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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주신 벨라드는 열 명의 대신을 낳았다. 대신들은 모두 각자의 역할을 나눠가졌는데, 벨라드 큰 딸인 파르메나는 가정과 의술을 담당했다.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 여신으로 아벨라르 대륙에서 가장 융성한 세를 자랑했다.
물론 치유의 힘을 가진 건 파르메나의 사제들만이 아니다. 모든 대신의 사제들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었으나, 파르메나의 사제만큼 뛰어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덕분에 파르메나의 신전은 병이 낫기를 바라며 기도드리는 사람들과 병자들의 행렬로 종일 문이 열려있었다.
파르메나의 대신전에서 세 번째 가지를 담당하고 있는 대사제 아마리르는 조심스럽게 힘을 거두었다. 지나치게 힘을 쓴 탓에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휘청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식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헐떡이는 아마리르에게 남색 머리칼의 청년이 추궁했다. 귀족조차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대사제에게 거리낌 없이 하대하는 말투를 썼으나 아마리르는 개의치 않았다. 머리를 푸르게 물들였으나 타고난 고귀함을 숨길 순 없다. 황태자 아니 이제는 대관식을 치루지 않았을 뿐, 그란디아의 지배자인 아스타시온이다.
“그, 그것이…….”
아마리르는 이마에 괜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찌 이렇게 되었나.’
평소와도 같은 하루였다. 아니, 지금 있을 일을 예언하듯 신발 끈이 풀리고, 아무 이유 없이 수단 위에 얹은 견장이 떨어져나가는 소소한 일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까지 별 탈 없이 일과를 수행하였다.
오늘도 무탈한 하루를 주어 감사의 기도를 여신께 드리던 중 갑자기 눈앞의 청년이 기도실에 난입했다.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여신 파르메나의 성전에 흙발로 침입한 것은 후일 반드시 사과의 기도를 올리도록 하지”
다짜고짜 자신을 끌고 가는 그를 신전기사들이 막아섰으나, 눈앞에 내밀어진 금패에 모두들 칼을 거두었다. 신분패에 금을 입힐 수 있는 건, 그란디아의 황족 밖에 없었다.
“……화, 황태자 전하?”
“무례를 이해하시오, 대사제. 그대의 힘이 필요하오.”
오픈 게이트, 윤. 황태자가 목에 든 펜던트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벽에서 문이 생겨나자 아마리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마리르 대사제는 본공이 잠시 모시겠소. 반드시 무사히 데려다 드리리라.”
그리고 아마리르의 목덜미를 채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센트리움에서 한참 떨어진 옌센이다. 단숨에 이틀의 거리를 도약한 것이다.
아마리르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침대에 누운 청년을 살폈다. 이국적인 얼굴은 무척 창백했다. 마치 백짓장 같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젖어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련하리만큼 심하게 앓고 있는 청년이었다. 대사제는 청년의 정체를 눈치 채었다.
검공의 후예라던 클레먼스 변경백, 윤이 분명했다. 비록 세속과 거리를 두고 있는 아마리
르였지만, 그를 알고 있었다. 큰 호감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센트리움으로 입성하던 때, 황태자의 행렬에 신전 고아원의 많은 아이들이 구경을 나갔다. 그러다가 넘어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기 전에 윤이 구해준 아이가 바로 파르메나의 고아원에서 양육하던 아이들 중 하나다. 덕분에 아이들의 꿈은 윤과 같은 기사가 되는 것이다. 매일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목검을 휘두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윤의 품에 안겼던 아이는 씻지 않겠다고 뗏장을 부리는 탓에 신관들이 달래기 위해 한참을 고생하였다 들었다.
소중한 아이의 목숨이 구명 받았으니 그 역시 윤을 돕고 싶었다. 전신의 기력을 짜내서 신력을 퍼부었으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몸을 샅샅이 살폈으나 큰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초월자라고 들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의 장기들이 무척 쇠약해진 상태다.
“……현재 신력으로 이분의 몸을 샅샅이 훑었으나 큰 이상을 발견하지 못 했나이다, 전하. 단지 몸이 지나치게 쇠해진 상태라 기력을 보강하면 될 일로 사료되옵니다.”
40대 후반의 나이인 대사제 아마리르는 농경신의 사제답게 풍만한 체형을 가졌다. 그러나 연달은 신력의 사용으로 둥그렇던 뺨이 훌쭉 패인 상태였다.
“그런데 왜 피를 토한단 말인가?”
“그, 그것은…….”
아스탄이 내뿜는 기세는 대사제의 멱살이라도 잡아챌 듯 사나웠다. 으르렁거리는 다그침에 아마리르가 어깨를 움츠렸다.
‘윈디아의 에로메스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결단코 평범한 사이로 보이진 않았다. 평범한 주군과 기사라 하기에, 황태자의 태도는 석연치 않았다. 제도를 한바탕 휩쓸고 간 소문을 떠올렸다. 아마리르는 땀으로 푹 젖은 손수건을 구명줄처럼 꽉 움켜쥐었다.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지? 대사제의 힘으로도 부족한가? 그대들의 영적 지도자라도 끌고 와야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건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교황이라도 끌고 올 태세였다. 등으로 식은땀이 비처럼 솟아났다.
“애먼 사람을 잡지 마시오, 그란디아의 황태자여.”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이 열렸다. 아스탄과 아마리르가 동시에 문을 쳐다보았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요정이 문가에 서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머리카락이다. 머리칼은 길게 물결쳐서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그에 감싸인 새하얀 얼굴은 여인이라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다.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가 인간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요정의 등장에 아마리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대는 누구지?”
“나의 이름을 그대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인간들의 지배자여.”
“……율리히인가.”
“맞아, 나는 푸른 숲 일족의 첫 번째 가지. 장로 율리히요. 그대는 연장자와 타종족의 장에게 좀 더 존경을 보이는 게 좋겠군. 그란디아의 황태자여.”
율리히가 미끄러지듯 걸어 들어와 윤의 머리맡에 섰다. 새하얗게 빛나는 로브의 소매에서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아름다운 손이 이마를 짚었다. 손에서부터 청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 맑은 마나가 윤에게 흡수되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율리히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이 예상과 맞았다는 거냐?”
아스탄은 경계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윤을 비롯한 사총사가 다시없을 친구라는 건 알고 있다. 허나 과거의 일일 뿐이다. 그란디아에 머무는 동안 율리히를 찾아갈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는 부분이 그 방증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율리히가 제 친구라는 걸 부정했다.
시황제 월스턴의 기록에는 요정 율리히가 상당히 장난스러운 성격이었다고 서술되어있다. 가장 처음 만났던 때도 윤을 납치해 고기를 먹고 있었다고 할 정도다. 요정답지 않게 별종이었다.
일족마다 다르긴 하였으나, 푸른 숲의 일족은 생명 존중에 큰 가치를 두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걸 극단적으로 거부했다. 당연히 남의 살로 만든 육식은 거부했고 채식만을 고집했다. 심지어 나무에 달린 열매도 따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것만 먹을 정도였다. 율리히는 고기를 먹다 들킨 탓에 장로의 후계자 임에도 불구하고 숲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눈앞의 요정은 제가 알고 있던 기록과 상당히 달랐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듯 보였다. 마치 잘 만든 석상처럼 서늘한 이목구비는 어떠한 감정의 편린도 찾을 수 없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다.
“우선 엘븐 포레스트로 가지. 황룡을 만나는 게 시급하니.”
“그대를 어떻게 믿지?”
아스탄은 경계의 태도를 늦추지 않았다.
“윤을 구하고 싶다면, 그리 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사람들은 윤과 다른 존재니까. ……일단 파르메나의 종은 돌려보내는 게 좋겠군.”
율리히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기다란 스태프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백단목을 깎아 만든 스태프는 약 2메타브에 달했는데, 화려한 세공 대신 나무의 결을 살려 만들었다.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가장 중요한 마력의 핵은 사람 머리만큼 커다란 푸른 보석이었다. 문스톤인건지, 펜던트가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센트리움의 대신전으로 향하는 문이오. 수고했소. 파르메나의 종이여.”
율리히는 스태프의 끝으로 가볍게 벽을 두드렸다. 마치 공간 이동의 목걸이를 사용했을 때처럼 허공에서 문이 생겨났다.
“누구 마음대로 대사제를 돌려보낸단 말인가. 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신력이나 마력을 퍼붓는 건 최대한 자제하는 게 좋아. 너도 윤을 구할 방법을 모르지 않나.”
아스탄은 이를 악물며 머릿속으로 율리히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지, 교황의 멱살을 잡아오는 게 좋을지 저울질하였다. 일단 율리히 역시 마법사로서 초월자이며, 윤의 이세계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점을 떠올렸다.
결론을 내린 아스탄은 대사제 아마리르를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대사제, 본공의 행동이 무례하였음을 이해하여 주시오. 센트리움에 돌아가는 대로 정식으로 그대에게 보상하리다.”
“아, 아닙니다. 전하.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응당 돕는 것이 파르메나의 자식들이 지켜야할 임무지요.”
아마리르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비록 세속과 거리를 둔다하나,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은 세속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란디아의 지배자가 될 이에게 빚을 달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파르메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아마리르가 문을 열었다. 푸르게 일렁이는 공간이 보였다. 마치 무저갱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었으나 불길한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푸른 기운에 몸을 맡겼다. 환하게 터져나오는 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대신전의 본당에 서있었다. 3층 높이의 거대한 스태인드글라스가 반짝이고, 아르메나의 기운이 아늑하게 그를 감쌌다.
“대사제님!”
“무사하셨습니까!”
그를 발견한 성기사가 달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아마리르가 자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은 겪기 힘든 이 일을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하며 사람들을 맞이하였다.
“자, 우리도 엘븐 포레스트로 떠나도록 하지.”
대사제가 들어가고 난 후 문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율리히가 말했다. 다시 스태프로 벽을 두드리자 새로운 문이 생겨났다.
율리히는 앓고 있는 윤을 안아들기 위해 팔을 뻗었다. 재빠르게 발도한 아스탄이 그를 저지했다. 목젖에 검 끝이 닿을 듯 가까웠으나 율리히에게선 불쾌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안고 가겠다.”
“많이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았구나.”
아스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율리히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이 잠시간 그의 낯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요정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아직도 나를 백부라 불러주지 않을 테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정확히 백오 년만이구나. 레나드.”
율리히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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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구시퍼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소장본이랑 이북에 대해 물어보시는 질문이 종종 들어와서요 8ㅅ8
소장본은 아마 9월 초중순부터 준비를 하게 될 거 같아요. 예쁜 일러스트 엽서도 함께 한답니다 >_
그리고 이북은 아직 정확하게 결정된 게 없어서.......8ㅁ8...... 아마도 이쪽도 여러분께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프라인 행사도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쪽은 연달은 악재로 잠시 보류하도록 하겠습니다 ㅠ0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