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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78화 (7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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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비 오기 전의 공기는 어딘가 무겁고 축축하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은 마치 윤의 기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석양이 회색 하늘에 섞여 탁하게 빛났다. 늦은 봄, 정원엔 꽃이 만개하였고 꽃향기가 부드럽게 코를 간질였지만 기분은 나아질 줄 몰랐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보좌관 아론의 감시도 뜸해진 지라 윤은 날쌔게 집무실을 도망쳐서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오늘, 월스턴은 안즈마네에게 청혼을 했다. 금발의 잘생긴 남자가 다리를 달달 떨다가 손톱을 깨물다가 방안을 배회하는 등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율리히는 낄낄 웃으며 놀렸고, 윤은 그저 웃는 얼굴로 응원했다. 그리고 안즈마네는 꽃처럼 향기롭게 웃으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월스턴과 안즈마네는 부부가 되고, 율리히는 싫다고 하지만 언젠가 엘프족 장로가 될 것이다. 이 세계로 온 지 벌써 십 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곳에 뿌리내리지도 못하고,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도는 자신이 부평초 같다 생각되었다.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걸었는데, 어느새 안즈마네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 와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안즈마네가 맞은편에 서 있다. 산책 중이었던 듯, 붉은 꽃 한 송이를 꺾어들어 그 향기를 맡고 있었다. 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날듯이 달려와 윤의 앞에 섰다.

“축하해, 앤지. 월이라면 분명 네가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친구이자, 여동생이자, 가족.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 여전하다. 첫사랑이었으니까. 이제는 그 사랑만큼이나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마음이 커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데 웃으면서 축하해줄 수 있을 만큼.

‘게다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 언젠간 돌아가야 해.’

그러니까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윤은 마음을 천천히 도려냈다. 저며진 마음이 피를 뚝뚝 흘렸다.

“있지. 윤.”

드레스 자락을 곱게 정리하는 그녀의 손가락엔 보지 못한 반지가 존재했다. 안즈마네가 붉은 눈을 들어 윤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슬프고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미안해.”

안즈마네가 입술을 떨며 속삭였다.

윤이 고개를 저었다. 안즈마네는 꺾었던 꽃을 가져와 윤의 귓가에 끼웠다. 주술을 건 듯 귓가와 관자놀이가 뜨거워진다.

“윤. 네가 언제나 웃을 수 있길 바라고 있어.”

“나 역시 그래. 월스턴, 율리히, 그리고 너. 이 세계에서 무엇보다 내 소중한 친구들인 걸.”

“아냐. 누구보다도 내겐 윤이 가장 특별해. 내 친구, 내 오빠, 내 사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행복하길 바라.”

“그런 건 월에게 맹세하는 거야.”

안즈마네는 붉은 눈에 어룽어룽 눈물이 맺힌 얼굴로 웃었다. 그녀가 다급히 윤의 손을 붙잡아왔다.

“국혼이 끝나고 나면 율리히와 함께 엘프의 숲으로 간다고 했지? 지혜로운 장로가 뭔가를 알아냈다고 들었어. ……만약 돌아가더라도 우릴 잊으면 안 돼.”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윤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어쩐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슬프고도 그리운 꿈이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애정이 서려있다. 그 손은 무척 커서, 좍 펼치면 자신의 얼굴도 다 감쌀 수 있을 것 같이 든든했다. 마치 어린 짐승을 쓰다듬을 때처럼 턱을 간질일 때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윤은 남자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그에게선 새벽의 이슥한 풀냄새와 바람 냄새가 묻어났다. 밖에서 한참이고 있었던 것처럼 차가운 기운도 있었지만, 어쩐지 포근하다.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 넘긴 후 손이 떨어져 나갈 때는 아쉽단 느낌까지 들었다.

졸린 눈을 반쯤 들어 올리자 머리 맡 의자에 앉은 아스탄이 서류를 넘겨보고 있다. 벽난로의 어두운 불빛에 따라 남자의 단정한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새끼 여우는 윤의 머리맡에서 몸을 말고 잠들었고, 주홍색으로 타오르는 벽난로가 아늑했다. 평화롭고 고요한 밤이었다. 안락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윤은 몸을 둥글게 말고 그 기분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듯 누렸다.

‘많이 바쁜가.’

황제의 대리청정을 시작한지 약 이주. 아스탄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귀족들에게 새로이 충성 맹세를 받아내고, 황제가 광증에 미뤄두었던 엉망진창이 된 국정도 재정비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것 같았다.

아스탄은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피로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아마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나가떨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스탄이 소드 마스터였다니,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그 재능이 놀라웠다.

윤이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십대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경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윤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초월자가 되었다. 십대는 아마 아스탄이 최초일 것이다. 용의 계곡으로 갈 때도 훨씬 든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파행으로 운영된 국정이 마무리가 되고 나면 아스탄과 함께 황룡의 인장을 받기 위해서 용의 계곡으로 갈 요량이다. 황룡 가리온에게서 광증의 비밀도 알아낼 참이었다. 이제껏 가리온이 침묵을 택했다지만 사람을 초대했으니, 그 정도는 주인 된 도리로서 답해 주어야하지 않겠는가.

‘…광증이라. 레나드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냐.’

망령처럼 황가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저주에 윤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동시에 숨겨진 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황가의 인장이 없는 사람에게만 발동하던 독 역시 주술의 일종이었던 건지, 방 밖으로 빠져나가자 아주 느린 속으로 배출되어서 사라졌다. 황제는 끝까지 거짓말쟁이에 한심한 작자였다.

‘많이 실망했을까.’

아스탄은 더 이상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레나드를 사칭했고, 그 때문에 윤이 흔들렸다는 걸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황제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후회하는 지금도 다시 그 일을 겪는다면 제대로된 사고를 하지 못할 것이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스탄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윤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어쩐지 뺨으로 열이 몰리는 것 같다.

“윤, 그만 눈을 뜨는 게 어때?”

“…눈치 챘어?”

“숨소리가 달라졌으니까.”

윤이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잠을 깨운 건가?”

“아니. 괜찮아.”

아스탄이 서류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겨울 새벽녘의 찬 기운은 모두 날아갔다. 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가 걸친 튜닉의 깃을 잡아당겼다. 아스탄의 허리가 숙여지고, 부드럽게 입술이 부딪혔다.

“클레먼스는 어땠나?”

“나쁘지 않았어.”

아스탄만큼은 아니지만, 윤 역시 변경백의 감투를 쓴 탓에 그간 바빴다. 영주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클레먼스에 일주일간 머물다가 황성에 막 도착한 것이 어젯밤이다.

“솔라가 없어졌으니 새로운 시종을 보내주도록 하지.”

“괜찮아.”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아.”

윤은 솔라에게 클레먼스의 변경백 대리 중 영주성과 관련된 일을 맡겨두고 돌아왔다. 처음엔 시종으로 남아있겠다며 거절했지만, 강제로 그 자리에 눌러 앉혔다.

입으로는 거절하지만 집사장의 명패를 쓸어보는 솔라의 눈길엔 들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변경백의 집사장은 최소 남작 급 귀족이 맡게 된다. 클레먼스 변경백의 집사장은 래어달 남작이다. 래어달 남작, 솔라 아이그너의 탄생이다. 변경백이 자리를 비웠을 때 집사장의 권한은 꽤 커서, 유사시엔 변경백 대리까지 가능하였다. 녀석의 성격으로 보아 남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쪽이 더 잘 어울렸다.

“그나저나, 아스. 잠은 좀 잤어?”

아스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거의 자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거짓말.”

“네가 없었으니까.”

담백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대답에 뺨이 확 달아올라서 뜨거웠다. 윤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야.”

아스탄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아참. 이레인! 이레인을 불러와야하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

아스탄이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한동안 이레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니, 정국이 안정되자마자 녀석을 챙기는 모습에 심사가 불편해졌다. 아스탄은 이레인을 결코 제도로 불러오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이레인이 제도에 오게 되면, 윤이 그를 챙기느라 바쁠 터였다. 두 사람이 오붓하게 붙어 다니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이 이레인을 챙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초상화 속 레나디온의 어린 시절과 이레인은 많이 닮아 있었고, 홀로 남아 위태로운 상황은 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절대 안 될 일이지.’

아스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녀석을 노스트라드 공작으로 삼을 생각이다.”

“이레인은 아직 어려!”

“나 역시 열다섯에 그 자리에 올랐다. 녀석의 반쪽짜리 신분을 생각하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윤은 말끝을 흐렸다. 아스탄의 말에 딱히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노스트라드는 야만족 로아크의 침입으로 인해 산발적인 전투도 자주 일어나는 지역으로 이레인에게 너무 버겁고 위험한 짐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윤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스탄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갈 수 없으니 누구든 공작 대행이나 공작이 되어 그 자리로 가야해. 이레인을 그곳으로 보내는 게 싫다면, 네가 본디 자리를 되찾게 도와줄까?”

“아니. 그건 좀….”

윤의 대답에 아스탄이 쿡쿡 웃었다. 아스탄의 본심은 어떻게 해서든 이레인과 윤을 떼놓기 위해 구색을 맞추는 거였지만, 한껏 달콤한 말로 설득했다.

“야만족의 침략이라면 롭을 장군으로 삼을 테니 너무 걱정 말도록 해. 다른 보좌관들도 바리바리 붙여줄 터이니 실무에서도 문제없을 거다. 맥카터 교수 역시 떠나지 않고 이레인을 가르친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노스트라드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그, 그럴까?”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아스탄이 화사하게 웃었다. 흑심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윤은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이레인에겐 결코 나쁜 기회가 아니었다. 윤이 아니었다면 결코 쥐지 못할 행운이다.

“게다가 황태자가 노스트라드 공작의 자리를 겸임하는 걸 잊었나? 녀석에게 제국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아스?”

윤이 눈을 크게 떴다.

“넌 이레인을 돕겠다고 했었지? 그럼 나는 널 돕겠다. 이레인에게 결코 손해가 아닐 거야.”

그간 아스탄을 멀리하던 귀족들은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서 젊고 잘생긴 황제 대행에게 수많은 여식들을 들이밀었지만, 아스탄은 그들을 취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귀족 영애를 비로 들임으로써 권력을 보강할 생각도 없었다.

“그 녀석도 욕심이 있다면, 제게 주어진 걸 뺏기지 않는 머리쯤은 있겠지.”

“잠깐! 그 말은…… 이레인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거야?”

윤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의 나직나직한 대화에 머리맡에 잠들어있던 목도리의 귀가 쫑긋했다. 하아웅. 하고 길게 하품을 한 뒤 앞발로 제 귓전을 살살 긁은 후 다시 잠이 들었다.

아스탄이 혀를 쯧 차며 부러 화제를 돌렸다.

“이 녀석은 또 여기서 자는 건가. 버릇이 나빠진다 하지 않았던가.”

“아스!”

아스탄은 단호한 손길로 목도리를 들어 올린 후 침대의 발치에 놓인, 목도리 전용 침상에 놓아준 후 돌아왔다. 아스탄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렇다면 너를 두고 다른 여인을 취하라는 거냐?”

아스탄의 얼굴에 노한 기색이 드러났다. 윤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속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아스탄은 스무 살이었다. 후사를 포기하기엔 지나치게 젊었다. 게다가 대제국 그란디아의 황제가 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후계를 포기한다고 말해온다. 너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제껏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아스탄이 처음이다. 가슴 속의 박동이 빨라졌다.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윤.”

아스탄은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주박을 걸었다. 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를 모르는 척, 아스탄은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시야가 컴컴해졌다.

“자, 어서 자도록 해.”

“……아니, 같이 자자. 재워줄게.”

윤은 아스탄을 잡아끌었다. 아스탄은 웃으며 강하게 혀를 얽으며 키스해왔다.

“내게 자자고 말하는 건, 단순히 잔다는 뜻이 아닐텐데?”

“알고 있어.”

뜨거운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 작품 후기 ============================

람밍님, luckyhoi님, 류웰님, rbrc님, 아레스911님께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연재가 좀 불규칙해질 거 같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함께 달릴테니 기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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