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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저를 두고 갔다고 원망하던 목도리의 저주가 통한 건지, 두 사람이서 씻을 수도 없을 만큼 욕탕은 좁았다. 체구가 작은 윤도 다리를 쭉 펴지도 못할 정도다. 호사를 누린 건 새끼 여우뿐이다. 욕탕에서 찰박찰박 헤엄을 치고 신나게 놀았다. 손발이 쪼글쪼글해지고 나서야 물 밖으로 나왔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땐 그리 오래 몸을 담그면 좋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몰라. 따뜻한 게 기분 좋아서 그랬어. 아스, 너도 얼른 씻어. 많이 찝찝하겠다.”
“우선 네 젖은 머리부터 말리도록 하지.”
의자에 앉아있던 아스탄은 제 앞을 툭툭 쳤다. 윤은 자연스럽게 그 사이로 가서 앉았다. 목도리는 털을 말려주겠다는 그를 끈질기게 거부했지만 도리 없었다. 그대로 잡혀와 맑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제 털이 사방팔방 부풀어 올라 솜뭉치처럼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윤의 머리를 모두 말린 후에야 아스탄이 줄을 잡아당겨서 여관 직원을 불렀다. 욕탕의 더러워진 물을 갈기 위해서다. 사용했던 물을 흘려보내고, 새로이 끓는 물을 날라 와서 탕에 부었다. 든든한 덩치를 가진 직원 둘이 달라붙어서 네 번을 왕복했다. 쌀쌀한 날씨에도 직원들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수고했어요.”
아스탄의 돈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동화를 꺼낸 윤이 그들에 수고비조 주었다. 모든 서비스가 숙박비 안에 포함된다는 걸 알지만 불쌍해서였다.
“가, 감사합니다!”
여관 직원이 감격한 낯으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참, 저녁은 위에서 먹을 수 있나요?”
“……식당에서 드시는 게 원칙입니다만.”
윤이 동전을 더 꺼냈다.
“당연히 날라드려야죠. 무엇을 원하십니까? 손님.”
“남자 둘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그리고 양념을 하지 않고 구운 고기도 한 덩이 가져다 줘요. 아참, 흑맥주도.”
“예, 반시간만 기다려주십시오.”
여관 직원은 생각지 못한 횡재에 싱글벙글 웃으며 방을 나갔다.
윤은 아스탄을 기다리며 목도리와 함께 침대에 누워 뒹굴 거렸다. 마치 솜사탕처럼 보드랍게 부풀어 오른 털에 뺨을 비볐다. 강인한 팔이 뒤에서부터 안아왔다. 은은하고 남자다운 체취가 풍겨왔다. 아스탄의 가슴과 윤의 등이 밀착했다. 따뜻한 체온이 기분이 좋았다. 같은 거 달린 남자의 품에 안겨서 기분 좋다고 생각하다니, 한 달 전만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다.
“감기 기운은 괜찮아진 건가?”
“응, 많이 좋아졌어.”
“……네 말과 달리, 열은 더 높아진 것 같군.
윤의 이마를 짚은 아스탄이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 안긴 체온도 높아져서 불덩어리 같다.
“정말 괜찮아. 겨우 비 좀 맞은 걸로 감기에 걸리면 초월자 명함도 반납해야지.”
윤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대답은 괜찮다고 했지만, 몸도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청명한 마나로 가득한 공기도 어쩐지 몸을 짓누르는 듯 무거웠다.
“이전에도 몸살감기에 걸려서 호되게 앓았던 게 누군지 생각나지 않는 건가?”
“……몰라. 나는 기억 안나.”
“가리온을 만나보면 물어볼 게 늘었군.”
이렇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처음이다. 윤은 소드 마스터가 되기 이전에도 건강체질에 속했다. 짧은 간격으로 감기에 두 번이나 걸리다니, 정말 초월자 직위를 반납해야 될지도 몰랐다.
“일찍 식사하고 자는 게 좋겠어.”
“저녁은 그냥 스튜랑 빵 정도로 간단하게 시켜뒀어. 가지고 올라올 거래.”
“잘했다.”
아스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윤은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비가 샌 흔적이 여기저기 얼룩덜룩하게 남아있다.
문득 생각났단 목소리로 아스탄이 물었다.
“가리온을 만나고 나면 너는 어쩔 셈이지? 만약 네가 황룡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 늙지 않는 네 비밀을 해결하게 된다면 말이다.”
“글쎄….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윤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마냥 시간을 흘려보냈더니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다. 친구 현일과 사범님이 기다리고 있다. 군대도 다녀와야 했고, 엉망진창이 된 학점을 수습해서 학교도 졸업해야했다.
‘만약 돌아간다면… 현일이에게 털어놓자. 믿지 않더라도.’
새끼 여우의 말랑대는 발바닥을 누르며 장난치던 윤은 아스탄의 얼굴이 굳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꼭 돌아가야 하는 건가?”
“아스?”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연인도, 가족도….”
“그곳에서 해결해야할 일이 있어. 물론, 당장 돌아가겠단 뜻은 아니야. 이레인도 좀 더 커야하고, 너도 도울 거고…. 목걸이도 그 힘을 회복해야하니까.”
윤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게다가 그곳이 내가 살던 세상인 걸. 내가 만약 너에게 날 따라오라고 강요하면 어떻겠어? 낯선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어?”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너를 사랑한다, 윤.”
아스탄이 치미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겠단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언제일까. 윤은 조금 슬퍼졌다.
“나도 널 좋아해, 아스.”
아스탄은 깨달았다. 감정의 질량이 다르다. 윤의 마음은 자신이 늙지 않음에 절망하는 것처럼 치기어리면서도 귀엽고 산뜻한 감정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렇게 쉽게 떠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뒤돌아서면 잊을 것처럼 윤은 말한다. 자신이 가진, 질척질척한 마음과 전혀 다르다. 아스탄은 윤을 사납게 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목이 메었다. 이대로 말을 꺼낸다면 쉰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이대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스탄의 말이 끊어졌다.
“말씀하셨던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을 열자 여관 직원이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튜와 빵, 그리고 싱싱한 샐러드. 양념을 치지 않고 구운 고기와 흑맥주를 얹었다. 자칫 쏟아질까 위태위태할 만큼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식사를 하신 후엔 다시 줄을 당겨주시면 치우겠습니다.”
“수고했다.”
수고비로 동화를 건넨 아스탄이 뒤돌아섰다.
“일단…… 식사를 하도록 하지.”
이곳에 윤과 아스탄이 온다는 건 일부 심복들만 아는 극비 사항이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독을 가리기 위한 검시를 빠트리지 않았다. 지겨울 만큼 절차에 맞춰서 검사를 끝내고 나자 스튜가 반쯤 식어 있었다.
구운 고기를 여우에게 준 윤은 아스탄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치를 보며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어쩐지 체할 것 같았다. 위태로운 분위기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목도리는 제 몸통만큼 커다란 고기 위에 올라타 신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체기를 불러일으키는 식사시간이 지났다. 더부룩한 속을 문지르며 윤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양껏 식사한 새끼 여우 역시 볼록한 배를 발라당 내놓았다. 썩 많이 먹은 건 아니지만, 배를 채우는 게 도움이 되었던 건지 잠이 솔솔 몰려왔다.
“윤.”
아스탄이 말을 걸어오자,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탐색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집스럽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 푹 쉬도록 해.”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윤은 정말 잠들어버렸다. 한없는 수마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잠결이었다. 아스탄이 귓가에 가만가만 속삭인다.
“옌센의 잡화점에 모험가들이 기록한 지도가 있다더군. 나 혼자 가서 사올 터이니, 너는 좀 더 쉬도록 해. ……성수도 좀 구해오는 게 좋겠군.”
남자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이마에 와 닿는다. 무척 뜨거운 입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쩐지 서늘하다. 윤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뜨거워.”
내쉬는 숨이 뜨겁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숨쉬기 힘들 만큼 목이 말랐다. 눈도 뻑뻑했다. 점막이란 점막이 모두 마른 것 같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서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물병으로 간신히 목을 축였다. 메마른 점막과 달리, 옷은 마치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었다.
“……뭐야.”
윤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공기조차 그의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늘어져 있는데,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방이라니까!”
“얼른 문을 열어!”
새끼 여우가 위험을 감지한 듯 털을 바짝 세운 채 캬웅 울었다. 문을 열지 않으면 부서트릴 것처럼 그 기세가 사납고 위험했다. 윤은 제 뺨을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물병의 물을 모조리 마시자 정신이 든다. 비틀거리며 문가로 다가갔다.
다행히 문고리가 부서지기 전에 불청객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덩치 큰 사내를 비롯해 다섯 명 쯤 되어 보이는 불량배들이다.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역한 냄새에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이 몸을 고자로 만들었겠다!”
키탄이었는지, 키튼이었는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산적이 씩씩거렸다. 마치 대역죄인을 대하듯 뻔뻔하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네 놈을 용서치 않겠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왜 자는 사람 귀찮게 깨우고 난리야?”
평소처럼 빈정거리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서 나왔다. 윤은 목을 붙잡았다.
“남은 한 쪽도 터뜨려줘?”
“이 년이!”
“놈이라니까.”
키탄은 머리끝까지 분노에 차 시뻘게진 얼굴이 되었다. 소중한 불알을 깨버린 걸로도 부족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열불이 치솟았다.
“사람을 남창 취급한 게 누군데.”
윤이 팔짱을 낀 채 빈정거렸다.
‘내 몸이 이렇게 무거웠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눈앞의 냄새나는 불량배들을 치워버리고 쉬고 싶었다. 탈이 나도 제대로 탈난 게 틀림없다.
“네 년을 예뻐해 주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울며 빌어도 봐주지 않겠다! 네 서방 역시 지금쯤 죽은 목숨일 테니 저승에서 상봉하도록!”
키탄이 씩씩거리며 대검을 뽑아들었다. 좁은 복도와 계단에서 뽑는 민폐에 같은 패거리마저 욕설을 짓씹으며 황급히 피한다. 윤의 머리를 향해 칼이 크게 베어 들어온다. 문가에 서 있었던 터라 피할 공간이 여의치 않은 점을 노린 일격이다.
“죽어라!”
“넌 정말 학습이라는 걸 모르는 구나.”
뒤로 물러선 윤이 문을 확 닫았다. 대검은 단단한 나무문을 반쯤 부순 채 박혀들었다. 있는 힘껏 잡아당겨도 검은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용을 쓰는 키탄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문을 활짝 열자 검을 뽑는 데 열중하던 놈이 비틀거린다.
윤은 재빠르게 키탄의 품으로 파고들어서 배에 주먹을 날렸다. 컥! 소리와 함께 상체가 크게 굽었다. 그리고 턱을 차올려 계단 아래로 떨어트렸다.
불량배들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목격하자 겁을 먹었다. 서로 눈치만 보았다. 이곳에 온 것도 부자인 귀족 나리가 남창 하나만 끌고 왔다며, 그를 죽이고 돈은 나눠가지자는 키탄의 꼬임에 온 거였다. 그들 중 가장 강한 키탄이 개구리 짜부라지는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자 덤벼들지 못했다
“씨발! 다 같이 덤비면 지가 뭐, 신이라도 돼? 황제도 칼에 찔리면 다 똑같이 뒈지는 거야.”
불량배 중 하나가 녹이 슨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것처럼 날붙이를 하나씩 손에 든 채 윤을 둘러쌌다. 윤은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으로 척척하게 젖어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저들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그렇지. 황제도, 귀족도, 거지도. 베이면 잘리는 건 똑같아. 불량배 주제에 제법 옳은 말을 하는 군.”
단검을 든 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경악한 눈이 잘려나간 몸을 쫓아간다. 뒤늦게 허공으로 새빨간 피가 튀었다.
범인은 용병의 습격을 받았지만,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아스탄이었다. 그의 한쪽 팔엔 봉투가 안겨 있었다. 단지 한 손으로 발도하고, 사람의 몸을 뼈까지 잘라냈다. 외양 때문에 와 닿지 않는 윤의 무위와 달리 현실적인 공포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좋은 말할 때 꺼지도록 해.”
아스탄이 사납게 외쳤다. 겁을 먹은 불량배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아스, 왔어?”
윤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위가 뜨거웠다. 마치 불덩어리를 삼키는 고통에 윤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참을 수 없어서 모두 토해냈다. 붉은 선지피가 윤의 손바닥을 적셨다. 아스탄의 놀란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윤! 정신 차려라!”
아스탄이 다급하게 다가와 윤을 끌어안았다. 그가 거칠게 줄을 잡아당겼다.
“빌어먹을! 의원! 의원을 불러오라!”
짤랑이는 종소리가 귀를 찢어놓을 것처럼 사납다.
‘너는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윤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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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까지 가필 수정을 했습니다 ^^ 남은 수정분은 내일 안에 마저 올릴게요!
여러가지 사건의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만, 앞부분을 굳이 다시 읽지 않으셔도 내용 변동은 거의 없기 때문에 내용 진행에는 차질이 없으실 거예요! 일일연재에 집착하느라 내용이 많이 무너져서 그부분을 보강한거라서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