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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뭐야, 지금 나보고 말한 거야?”
꽁꽁 묶인 탓에 윤은 다리의 힘으로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굽힌 채 발바닥에 힘을 주고, 점프하듯 일어서는 묘기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윤이 성큼성큼 걸어서 키탄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종족의 피가 섞인 건지 키가 2 메타브는 가뿐이 넘었다. 고개를 꺾어서 올려다봐야하자 자존심이 상했다.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가 산적 같다. 저쪽보단 내가 잘생겼지. 쓸데없이 키만 커선 뭐해?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형씨, 나한테 볼 일 있어?”
“네 녀석은 머리가 잘 돌아가나 보군.”
키탄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좀 똑똑해.”
윤은 턱을 치켜들었다. 잘난 체 했지만 상체가 꽁꽁 묶인 탓에 전혀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너 유랑예인이지? 네 놈은 얼마냐?”
“나? 겁나 비싼데.”
“고작 하룻밤에 엄청 튕기네. 좋게 돈을 준다고 할 때 좋게 좋게 넘기자고. 저 곱상한 귀족 나리보다는 이 몸이 더 좋을 걸?”
키탄이 묵직한 사타구니를 훑으며 말했다.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변하자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이 뱀이 기어가는 것 마냥 징그럽다. 뒤늦게 산적이 한 말이 뭔지 깨달은 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날 남창으로 보았단 말이야? 이 자식이?’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것도 모르고 키탄은 마냥 떠들어댔다.
“차 대륙인을 예전부터 맛보고 싶었지.”
“어이, 산적! 내가 유랑예인… 남창이라고?”
“이런 공개된 곳에서 옷을 벗고 살랑살랑 나 잡아 잡수셔. 하는 네 놈이 아니면 누가 남창이야. 저놈이냐?”
키가 땅딸막한 40대 중반의 사내를 가리키며 키탄이 낄낄 웃었다. 술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입을 뺨에게 가져다 대려고해서, 윤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키탄이 휘청거렸다. 한 편의 촌극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이들이 낄낄 웃었다. 키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잘해줬더니 이런 버릇없는 년이!”
“난 놈이거든? 눈도 삐었어?”
키탄이 윤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것을 숙여서 피한 윤이 그를 돌려찼다. 퍽! 길게 쭉 뻗은 다리가 키탄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가죽 북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키탄이 나가떨어졌다. 엄청난 힘이었다. 시원시원한 발차기에 환호한 여관 직원은 재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콰당탕!
벽에 걸려있던 장식물들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평범한 체구의 청년에게 차인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키탄이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은 흉흉한 살기를 뗬다. 스릉, 칼을 뽑아들었다.
“이 년이! 서방님을 감히!”
“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니?”
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만 상황을 지켜보던 아스탄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윤이 날카롭게 말했다.
“아스! 끼어들지 마! 이건 내 일이야!”
아스탄이 나서게 된다면, 저 산적은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죽지 않더라도, 죽는 게 나은 꼴이 될지 모른다.
“망할 년! 질질 짤며 후회하지나 마라!”
키탄이 대검을 붕붕 휘둘렀다. 여관 안에서 검을 휘두르는 민폐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지배인은 심장을 움켜쥐며 더 빠르게 방을 준비했어야한다고 후회했다.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이 새꺄.”
윤은 목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발끝으로 툭 찼다. 갑자기 방향이 틀어지자, 키탄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윤은 남자의 사타구니를 향해 있는 힘껏 무릎을 차올렸다.
키탄이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는 중심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입에 거품을 물고 바들바들 떨었다.
“으, 터졌어. 기분 나빠.”
윤이 발끝을 제 반대쪽 다리에 거칠게 비볐다.
“쨉도 안되는 게 어딜 덤벼.”
윤은 자신을 싸맨 옷의 매듭을 풀어서 로브처럼 걸쳤다. 주점 내부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연한 얼굴로 키탄과 윤을 번갈아 보았다. 충분히 자유로운 몸으로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그리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화사한 생김새와 달리 단호한 말투, 그리고 잔혹한 손속까지. 알맹이가 겉모습을 완벽하게 배신했다. 윤에게 군침을 흘리던 용병은 저도 모르게 중요부위를 감쌌다.
“방은 언제 준비되는 거야?”
“지, 지금 올라가시면 됩니다.”
가슴께를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지배인을 대신해, 여관의 베테랑 미나가 재
빠르게 나섰다. 그녀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어린 소녀에게 화낼 생각은 없어서 윤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부탁할게.”
미나는 여관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특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옌센에서 영주성을 제외하면 미나가 일하는 여관이 가장 고층 건물이다. 윤이 방을 돌아보며 “오.” 하고 짧게 감탄했다. 어린 소년처럼 천진한 태도에 미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망이 탁 트인 창가 밑으로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고, 욕실도 따로 딸려있다. 다만 배관이 설치되어있어 자유롭게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욕탕을 채우기 위해 무거운 물을 짊어지고 4층을 왕복했을 여관 직원이 불쌍하단 생각을 했다.
“물을 다 쓰면 어떡해? 다시 길어달라고 부탁하면 되는거야?”
“그, 그러셔도 되고요. 지하에 대욕장도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셔도 괜찮아요.”
미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곳은 사용할 일 없다. 직원을 부르도록 하지. 돈을 얼마든지 더 내도 상관없으니.”
짙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딱 잘랐다. 저 남자는 귀족인 게 틀림없다.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봐온 미나였지만, 저처럼 고귀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는 없었다.
‘귀족으로 보이는데 왜 영주성에 머물지 않는 걸까.’
미나는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조심스레 시선을 빗겨서 아스탄을 쳐다보았다.
“그, 그렇습니까. 저는 물러가 봐도 될까요? 혹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이 줄을 잡아당기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미나는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 침묵이 흘렀다. 아스탄은 윤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오르는 것처럼 뜨겁진 않지만, 미지근한 미열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얼른 젖은 옷을 벗고 씻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먼저 씻도록 해.”
“아니, 같이 씻자.”
짐을 풀 던 아스탄이 손을 멈추었다. 진심이냐는 듯 붉은 눈으로 쳐다본다. 윤은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진심인가?”
“……뭐, 번갈아서 씻으면 여관 직원도 고생을 할 테고.”
윤이 우물우물 말했다.
“후회해도 모른다.”
아스탄이 위험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을 뻗어 윤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가볍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엔 뺨과 입술에 간지럽게 떨어지던 입맞춤이 점점 농밀해졌다. 혀를 강하게 얽었다.
“자, 잠깐. 여긴 여관이라고.”
윤이 가슴팍을 밀쳤지만 조금도 밀려나지 않는다. 돌처럼 단단한 근육 아래 숨은 괴력이 대단했다. 그의 정체를 모르고 대련하던 시절에도 느낀 거였지만, 신체적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이런 때 특히나 절감하게 된다. 초월자라 할지라도 신체적 조건은 타고난 부분을 어찌할 수 없다. 게다가 아스탄 역시 소드 마스터 아닌가.
“치사해.”
잠시 입술이 떨어진 순간 윤이 우물거리는 말에 아스탄이 나직하게 웃었다.
이제 그들의 여정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용의 계곡에 가서 황룡을 만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 예상되었다. 우버 산맥을 가로지르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가리온이 심술을 부리지만 않으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단 뜻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윤 역시 목을 끌어안으며 입맞춤에 응했다. 손짓 한 번에 바지가 벗겨졌다. 두 사람은 몸을 겹친 채 욕실로 향했다.
순간,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두 사람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캥!
짐 속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온 새끼 여우가 활짝 웃었다.
“목도리?”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물은 맞는 건지, 이제껏 기척을 없애고 숨어있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제르센에게 분명 잘 감시하라고 일렀건만.”
아스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절묘한 순간마다 방해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윤은 놓아줄 생각인 듯 했지만, 반드시 목도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는 이를 갈았다.
쫑쫑 달려온 목도리가 저도 데려가 달라는 듯 윤의 발등에 제 앞발을 얹었다.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한다. 성장하면서 두 개로 갈라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자랐다고 해봤자 사람 손바닥 위에도 올라가던 크기에서, 사람 머리만 하게 자란 정도라 작은 인형 같았다.
“건전하게 씻으라는 신의 계시인가봐.”
“……빌어먹을.”
아스탄이 욕설을 짓씹었다.
============================ 작품 후기 ============================
튜란토트님, 류웰님, 129g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아스탄에게 혼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 키탄....
키탄의 뜻은 키(가)탄(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