를 오갔다. 코가 간질거려서 코끝을 찡긋거리자 어김없이 율리히의 타박이 뒤이었다.

“역시 나의 변장 솜씨란.”

율리히가 턱을 치켜들었다. 제 모습을 확인한 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의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자신이 봐도 제법 여자처럼 보였던 탓이다.

“그럼 우리 먼저 출발한다. 그럼 윤, 그리고 건방진 애송이. 수고해. 건투를 빌자고.”

아스탄이 돌아오자 율리히는 다시 창문으로 나갔다.

율리히를 포함한 상단 사람들이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관을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일행은 찢어져야했다. 본디 장사치는 아침이면 길을 나서고 어둠이 이슥해서야 밤이슬을 피하기 위해 쉬러 들어왔다.

여관에 남은 두 사람은 아혼과 2층에서 합류해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아혼은 호위무사 행세를 위해서 아침으로 주먹밥을 대강 먹은 후 주변 탐문을 하는 척 나갔다.

윤과 아스탄은 따뜻한 스튜로 아침을 먹었다. 역시나 아스탄은 진짜 부부인 양 윤을 살뜰히 챙겼다.

“주인장.”

“예!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스탄의 부름에 응하려던 점원을 말린 주인이 날쌔게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윤을 살폈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엔 지난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조금 나른해 보이기도 하고. 허나 성애를 아는 자 특유의 색기에 침을 꼴깍 삼켰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처음으로 튼튼하게 지은 집이 원망스러웠다. 물론 젊은 부부가 머무는 방은 조용했지만 충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젊은 남녀가 이슥한 방에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저 귀로 확인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가면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주게. 이 다음에 있는 여관은 어디지?”

“이틀을 꼬박 걸어가면 산 반대편에 하나 있습니다요.”

“노숙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예. 그래도 상단이나 모험가들이 머무는 공터가 있으니 그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그리하지. 고맙군.”

주인이 가져온 음식을 받자마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탄은 의자에 걸쳐두었던 후드를 꺼내서 윤에게 입혔다. 살결 하나 비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살폈다.

“남자가 제대로 안달복달하는구먼. 머리털 하나 삐져나오질 않게 싸매네.”

“그러니 여기 들어올 때 남자인 줄 알았지.”

“의처증 아녀? 저리 싸매면 갑갑해서 어찌 살아.”

전날도, 그 전날도 여관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던 용병들은 오늘도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을 흥미롭게 구경하더니 주거니 받거니 맞춘 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딴에는 작은 소리로 쑥덕거린다고 했지만 기감이 발달한 초월자들에겐 천둥보다 큰 소리로 들렸다.

아스탄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관 주인이 챙겨준 음식을 아혼에게 넘긴 뒤 길을 나섰다. 지금부터 작전 시작이다. 윤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가라앉힌 채 진지하게 앞을 응시했다.

“근방에 따라오는 자가 있군.”

아스탄은 윤에게만 들릴 만치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윤 역시 거슬릴 듯 미묘한 거리에서 쫓아오는 인기척을 느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은 샘이 나왔다.

작전 개시.

윤이 아스탄의 손바닥에 글을 썼다. 이제부터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말을 해선 안 된다. 율리히를 비롯한 일행은 배탈을 가장해서 삼십 분 거리의 공터에 숨어있다. 윤이 거짓으로 납치를 당하고 나면 아스탄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곳에서 쉬어가지.”

“예.”

“당신도 이곳에 앉도록 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널찍한 바위까지 있었다. 아스탄이 그 위에 걸터앉은 채 윤을 불렀다. 윤은 고개를 저은 뒤 냇가를 가리켰다.

“저곳에 가겠다고? 같이 갈까?”

아스탄은 산적들이 들을 수 있도록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윤은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자그마한 샘은 여행자나 짐승들이 목을 축이기에 딱 알맞았다. 바닥이 투명하게 비치는 샘에 다가간 윤은 손을 물에 담갔다. 적당히 시원한 감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였다.

‘율리히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물에 씻으라고 했던가? 아니면 물에 씻은 후에 얼굴을 닦아?’

망설이던 윤은 결국 두 손을 담가서 물을 담뿍 퍼올려 세수했다. 율리히가 알았더라면 화장이 지워진다며 마구 욕을 퍼부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점점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잠시 말이 푸르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산적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의 청년이었다. 황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찬란한 금발이 햇빛에 나부꼈다. 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순간, 올가미가 날아와서 그의 허리를 죄었다. 윤은 튕겨 나가듯 남자에게 끌려갔다.

“……왜 이렇게 무거워.”

납치범이 투덜거렸다. 윤은 후드 속으로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엄연히 남자로 여장을 해도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는 한 팔로 윤을 들어 올려 안장 위에 얹는다. 윤은 생각지 못한 납치범의 존재에 마구 발버둥쳤다.

“거참 얌전히 끌려오면 될걸. 귀찮게 구네. 슬립!”

남자의 마법에 윤이 축 늘어졌다.

아스탄 역시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놀란 듯 크게 뜬 눈은 이내 경악으로 변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안녕.”

남자는 재빨리 말을 몰아 사라졌다.

아스탄은 윤이 납치된 후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나까지 사용해서 보법을 밟아서 쏜 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아혼이 뒤에서 헐떡거리며 쫓아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약속 장소엔 빈둥거리며 나무 위에 누워있는 율리히와 안절부절 못하는 예화 상단 사람들이 보였다. 아스탄이 큰 소리로 외쳤다.

“율리히!”

“응? 왜? 보아하니 작전대로 굴러간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윤이 위험하다.”

아스탄이 아를 악 문 채 말했다. 아직도 제 눈으로 확인한 납치범의 정체를 믿을 수 없었다. 율리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 놈이 몸이 약해져도 산적 따위에 당할 놈으로 보여?”

“……납치범이 황룡 가리온이라면?”

아스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작품 후기 ============================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종장이 다가오네요 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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