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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86화 (8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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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그래서 난 언제까지 살 수 있는 거야? 율?”

율리히의 무표정한 얼굴에 놀란 기색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윤은 차분한 낯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빛이 얼굴을 부드러운 색으로 물들인다.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무척 태연했다. 율리히는 처음으로 자신의 친우가 낯설게 생각되었다. 침착한 기색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되돌렸다.

“죽는다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래 보여도 나도 초월자라고.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점점 짓눌리듯 약해져가고 있어.”

윤은 깨어나자마자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나의 흐름이 엉망이었다. 폐와 심장이 있는 곳의 에너지 또한 굉장히 미약했다.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몸의 이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맑고 깨끗하게 느꼈던 이세계의 공기마저 무겁고 텁텁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거부하는 양 느껴졌다. 이대로 여기에 머물면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확신과도 같은 가정이었다.

“너 역시 세상의 지혜를 끝까지 더듬은 위대한 마법사잖아. 대답해줘. 내 몸이 그란디아와 맞지 않는 걸까? 얼른 나가라고 내쫓는 거야?”

윤의 우스갯소리에 율리히는 침묵을 택했다. 그것이 무언의 긍정임을 알아차린 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좀 부정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처치를 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그러니 황룡 가리온을 만난 후 빨리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위험해.”

“……율리히.”

“이대로 죽고 싶은 거야?”

율리히가 굳은 표정으로 윤을 응시했다. 윤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란디아로 오기 전까지 지극히 멀쩡했던 육신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온 순간 달라졌다. 마치 내장이 조금씩 고장이 나는 듯 느리게 그 기능을 잃었다. 언젠가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리도 원하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말을 들은 기분은 이상했다. 죽음. 혹자에겐 피하고 싶은 것이나, 윤에게는 바라마지 않던 안식과 같은 단어였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으로 오십 년 이상을 살아왔다. 크게 다쳐도 죽지 않았다. 그에겐 사신의 낫이 언제나 피해갔다.

어디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허위허위 살며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잃고, 마지막엔 배신을 당했을 때도 윤은 살아남았다. 덕분에 꿈에 그리던 현실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도 방황해야했다.

언젠가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와 있었다.

“그란디아의 공기는 이전에는 몰라도, 지금의 네게 독이야.”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죽지 마, 윤.”

율리히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윤은 대답 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공터엔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의 여신이 덮어씌운 베일 아래 푸르게 반짝이는 별들을 응시했다.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가족도, 친우도 아닌 아스탄의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언제나 단정하던 그가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엔 고뇌의 기색이 역력했다.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일까. 율리히가 말했을 가능성도 배재하지 못했다.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어쩐지 생각만으로 심장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든다.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게 확실해?”

“내 생각이 맞는다면 얼마 남지 않았어.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조금 길지 몰라.”

율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얼마나 남은 건데?”

“내 예상대로라면 한 달도 힘들어. 네가 살던 곳의 공기와 이 세상은 다르니까.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마나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했지? 이질적인 기운에 네 몸이 버티질 못한 거야.”

윤은 시선을 돌려 율리히를 마주보았다.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동요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짙은 밤바다 같은 눈동자는 차분히 친우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율리히 역시 윤을 응시했다. 속눈썹이 촘촘하고 긴 눈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장로가 된 율리히의 싸늘한 시선이 잊혀 지지 않았다. 차갑다는 건 윤의 생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애정도, 미움도.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라는 듯 무기질적인 시선. 거기에 윤은 더 상처받았다. 그런 율리히의 태도가 갑작스럽게 바뀌자 순진하게 믿을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선 멱살이라도 잡고 넌 무슨 생각이냐며 묻고 싶었다.

이전의 윤이었다면 친우를 의심하는 상황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자의 배신이, 차갑게 내쳤던 친우의 모습이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율리히, 한 가지 물을 게 있어. 너는 내 상황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심지어 쓰러지기 전까지 나도 내 몸에 대해서 몰랐어. 황룡 가리온인가?”

“…맞아. 황룡 가리온이 찾아왔어. 네가 돌아왔다고. 그리고 네 친우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 도우라고 하더라. 네가 누워있던 꽃도 가리온이 가르쳐준 거야. 네 몸에 흐르고 있는 마나를 최대한 빨리 제거해서, 네가 살던 곳과 비슷한 몸 상태를 만들어주는 거지.”

“그 도마뱀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입가에 가져다댔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분명 황제의 몸에 강신했을 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황룡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농락하는 게 틀림없다.

“하나만 더 묻자. 날 도와주는 이유가 뭐야?”

“친구를 돕는 데 그 이유가 있어?”

“날 매정하게 쳐낸 건 너였잖아.”

어디까지나 담담한 목소리로 진실을 말하자, 율리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그는 짙은 자괴감을 드러냈다.

“……요정 족 장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네가 말한 것 밖에 몰라. 혈연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태어날 때부터 장로로 점지된다. 그리고 전대 장로가 죽게 되면 장로가 된다. ……마지막, 장로에겐 혼의 세습이 이루어진다.”

“많이 알고 있구나.”

“가르쳐준 건 너니까.”

율리히가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맞아.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체질이 필요하지. 인간들이 말하는 신관처럼, 거대한의 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큰 그릇으로 태어나는 거야. 내 의지 따윈 없는 거지.”

“강신(降神)….”

윤이 신음했다.

“맞아, 비슷해. 장로가 되었을 때,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어.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억, 혼이 물밀 듯이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헷갈리더라. 내가 율리히인지, 아니면 내 아버지인지, 아니면 까마득하게 얼굴도 알 수 없던 이전의 조상들인지.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어.”

“……율리히.”

그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늘어놓는 율리히의 목소리는 넋두리를 하는 것 같았다. 윤은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갑고 잔인한 진실에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두 손을 꼭 마주 쥔 채 경청하였다.

“분명 나의 의지는 있지만,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어. 그때 네가 찾아왔고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말았어. 정말 미안해.”

문득 윤은 요정 족 장로의 계승이 황가의 저주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존재하는데, 다른 사람의 기억이 덧씌워지는 게 비슷했다. 황제는 레나드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본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 내 몸의 주도권은 나에게 많이 돌아왔지. 그래도 가끔은 내 조상들이 가질 때가 있어.”

“대체 왜 그런 방법을…….”

“그 대신 혼의 계승으로 요정 족은 누구보다 위대한 진리를 알게 되었지.”

율리히의 사정을 듣고 나자 모든 게 이해되었다. 결국 까마득히 어린 요정의 몸을 빼앗은 조상들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막말을 했던 거다. 생각 같아선 장로들의 머리털을 다 쥐어뜯어놓고 싶었다.

얼마나 끔찍한 기분이었을까. 모두 기억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감각은. 월스턴과 안즈마네를 잃은 충격에, 삶에 버거워서 더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믿고 말았다. 그러면서 원망만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문득 레나드가 떠올랐다. 그 역시 자신에게 줄곧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자신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최악으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못 견딜 것 같았다.

“다시 사과할게. 네게 냉정하게 대했던 건 고의가 아냐. 상처받지 않길 바라. 내가 밉다면 한 대 세게 때려도 좋아.”

“그래, 밉다. 이 나쁜 놈아.”

윤은 주먹을 꾹 말아 쥐더니 율리히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그러곤 친우의 손을 맞잡았다. 율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손을 잡아당겨서, 윤은 친우의 어깨를 안았다. 저보다 훨씬 체구가 큰 율리히인지라,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기는 자세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때 너 진짜 말 못 되게 한 거 알아? ……네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라도 사실을 말해줘서 고마워. 지금 욕하면 친구 자린 반납해야지.”

“……고마워.”

“별게 다 고맙다.”

멋쩍어진 윤이 데퉁스럽게 말했다. 아름다운 요정의 얼굴은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분명 그에게도 힘든 날이 많았을 것이다. 자신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율리히를 끌어안았던 팔에 힘을 푼 뒤, 모닥불만 쏘삭거렸다. 말 주변이 없는 자신이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월스턴이나 안즈마네였더라면 좀 더 다정한 위로의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아스탄이 돌아오면 함께 먹으려고 굽던 꼬치는 모두 숯덩이가 된 상태였다.

“그나저나 아스는 언제 오는 거야. 술을 만들어오는 건가?”

“레…… 아니 그란디아의 황태자와 친한 사이야?”

율리히의 물음에 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모든 걸 알겠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하게 웃었다.

“결국. 녀석도 성공했군. 정말 난 놈이야.”

“응? 뭐라고 한 거야?”

“아무 것도 아냐. 네가 정 붙일 데가 있었다니 다행이라는 말이었어. 늦었다. 들어가서 쉬어. 너와 황태자는 내 집에서 지내면 돼. 황룡에게는 최대한 빨리 출발하자. 나도 함께 동행 할 게.”

“그렇게 할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을 향해 율리히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윤.”

다정한 목소리에 윤이 멈칫했다. 예전처럼 친근한 목소리였다. 차갑게 내치던 모습도, 무기질적인 시선도 없었다.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보고 싶었어.”

“……나도.”

윤은 울 것처럼 웃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8ㅅ8....

그리고 표지를 바꾸었습니다! 커다란 사이즈는 공지사항과 트이타에 올려두었으니 봐주셔욥 >_<♡♡♡♡♡

아리린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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