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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85화 (8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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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윤은 꽃 속에서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명료해졌다. 처음 보는 꽃에 파묻힌 상태였다. 짙은 꽃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지고 숨이 막힐 정도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꽃을 들어 올리자, 활짝 만개한 꽃잎이 마치 반딧불처럼 푸르게 반짝거렸다.

쓰러지기 전과 달리 몸도 무척 가벼웠는데, 아무래도 꽃의 영향인 것으로 여겨졌다. 윤이 누워있어서 옴폭 파인 주변으로 만개한 푸른 꽃들은 유달리 그 색이 짙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방을 둘러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은 무척 좁고 단출했다. 자그마한 침대와 책상, 의자가 방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필요하고 기본적인 물품만 놓여 있어서 그런지 삭막한데다 생활감까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여관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킨 윤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빌딩만큼 높게 솟은 나무들이 팔을 길게 뻗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나무 사이로 올망졸망 작게 지어진 집들이 보였다. 유령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요정들도 눈에 띄었다. 괴괴한 침묵 속에 존재하는 마을은 한 번 보면 쉬이 잊기 힘든 곳이다. 그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푸른 숲 일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곳에 어딘지 확인하자 이제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새로운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요정들이다. 장로인 율리히가 직접 문을 열어주지 않은 이상 요정이 아닌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아스탄은 어디 있는 거지?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짐을 확인한 윤은 뒷목을 긁적였다. 문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려니 길이 엇갈릴 거 같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오겠지. 의자에 앉아서 꽃을 툭툭 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렇게 들어올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아스?”

예상대로 아스탄이 문 너머에 서 있었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서 윤이 고개를 기웃했다. 깎은 듯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고 눈가는 조금 붉었다. 평범한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변화였지만, 윤은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다.”

성큼성큼 걸어온 아스탄은 팔을 뻗어서 윤을 끌어안았다. 숨 막힐 듯 강한 힘이었다. 윤은 그의 등을 마주 안아 주었다. 내게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윤은 직감했다. 그는 눈치가 없는 거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언제나 강인한 의지로 그를 사로잡던 남자가 흔들린다.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약하게 느껴졌다.

“내 이름을 불러다오.”

“아스탄.”

윤의 어깨를 꽉 붙잡은 채 아스탄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번 더.”

“아스타시온.”

“그래, 나는 ……이 아니야.”

아스탄이 흐리게 미소 지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였다. 손에 힘을 풀면 윤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강한 힘으로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은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발치에서 새끼 여우가 캬웅캬웅 우는 소리가 났다.

“많이 놀랐어?”

“…그래, 네가 영영 잘못되는 줄 알았다.”

아스탄은 여전히 윤을 끌어안은 채,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정 행각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주지 않겠어?”

율리히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는 흰 꽃을 품에 가득 안은 채 방안으로 들어와 침상 위에 한가득 쏟았다. 기존에 놓인 꽃과 무척 흡사한 생김새였지만 색은 달랐다.

“율리히?”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야, 윤.”

율리히가 덤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네가 날 도와준 거야?”

“일단은 그렇다고 해둘까.”

원래도 넓지 않은 방은 건장한 체구의 세 남자가 들어서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비좁아졌다. 율리히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우선 밖으로 나갈까? 남자 셋이 있기엔 이 방이 비좁네.”

“좋아.”

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히가 안내한 곳은 요정의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널찍한 공터였다.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땅을 파놓고, 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율리히는 허공에서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불러냈다. 그 속에는 손질된 짐승의 고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척척 손질한 뒤 꼬치에 끼워서 굽기 시작했다. 금세 공터는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찼다. 새끼 여우의 동그란 눈은 꼬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리는 모습에 윤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차, 오랜만에 구웠더니 양념을 잊어버렸네.”

향신료를 꺼낸 뒤 능숙하게 뿌리는 율리히의 모습에 그만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변하지 않는 모습에 그립고 고통스러운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악취미는 여전하구나.”

윤의 핀잔에도 율리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니, 이건 무슨 행동이야. 요정들이 쫓아올 거 같은데.”

“내가 대장인데 누굴 잡겠다는 거야.”

율리히가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윤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점점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들 사이엔 다시 침묵이 머물렀다. 아스탄은 본디 과묵한 편이고, 율리히는 장로가 된 뒤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 수다스러운 녀석이 말수가 적어졌다.

윤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율리히를 가만 쳐다보았다. 이 적막한 상황이 고역처럼 느껴지는 건 자신 밖에 없는 듯 생각되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자신이 쓰러진 이유라던가, 어떻게 요정의 숲에 오게 된 건지, 왜 자신을 도와준 건지. 많은 의문을 꾸역꾸역 속으로 삼켰다. 듣고 나면 예전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될 거 같아서였다.

요정족의 진실을 알게 된 건 레나드가 열다섯이 되는 해였다. 안즈마네와 월스턴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난 후 윤은 어린 나이에 홀로 남은 레나드를 도와서 그란디아를 이끌어나가야 했다. 그 일은 무척 힘들었다. 본디 그는 장군이었지,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 무게에 짓눌려서 견딜 수 없어졌을 때 율리히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된 친우를 보았다.

“나는 푸른 숲 일족의 장로, 율리히다. 네가 바로 윤이로군.”

장난기 넘치는 표정도, 개구진 미소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낯선 이를 대하듯 무표정했다.

“율?”

윤이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앞의 요정을 바라보았다. 형제나 다름없는 친우가 자신을 낯설게 대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장로 수업을 받기 위해서 떠나긴 했지만,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장난을 주고받던 친우였다.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상관없다만, 다른 이들 앞에서는 자제해주었으면 좋겠군.”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율리히가 자신의 턱을 쓸었다. 무정한 가면 아래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나는 율리히이며, 전대 장로인 딜라티엔이기도 하고, 동시에 초대 장로 에이잔이기도 하다. 네 친구는 이 몸에 존재하되 그만이 있는 건 아니야.”

“……무슨 뜻이야?”

되묻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장로는 한 사람이 아니야. 하나인 동시에 여럿이지.”

“제대로 설명해!”

“너도 정답을 알고 있지 않나. 아닌가?”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정답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율리히의 난감한 표정이 추측이 맞는다고 확신하게 했다. 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번질 정도였다. 윤의 충격받은 얼굴에도 율리히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모두의 기억을 가진 채 나는 존재한다. 물론 너와 함께했던 추억도 내 안에 존재하지. 하지만 율리히의 기억만이 생생한 건 아니야.”

“……말도 안 돼.”

“네 존재 역시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날카로운 물음에 윤은 아픈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비로소 깨달았다. 눈앞의 요정은 친우 율리히가 아니다. 저렇게 말할 요정이 아니었다. 그는 말본새가 사납긴 했지만, 결코 못된 말로 남을 상처주진 않았다.

“우리의 지식이 필요하다면 돕겠다. 하지만 그건 친우가 아닌, 요정족 장로가 주는 도움이지. 받아들이겠나? 인간들의 공작이여.”

그렇게 윤을 내친 건 율리히였다. 백 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다가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먹어봐. 오랜만이라 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율리히가 꼬치를 내밀었다. 윤은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입 베어 물었다. 적당하게 구워진 고기의 육즙과 함께 향신료의 매콤한 맛이 식욕을 돋웠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윤의 입맛을 기억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맛있어.”

윤은 울 것처럼 웃었다. 가장 큰 덩어리를 새끼 여우에게 던져준 뒤 남은 고기를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나무 꼬치는 불쏘시개로 썼다. 가만히 고기가 익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아스!”

생각을 정리한 윤이 말문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내 짐을 열어보면 술이 있거든? 좀 가져다주지 않을래?”

“……황태자를 부려먹는 건, 너 밖에 없을 거다.”

아스탄은 가볍게 타박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거절하지 않았다. 윤이 정말 술이 먹고 싶어서 부탁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율리히와 단 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윤의 주변만 쫄랑쫄랑 맴도는 새끼 여우를 붙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리도록.”

“고마워, 아스.”

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스탄은 성큼성큼 요정의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난 후에야, 윤은 친우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난 언제까지 살 수 있는 거야? 율?”

============================ 작품 후기 ============================

s하루s님, 별빛강아지님, 튜란토트님, 류웰님, blumengarden님께 감사드립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

학생은 아니지만 저도 9월이 되니 조금 바빠졌네요. 얼른 일을 마무리 짓고 자주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요정 = 엘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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