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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헌터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나이프를 던졌다 받으며 시간을 죽였다. 안가의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최근에 사람을 본 게 언제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벽에서 이상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던 게 마지막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황제가 실각했으니, 이주가 넘은 것만은 확실했다.
찾아오는 이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직함만 황태자이지, 황제나 다름없는 남자를 거스르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생각지 않았다. 황제가 이렇게 빨리 몰락할거라 예상하진 않았지만, 황태자로 갈아탄 건 정말 신의 한수였다.
‘그나저나 보수는 언제 준다는 거야?’
허공으로 나이프를 던지는 헌터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심심한 건 참을 수 있지만, 대가를 받지 못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의뢰가 중간에 끝났다 하더라도 착수를 하면 돈을 받아야하는 거였다.
“헌터, 오랜만이야.”
“몬스터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반가운 마음은 감춘 채 헌터가 이죽거림렸다. 손장난을 하고 있던 나이프는 벨트 뒤에 꽂아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청년의 뒤편으로,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서늘함에 헌터는 움찔했다.
‘겨우 이정도 말에 내 머리와 목을 분리시키는 건 아니겠지?’
헌터는 슬그머니 제 목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뭐야? 내가 몬스터라는 거냐?”
“그거보다 훨씬 무서운, 아니 대단한 존재지… 요.”
그란디아 대륙에서 현존하는 소드 마스터는 단 셋에 불과했다. 십 년 동안 초월자의 숫자는 늘 다섯이다. 그 중 소드 마스터의 자리에 눈앞의 청년이 추가되며 여섯이 되었다. 앳된 청년이 위대한 여섯 중 일익이라니. 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요?”
“그렇지 않아도 빚을 갚으러 왔어.”
윤의 말에 돈주머니를 꺼낸 건 아스탄이다. 그는 금화가 잔뜩 든 돈주머니를 헌터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헌터가 묵직한 감각에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은화를 넣었을 리 없고, 금화가 이정도 무게라면 제도에 위치한 저택을 몇 채 살 수 있다. 붉은 매 단의 재건도 어렵지 않다.
“흠, 헌터. 아스가 네게 할 말이 있대.”
황태자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 남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 그러나 염색만으로 그에게서 풍겨오는 고귀한 오만함을 숨길 순 없었다. 보석에 흙을 묻혀도 반짝임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황태자는 무척 눈에 띄는 남자였다.
“헌터.”
“예, 예.”
헌터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쪽 무릎은 세워 앉았다.
“네게 명하겠다. 센트리움의, 아니 그란디아의 암흑가를 장악하라.”
“……예?”
헌터가 눈을 끔뻑거렸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지. 어둠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니 네게 일임하지.”
헌터는 온몸에 전율이 돋음을 느꼈다. 황태자의 뜻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깨달았다. 그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생각이다. 방치되었던 그란디아의 뒷골목마저! 단순히 암흑가의 잡배가 아닌 머리가 될 수 있다. 솟구치는 흥분에 머리가 핑 돌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크게 뛰었다.
“헌터, 잘 생각해. 받아들이면 돌이킬 수 없어.”
윤이 말했다. 아스탄의 제안은 분명 유혹적이다. 그러나 평생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한다. 그건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빛으로 나올 수 없단 뜻이었다. 헌터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줘서 고맙수. 그런데 말이요. 난 어차피 뒷골목 인생이라서 여길 벗어나는 게 상상이 안 돼. 여기서 살다가 죽는 게 맞아. 그럴 거라면 크게 되는 게 낫지.”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헌터의 대답에 윤은 쓰게 웃었다.
“후회해도 내가 후회하는 거니, 그쪽은 걱정 마쇼. 어쨌든 고맙긴 하네. 날 걱정해준 사람은 그짝이 처음이거든.”
헌터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윤의 충고가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날 때부터 혼자였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했다. 부하는 모두 호시탐탐 제 자리를 노리는 적들이었다. 빈말로라도 그 미래를 염려해준 사람은 없었다.
황태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별 다른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다. 헌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윤이 저렇게 말한 이상, 자신이 거절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이다. 슬슬 이 둘의 역학관계를 알아차렸다. 검공의 후예에게 황태자는 터무니없이 약했다. 번개 같은 깨달음이었다. 무릎을 마구 치며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헌터, 묻겠다.”
“예. 전하.”
“본공을 따르겠느냐.”
“붉은매 단엔 심장의 규율이 있습죠. 그쪽이 보기엔 하잘 것 없는 인생이라도, 반드시 지킬 것은 존재하오. 그때 심장에 걸고 약속하지. 그러니 내게 날개를 달아줘요. 그림자 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날아오를 테니.”
“좋다. 그대를 섀도우 워커로 삼지. 한 번 날아보도록 해.”
성제(聖帝) 아스타시온의 시기, 섀도우 워커라는 조직이 그란디아의 암흑가에 존재하였다. 은밀하고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어둠 속을 걷는 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군과 다름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율 아래 조직을 운영하였다.
거침없이 불린 세력을 바탕으로 물밑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권다툼을 차지했으며, 암흑가를 지배했다. 황제의 어용조직이라는 소문도 돌았으나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사라진 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
산세가 드높고 험한 우버 산맥이지만, 보카로 왕국과의 교류를 위해 길을 다져놓은 곳이 있다. 바로 옌센이다.
옌센 자작령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언제나 이방인들로 북적거렸다. 방문객은 인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우버 산맥에 숨어사는 조인(鳥人)과 요정 등, 다양한 이종족이 생필품을 사기 위해 얀센에 방문했다. 그렇기에 얀센의 사람들은 어지간한 일로 놀라지 않는 담력을 지녔다.
옌센에서 가장 큰 여관인 요정의 숲에서 일하는 미나는 식탁을 걸레질하다가 세찬 빗소리에 창가를 보았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다싶더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빗방울이 쏟아졌다.
예상치 못한 늦겨울 폭우에 모험가, 상단의 직원, 용병,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여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비에 젖은 생쥐처럼 물을 뚝뚝 흘렸다. 나무로 만든 현관은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여기 방을 좀 준비해주오!”
“마른 수건을 달라고!”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손님의 습격에 여관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테이블과 의자를 벽으로 치워서 넓게 공간을 만들었다. 목욕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지하에서 따뜻한 물을 길어오느라 정신없었다. 미나 또한 바쁘게 마실 것들을 나르느라 꽁지에 불이 붙은 것 마냥 뛰어다녔다.
“저런 성질 급한 인간들. 적당히 기다리면 어디 덧나?”
“내버려둬. 아으, 춥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용병들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따뜻한 술을 마시며 몸을 덥혔다. 체면을 차린다 하는 이들은 의자에 앉아서 방이 준비되길 기다렸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여관의 일층을 가득 메웠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들어선 건, 엄청난 일거리에 미나를 비롯한 직원들의 눈이 돌아가다 못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이곳에 묵을 방이 있는가.”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악다구니를 써대던 목소리가 멎었다. 모두들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일행은 모두 둘이었다. 차 대륙인으로 보이는 앳된 청년과 키가 큰 남자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흑발로도 보이는 남자는 요정을 심심치 않게 본 미나마저도 뺨을 붉힐 정도의 미남이었다. 수도에서 온 귀족처럼 그가 구사하는 대륙공용어는 흠결하나 없이 우아했다.
“방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아, 아닙니다! 얼른 방을 마련해드리지요!”
여관의 지배인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요정의 뿔은 총 사층 여관이었다. 일층은 식당 겸 주점으로 썼으며, 이층부터 객실이 있었다. 잠시 비를 피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방은 충분하다.
지배인은 다른 일을 모두 젖혀둔 채 마른 수건을 가져와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일단 1층에서 기다리시면 방과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남자가 은화를 내밀었다. 등급으로 따지면 최고급 손님에 지배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사람들을 헤치고 난로로 다가갔다. 강약약강의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자리를 비켜 그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문 이들은 두 남자들을 관찰했다.
“센트리움에서는 구름 하나 없이 쨍한 날씨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우장이라도 준비할걸 그랬어.”
차 대륙인 청년이 투덜거렸다. 마치 방금 전까지는 제도에서 머물렀던 것 말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센트리움에서 옌센까지는 말을 달려도 이틀의 거리다. 이 근방은 며칠 전부터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흐린 하늘을 자랑했다. 미나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가 들고 있던 짐을 청년의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행동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방이 준비 되는대로 올라가면 먼저 씻도록 해.”
“응, 엣취!”
청년이 연달아 재채기를 했다. 간질간질한 코밑을 문질렀다. 싸늘한 겨울비를 맞으며 한 시간 가까이 말을 달렸더니 감기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스탄이 가늘게 미간을 좁혔다. 초월자는 어지간한 병마에서 해방된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윤과 달리 아스탄은 멀쩡했다. 물론 추위를 느끼긴 하였으나 견딜 수 있는 정도였다. 참을성이 부족한 건지, 정말 추위를 느끼는 건지. 이제껏 윤을 지켜봐온 결과 인내심 부족은 아닐 것이다. 윤은 너무 참아서 문제였다.
“방은 언제 준비되는 거래? 난로 앞에 앉아 있어도 옷이 젖어있으니 쓸모가 없어.”
청년이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물에 잔뜩 젖은 망토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튜닉도 벗어던진 청년은 얇은 슈미즈 차림이 되었다. 바지까지 벗으려드는 걸 아스탄이 손을 들어 말렸다.
“잠깐!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내가 여자도 아니고 뭐 어때. 보여줄 거도 없는 걸.”
청년이 팔을 활짝 벌렸다. 물에 젖어 투명해진 얇은 천 너머로 보이는 살결은 진주 같다. 모두 벗은 것보다 한 겹의 옷을 남겨둔 것이 더욱 은밀했다. 여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남자라고 하기엔 뼈대가 가느다란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이 작게 헛기침했다.
“아니, 기분 나쁜 눈길들이 너무 많아. 어서 옷을 입도록 해.”
“젖은 옷 위에 입을 수도 없잖아.”
터질 듯 퍼져 나오는 살기에 사람들이 뱀 앞에 선 쥐처럼 몸을 굳혔다. 살기의 근원은 푸른 머리칼의 남자였다. 그는 역력히 불쾌한 표정으로 식당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운 사람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짐에서 겉옷을 꺼낸 남자가 청년의 몸에 옷을 둘둘 감았다.
“아스! 옷이 더러워 진다고.”
“상관없다.”
몸부림치자 아스탄은 아예 소매로 윤의 상체를 묶어버렸다. 윤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마른 옷이 점점 젖어가는 건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이쪽의 눈치만 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눈다. 금발이 너무 띄어서 짙은 색으로 염색했는데, 그것이 아스탄을 더 차갑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아스탄이 지배인에게 손짓했다.
“방은 언제 준비되는 거지?”
“시, 십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준비해라. 당장.”
아스탄은 품에서 은화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지배인이 은화를 받아들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봐, 유랑예인 같은데 너 혼자 독점하는 건 치사하지 않아?”
옌센을 거점으로 머무는 용병 중 손버릇이 난폭하기로 유명한 키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에선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평소였다면 저지르지 않았을 일이지만, 술기운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넌 뭐냐.”
“이 몸은 번개의 키탄이다! 형씨의 잘생긴 얼굴이 망가지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같이 나눠 쓰자고.”
용병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귀족과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데, 너무 위험했다. 자칫하다간 연좌제로 다 같이 지하 감옥신세를 질 것 같았다. 그러나 키탄의 무시무시한 뒤끝을 아는 이들은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뭐야, 지금 나보고 말한 거야?”
윤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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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