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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88화 (8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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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스탄은 침상에 놓인 꽃을 바닥으로 모두 밀쳐서 떨어트린 뒤 그 위로 윤을 눕혔다. 눈가에, 콧등에,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윤은 그의 옷자락 속으로 손을 넣었다. 간절한 마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를 탐했다.

“아…. 흣, 그만…….”

아스탄이 천천히 윤에게 파묻은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고개를 도리질치며 뒤로 물러나는 윤의 허리를 붙잡아 결합을 깊어지게 만들었다.

윤은 입술을 깨문 채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짭짤한 액체가 입술로 흘러들었다. 그의 모든 걸 삼키고 싶었다. 속에 도사린, 탐욕스러운 괴물이 고삐 풀린 채 마구 설쳤다.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걸 깨달았지만, 거칠게 난동부리도록 풀어두었다.

뇌를 녹여버릴 듯 작열하는 열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절정의 순간 서로가 서로를 절박하게 끌어안았다. 세상에 매달릴 곳이 그밖에 없는 것처럼. 맞닿은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추락하는 듯 한없이 떨어지는 절정의 여운은 길고 서글펐다. 아스탄은 몸을 옆으로 쓰러트린 채 윤을 끌어안았다. 체액으로 끈적끈적한 몸이 불쾌할 법하지만, 오히려 예민해진 감각을 가라앉히며 여운을 남긴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들어와서 땀에 젖은 몸을 식혔다.

뜨거운 감정으로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델 것 같은 기분에 윤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너는 이곳에 남을 텐가?”

윤이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흔들리는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를 마음에 담았다. 누구도 그 자리에 들지 못해. 그러니 내 곁에 남아다오.”

아스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기다렸지만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빈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나도, 나도 아스 너를 좋아해.”

윤이 망설이다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 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결국 그의 바람에 대한 답은 주지 않았다.

아스탄은 윤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어서 윤의 뺨부터 목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목을 조를 것처럼 살짝 쥐었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심장이 조각조각 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윤과 자신의 마음은 그 종류가 달랐다. 죽음을 목전에 두어서도 놓아줄 수 없는 집착을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아스탄은 윤을 끌어안은 채 가만히 그 심장에 귀를 대었다. 약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윤은 아직 살아있다. 죽음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것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다.

아스탄은 뇌리에 새기듯 중얼거렸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 옷을 대강 꿰어 입었다. 밖으로 나가서 물을 떠온 그는 체액으로 엉망진창이 된 윤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서 남의 시중을 든 건 윤이 처음이라 어색하기 그지없는 손길로 손가락부터 팔, 가슴, 그리고 비부까지 몸을 말끔하게 닦아주었다.

그 후엔 침상을 정돈했다. 더러워진 시트는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율리히가 알면 엄청나게 욕을 퍼붓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뒷정리를 끝낸 뒤 꽃을 가져와서 침상에 깔았다. 그 위에 윤을 눕히고, 다시 꽃으로 덮어주었다. 최대한 이곳의 마나에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꽃 속에 파묻힌 윤은 연인에게 살해당한 어느 아름다운 공주의 그림처럼 처연했다. 희미하게 벌어진 입술과 가냘프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의 움직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숨이 멎은 듯 생기를 찾을 수 없다. 끔찍했다.

윤의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방 밖으로 나왔다. 그 역시 초월자였기 때문에 함께 있어서 좋을 게 없어서였다. 다만 방 안의 연인을 지키듯 문가에 기대어 앉았다.

“정말 최악이군.”

아스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펼쳐졌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레나드와 자신의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다. 설령 말라죽는다 해도 그가 눈앞에 있어야하는 지독한 집착이다. 곁을 떠나가는 걸 볼 바엔 차라리 죽여서 그 시신이라도 옆에 두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윤을 죽이고, 자신도 따라갈 것 같았다.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건 허무한 슬픔이다.

아스탄은 가방에서 술을 꺼내 단숨에 반을 들이켰다. 전생의 업을 지금에서야 겪는 것일까. 어이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주신 벨라드의 교리에 따르면 살아있는 생물은 끊임없이 삶을 반복한다고 한다. 하늘의 그물은 결코 악인을 놓치는 법이 없어서 전생에 죄를 지은 자는 언젠가 그 대가를 받게 될 거라던 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영원회귀. 끊임없이 삶을 반복하는 저주다. 레나드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왔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눈썹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 사라지자 짙은 어둠이 그를 감쌌다. 무거운 구름이 떠다는 모습을 보니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밤하늘은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흐렸다.

“이봐, 손님으로 왔으면 예의를 지키도록 해.”

율리히가 자다 깬 듯 졸음이 주렁주렁 매달린 얼굴로 나타났다. 장로를 상징하는 로브를 벗은 그는 상하의가 연결된 기다란 옷을 걸친 상태였다. 걸어올 때마다 옷자락이 스치며 사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적당히 궁상을 떨라고. 너 같은 초월자가 불온한 마나를 퍼뜨리는 탓에 어린 요정들이 불안해하잖아.”

“네가 봐도 그리 한심한가.”

“세상에 버림받은 몰골로 그리 앉아서 술 마시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여길 걸?”

율리히는 아스탄의 맞은편에 다리를 접어 앉았다.

“이봐, 조카님. 표정 좀 풀어.”

“나는 그대의 조카가 아니다.”

율리히가 혀를 쯧쯧 차며 던지는 말에 아스탄이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난도질 할 것처럼 매서웠다. 이크. 율리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그는 뒷목을 긁적거렸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엔 무거운 광기가 서려있었다. 말실수를 했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설마 레나드의 환생과 윤이 연인이었을 줄이야.’

설상가상으로 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제멋대로 떠든 건 장로들인데 뒷감당은 저가 하게 생겼다. 난감한 상황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쩔 셈이야?”

“무엇을 말하는 건가.”

“누구긴, 내 친우의 이야기지. 이대로 손에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을 거야? 어린아이처럼?”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은 정곡을 찔렀다. 율리히의 도발에 아스탄은 서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곳의 공기는 윤에게 독이야. 돌아가면 분명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여기 있으면 반드시 죽어.”

“황룡을 만난다면….”

“그가 내게 말한 거야. 공기가 그를 거부한다니, 가리온이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아마 그자는 해결할 방도가 있어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다.”

율리히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스탄 역시 수긍했다. 단 한 번 만났지만 그 지고한 존재가 미덥냐고 물어보면 아니라 답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가 꺼려졌다.

“나도 술 좀 줘.”

“요정이 음주를 해도 되는 건가?”

“내가 막나가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잖아?”

아스탄은 짐에서 술병을 꺼내 율리히에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율리히의 손 안으로 안착했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술을 마셨다. 처음엔 껄끄럽게 여겨지던 이였으나, 의외로 한 공간 안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네가 정녕 레나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모습을 보여.”

율리히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아스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갑고 서늘한 얼굴은 감정의 편린도 찾을 수 없었다. 길게 내리깐 속눈썹이 만들어내는 음영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음울하게 빛났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윤을 보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매사 냉정하게 판단하는 그도 윤의 일엔 이성을 잃었다.

“……나도 알고 있다.”

아스탄이 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쓸데없이 무거운 기는 갈무리하도록 해. 그리고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라고.”

율리히가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미련 없이 돌아선 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자신은 레나드가 아니다. 또 다시 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없다. 뜨거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문에 머리를 기댄 아스탄은 눈을 감았다.

**

“내기를 하자니까?”

대답을 재촉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크게 울렸다. 의도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주신 벨라드가 낳은 신룡(神龍) 중 시간을 담당하는 황룡 가리온은 대단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키와 체구도 무척 커서, 목을 꺾어야 그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어디로 보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생명체였으나 본능적으로 그가 무섭고 꺼려졌다.

“싫으면 그만두고.”

가리온은 물 위를 가볍게 걸어와 내 앞에 섰다. 흠칫 놀라 뒷걸음치자 그가 다가서서 거리를 좁혔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리온이 말했다.

“이봐. 월스턴의 아들. 너 윤을 좋아하지?”

“아, 아닙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툭 던진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했지만 소용없었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리온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흠, 윤 그 녀석도 능력이 좋단 말이야. 가만 보자, 네가 올해 몇 살이랬지? 열 살이라고 했나? 나이차는 그렇다 쳐도 친우의 아들을 홀라당 집어먹다니 이거 도둑 놈 아니야.”

“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십시오! 축성은 언제 내려주시는 겁니까? 이곳에 온 건 그 때문입니다.”

“재미없는 놈.”

가리온은 투덜거렸지만, 유쾌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밖에서 대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래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축성을 먼저 주십시오.”

“그리도 원한다면 지금 인장을 내려주지.”

우미한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불타는 듯 뜨거운 통증과 함께 손등에 선명한 황금색 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통증을 견뎠다.

“좋아, 축복은 끝이 났다. 이제 너는 하찮은 독에 죽지도, 병마에 시달리지도 않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대가는 알고 있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아버지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가리온이 필요로 할 때, 우리는 그에게 몸을 내어 주어야한다. 하지만 인간으로 현신할 수 있는 신룡이 무엇하러 하찮은 미물의 육체를 빼앗겠는가.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해 사소한 대가였다. 허리를 꾸벅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참! 그냥 보낼 뻔 했네.”

가리온이 박수를 크게 쳤다.

“중요한 걸 빼먹을 뻔 했잖아? 월스턴과 약속을 했거든. 후예들에게 단 한 번, 비밀스러운 지혜를 빌려주기로.”

“비밀… 이요?”

“그래, 무엇이라도 알려주지. 설령 그 어떤 것이라도 단 한가지는 네게 진실을 가르쳐주겠어. 예를 들어서 네 대부의 정체라던가?”

신의 탈을 쓴 악마가 속살거렸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에 손바닥이 척척하게 젖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윤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아니면 그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어때? 선택해. 단 하나야.”

“제 선택은…….”

한참을 망설이던 내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가리온을 응시했다.

악마가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 작품 후기 ============================

Crazyear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추코를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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