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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77화 (7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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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역천

“뭐?”

“벗으라고 했다.”

황제가 잔악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덜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함량 미달일 줄 상상도 못했다.

아들이 묶여있는데, 그 앞에서 연인의 옷을 벗기는 건 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나올 수 있는 발상이란 말인가. 윤의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 표정에 황제가 낄낄 웃었다.

“너를 갖고 싶지 않냐, 고 물은 건 본인이지 않나.”

“맞아.”

윤은 자신이 한 말까진 부정할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촉하듯 황제가 검을 들어 아스탄의 뺨을 긁었다. 붉은 피가 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선 그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나면 이후의 이야기를 하지.”

노골적인 음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새끼 여우는 털을 바짝 세운 채 캬웅캬웅 울었다. 자꾸 옆에서 거추장스럽게 구는 짐승의 존재에 황제가 귀찮은 듯 손을 들어서 쳐냈다. 여우는 커다란 손에 맞고 튕겨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재빠르게 발딱 일어나서 황제를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거친 손속에 윤이 움찔했다.

미물이라 생각했던 조그만 짐승도 저리 구는데, 황제란 작자가 이리도 한심한 작자라니. 하루라도 빨리 아스탄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는 게 그란디아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옳다. 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황제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시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우선, 해독약을 보여줘.”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나? 짐을 제압하고 약을 뺏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그쪽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 난 지는 게임을 하는 취미는 없어.”

“지는 내기라… 아스타시온이 죽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있어도 좋아.”

황제가 쉽게 넘어오지 않자 윤은 잇 사이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찌되었든 불리한 건 이쪽이다.

황제를 제압하는 건 쉽지만 아스탄의 목숨을 구하는 건 어렵다. 더군다나 한 번 잃으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허망하게 질 수 있는 지, 윤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독이 해독될 방도가 있다는 걸, 네 이름을 걸고 맹세해. 마녀라 했으니 네 심장을 걸어.”

“좋다. 심장을 걸고, 이 독의 해독 방법이 있음을 맹세하지. 거짓으로도 알려주지 않겠다. 단! 그걸 알려주는 건 그대가 짐의 말을 따른 이후다.”

황제는 흔쾌히 맹세했다.

“좋아. 옷을 벗도록 하겠어.”

“착하군.”

윤은 눈을 느리게 떴다. 검은 눈동자에 한줄기 결심이 서렸다. 목까지 단단하게 죄고 있던 튜닉의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튜닉이 바닥에 떨어졌다. 얇은 슈미즈 아래 늘씬한 육체가 비쳤다.

의자를 끌고 온 황제는 느긋하게 앉아 감상하듯 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핥는 것처럼 훑어보았다. 수치심에 뺨이 붉어졌다.

윤은 최대한 이 상황을 늦추고 싶었다. 그렇기에 옷을 벗는 손은 무척 느렸다. 단추를 풀어내려가던 손가락이 멈추자 황제가 재촉했다.

“얼른 벗도록 해.”

“시끄러워.”

황제의 붉은 눈에 음울한 욕구가 어렸다. 황제의 성기는 완전히 발기해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그 끄트머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아스탄의 욕망을 느꼈을 때와 달리, 황제에게선 생리적 혐오감 그 이상도, 이하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게 뭐야.”

“그대 답군.”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황제의 손이 다가왔다. 아스탄에게서 완전히 경계를 지운 채 윤에게 닿은 그 순간, 윤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일어나, 아스!”

“아버지, 아들의 애인을 탐하려는 건 무척 치졸하고 역겨운 짓입니다.”

어느새 자유의 몸이 된 아스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제를 제압했다. 아스탄을 묶고 있던 밧줄을 모두 물어뜯은 목도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윤을 향해 웃어보였다.

트로아 산맥의 산주(山主)는 새끼 여우의 어미, 은색 구미호였다. 그러나 백호가 구미호를 인간들이 설치한 함정으로 끌어들여 죽이고, 운 좋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끼 여우마저 해치려던 걸 윤이 구해주고 거두었다. 아스탄을 위해 사냥했고 너무 어린 짐승이라 좀 더 자랄 때까지 놔두겠다는 이야기의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다. 언젠가는 트로아 산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새끼 여우, 일명 목도리는 영물답게 머리도 똑똑해서 독에서 깨어난 아스탄이 손짓하자 밧줄을 끊어내었다. 지금도 칭찬해달라는 듯이 촐랑촐랑 꼬리를 흔들었다.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힌 황제는 이 상황이 어찌되었는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스탄을 올려다보았다. 아스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고, 입술도 희게 질려있었으나 그 눈빛만은 차가운 살기로 형형했다.

“어떻게?”

황제가 망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윤은 품에 있던 단검을 아스탄에게 던졌다. 마치 실로 연결된 것처럼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아스탄의 손에 안착했다.

아스탄은 황제의 목에 칼날을 들이민 후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황금색 찬란한 검기가 타오르더니 실체화된 검의 모습을 취했다.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소드 마스터였나?”

황제는 신음했다.

“황룡의 인장을 받진 않았으나, 저 역시 초월자이니까요. 이정도 독은 견딜 수 있습니다. 이 모두 위대한 폐하의 은공 덕분입니다. 수시로 습격 받지 않았더라면 이런 경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였겠지요.”

아스탄이 웃으며 대꾸했다. 장시간 독에 노출된 탓에 잠시 정신을 잃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윤이 상황을 판단한 후 마나를 밀어 넣어 그를 깨웠다.

수혈은 사람을 잠재우기도 했지만, 적당한 자극으로 기절에서 깨어나게 만들 수 있었다. 황제의 재촉에도 느리게 옷을 벗은 건 모두 아스탄이 깨기를 기다리기 위해 시선을 끄는 용도였다.

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쯤 풀어졌던 슈미즈의 단추를 단단히 채워나갔다. 튜닉을 집어 들어 먼지를 털어낸 후 다시 걸쳤다.

“해독제는 어디 있습니까? 이제 당신의 목숨을 가지고 내기를 시작하지요.”

“짐을 죽일 셈이냐? 네 아비를?”

아스탄은 그저 검을 황제의 목에 바짝 갖다 대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한줄기 혈흔이 생겨나고, 피가 방울방울 살갗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수신 호위들이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하지만 황제를 인질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공격을 해오지 못했다.

“네가 감히….”

그란디아라는 대제국의 황제가 아들에게 형편없는 꼴로 제압당해 바닥을 구르고 있다. 황제는 빠득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이마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

자신의 아들은 냉랭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깔보거나 자신을 비웃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덜 불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얕보는 감정의 편린하나 찾을 수 없다. 그저 밀렸던 일을 처리한다는 후련함만이 깃들어있다.

제 아들의 붉은 눈을 후벼 파내고 싶다는 잔혹한 충동도 잠시, 황제가 돌연 표정을 바꾸어 가엽고 불쌍한 얼굴을 하며 윤에게 호소했다.

“짐을 이대로 죽일 건가?”

“남을 죽일 때는 언젠가 내 목숨을 빼앗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가?”

황제는 간절하게 쳐다보았으나, 윤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윤. 이대로 저를 죽일 겁니까?”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윤이 눈을 번쩍 들어올렸다. 말투가 어딘가 낯익었다. …설마. 크게 떠진 시선이 황제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가여운 척 웃었다.

“접니다. 대부.”

“…레나드?”

“예. 당신의 대자 레나드가 접니다.”

윤이 주춤 뒷걸음질 쳤다. 지금 자신의 귀로 들은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황제가 레나드라니? 이제껏 제 자식들을 잔혹하게 죽여 왔고, 아들의 연인을 협박하여 강제로 범하려고 한 자가 자신의 대자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고개까지 도리질치며 부정했다.

아스탄 또한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거짓말의 증거를 찾기 위해 샅샅이 황제를 살폈다.

“거짓말이야! 넌 레나드가 아니야.”

“정녕 거짓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자라면 저와 혼인해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아론은 언제나 꿀 우유를 타주었죠. 아바마마와 어마마는 늘 서로를 사랑했고, 율리히 삼촌은 언제나 자신을 백부라고 부르라고 우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의 유일한 사람. 대부였고요.”

윤이 경련하듯 입술을 떨었다. 최소 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 레나드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실의 나열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엉망진창으로 검게 변하길 반복했다. 갑작스럽게 밝혀진 진실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윤이 비틀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당신이 돌아왔음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너는… 팔라티온이지 않나.”

“동시에 나는 레나디온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은 비틀거리며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짚었다.

“왜 이제야 밝히는 거지?”

“……무서웠으니까요.”

아스탄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정녕 무서웠다는 자가 윤을 강제로 범하려 들었나? 마음 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연인은 속아 넘어가겠지만, 그는 속지 않는다.

“당신이, 현제 레나디온이라고?”

아스탄이 말했다.

“네 조상에게 예를 취하도록 하라.”

황제가 아스탄에게 명령했다. 두 쌍의 붉은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무형의 검날이 황제를 난도질했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헛소리를 나부대는 입술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물렀다. 이윽고 아스탄은 멱살을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실체화시킨 검기를 거두어들인 채 단검을 반대쪽 손에 쥐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가?"

“하지만 내 아버지에게도 무례했던 행동, 조상이라고 공대 받을 생각은 마라. 사기꾼이여.”

아스탄은 황제의 목덜미를 잡아 개처럼 질질 끌고 윤에게 다가왔다. 황제는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레나드라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윤의 흔들리는 기색에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시선은 오로지 윤에게 고정한 채, 마치 구명줄을 붙잡은 것처럼 매달렸다.

“대부, 어서 이 자에게 저를 놓아 달라 해주십시오.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흔들리지마, 윤.”

현실의 삶에 적응한 정해윤이라면 단번에 거짓이라 일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란디아의 윤은 알고 있다. 이곳은 불가사의한 신비가 살아 숨 쉬는 세계. 레나드가 환생을 하였어도, 결코 이상치 않을 곳이다.

레나드가 미웠다. 동시에 아주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은 완전한 형체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 증오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이 모든 단어가 복합되어 처음의 순수한 색이 얼룩덜룩하게 변했다.

“속지마라.”

“하지만….”

“이자는 마녀다. 네 기억을 엿보며 현제의 흉내를 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야. 게다가 월스턴의 일기도 있었듯이, 레나디온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누가 보장하지?”

아스탄은 힘 있는 목소리로 윤을 설득했다. 그 흔들림 없는 어조에 윤은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곤 머릿속을 차갑게 식히려 애썼다. 그러나 황제의 말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직감이 경고음을 마구 울렸다.

“왜 무섭나? 이제 내가 나타난 이상, 대부가 널 버리게 될 거 같아서?”

황제가 빈정거렸다. 아스탄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황제의 뺨을 내려치려다가 화풀이하듯 벽을 후려쳤다. 주먹과 돌 벽이 부딪치며 굉음이 났고, 바스러진 돌조각이 바닥에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새끼 여우는 몸을 웅크린 채 눈치를 보았다.

“아니, 당신은 현제가 아니야.”

아스탄이 단호하게 대꾸한 뒤 덧붙여 말했다.

“그저 현제의 기억을 뒤집어 쓴 인간일 뿐이지.”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게지.”

황제는 낄낄 웃었다.

아스탄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윤을 응시했다.

“이전에 너는 네 친구 율리히를 부정했다. 비슷한 외모, 같은 기억을 지닌 사람이 영혼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렇다면 다시 묻지. 내 아비가 과연 네가 알던 그 사람인가? 네 대자 레나디온이 맞는가?”

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스탄의 표정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면 계속해서 생각해.”

다시 황제를 질질 끌고 기둥으로 다가간 아스탄은 밧줄로 황제를 묶었다.

“아스타시온! 이 아비를 죽일 셈이냐?”

“언제는 당신이 현제 레나디온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벗어날 계책 쯤은 가지고 계실 텐데요.”

황제의 말엔 많은 모순이 있다. 마치 기억만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정녕 현제 레나디온의 환생이었더라면, 이 상황을 충분히 타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대마녀인 동시에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모습은 무언가. 윤의 연민에 매달려 추하게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윤.”

아스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독이 전신에 퍼져 다시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떻게든 황제와 결책을 낸 후 이 방을 빠져나가야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줘.”

밀랍 인형처럼 새하얗게 질린 윤을 가만히 응시했다. 강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잃어버린 채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지친 어깨를 끌어안아서 다정하게 달래주고 싶은 동시에, 그 가느다란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기이한 충동을 느꼈다.

예상했던 바지만, 윤의 안에 레나디온의 지분은 너무도 컸다. 할 수만 있다면,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그 목을 다시 베고 싶었다. 에로메스를 죽이고서도, 북풍의 윈디아의 마음을 얻지 못해 미쳐버린 청룡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죽어버린 사람을 어찌 이겨야한단 말인가.

그것도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자를.

화풀이하듯 기둥을 한 번 더 세게 후려쳤고, 황제가 움찔했다. 덕분에 아스탄은 확신했다. 역시 저자는 현제 레나디온의 환생이 아니다. 그저 사기꾼일 뿐이다.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아무렇게나 닦아낸 후 황제를 응시했다.

앞으로의 계획 때문에 황제에게 상처를 남겨선 안 되기에 고신((拷訊)을 가할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윤에게서 배운 점혈법(點穴法)의 응용으로, 아스탄은 황제를 영원히 잠재울 속셈이었다. 가장 온건한 방법이다. 황제가 점혈의 수법으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황위는 아스탄에게 이어진다.

마녀의 저주도 아니며, 마법도 아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수법을 파악해내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그저 잠들어있을 뿐이니. 주기적으로 수혈을 짚다보면 언젠가 죽게될 것이고, 잡음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어차피 아스탄이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해낼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이제 황제는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었다.

“그래, 아스타시온! 너도 초상화! 초상화를 보았지!”

“보았습니다만.”

아스탄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황제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역력히 드러낸 채 아스탄에게 질문했다.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 거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윤의 초상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냐는 말이다!”

“많은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만, 별 일은 없군요.”

레나디온과 함께 놓인 초상화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는 소감은 윤이 들을 수 있기에 목안으로 삼켰다.

“이럴 리가 없는데.”

황제가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를 두고 보던 아스탄은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 생각하였다. 손을 뻗어 황제의 뒷목을 붙잡고, 수혈에 기를 불어넣었다.

“초상화는….”

황제는 말을 모두 끝마치지 못한 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잠깐, 아스! 아직 황제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했어.”

“……황룡을 찾아가면 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겠나? 저자의 거짓말에 언제까지 휘둘릴 셈이지?”

윤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스탄의 말이 옳았다. 지금 자신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고 있지 못했다.

“나가도록 하지. 이 방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으니.”

“그래.”

윤이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탄은 황제를 끌고 나오며 방을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뒤돌아 윤의 초상화를 보았다. 어린 현제를 끌어안고 있는, 행복해 보이는 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배신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 했음에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마음이란 대체 얼마나 깊어야 가능한 것인가.

‘지지 않는다.’

아스탄의 얼굴이 돌연 일그러졌다. 그는 거칠게 문을 닫았다.

초상화는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며칠 후, 황제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상태로 와병중이며,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단 방이 나붙었다.

정권의 교체였다.

============================ 작품 후기 ============================

2부가 끝이 났습니다! 우아아아! 끊기 애매해서 (나름) 많은 용량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이제 윤의 비밀, 황가의 저주 등등 모든 비밀의 해답이 풀리는 3부입니다.

윤과 아스탄은 오붓하게(??) 신혼 여행으로 용의 계곡으로 떠나겠지요.

얼마 남지 않은 나전보. 끝까지 함께해주셔요!

이름없는바보님, 타이라군님, 무랏님, mdwslove님, 헐롱헐랭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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