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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역천
마법사가 완성한 불덩어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의 구에 윤은 욕설을 짓씹으며 뒤돌아 뛰었다. 자신은 저 불덩어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만 솔라는 아니었다.
“이 바보 자식!”
“제가 바본 걸 이제 아셨습니까?”
창문이 있는 벽에 난 게이트는 흐물거리며 그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솔라가 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윤은 그 손을 뿌리쳤다.
“멍청아. 네 살 궁리나 해.”
윤은 솔라의 목덜미를 잡아서 게이트로 던져넣었다. 그리고 자신은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등을 훑고 지나가자 윤은 재빨리 마나를 모아 등을 보호했다. 덕분에 옷만 그슬렸을 뿐 살갗은 멀쩡했다.
3층 높이에서 떨어져내린 윤은 나무를 붙잡으며 충격을 줄였다.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바닥 위로 몸을 웅크리며 충격을 흡수한 윤이 이정도면 10점 만점에 10점이라며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데, 창문에서 새하얀 털뭉치가 떨어져내렸다. 놀라서 팔을 좍 펼쳐 충격을 흡수하며 받아들었다.
“목도리?!”
새끼 여우는 앙앙 울며 윤의 손바닥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분명 솔라에게 챙기라며 안겨주었는데, 급한 마음에 게이트로 집어던지다가 새끼 여우가 튕겨나간 모양이었다. 다행히 폭파에 휘말리지 않은 듯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그러나 화염이 일으킨 재를 뒤집어 쓴 탓에 새하얀 털이 지저분해졌다. 윤은 미안한 마음에 이마에 입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피로 만드는 건 봐줄게.”
끼잉끼잉.
여우는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이런 눈치없는 주인을 가지게 된 자신이 서러워서였다. 금발 인간이 그리워졌다. 제 서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이를 세워 깨물어보았지만, 강한 인간이라 그런지 아픈 척도 하지 않았다.
새끼 여우를 품에 넣은 윤은 곧장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황성을 돌아다니던 귀족들이 힐끔거리며 윤의 모습을 살피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윤의 옷이 불에 그슬리고, 얼굴도 엉망이었지만 당당한 태도로 시종을 불렀다.
“시종장에게 고해. 클래먼스 변경백, 윤 하이어드가 황제 폐하를 뵈러 왔다고.”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씻을 물과 옷을 준비하도록.”
윤은 부러 거만하게 말했다.
곧장 본성에 있는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된 윤은 욕탕에 몸을 담그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쯤 센트리움에 있는 친 황태자파 귀족들은 모두 합류하여 클레먼스로 떠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군대를 모아 돌아오는데 최소 나흘을 잡았다. 그때까지 아스탄과 건재한 모습을 보이며 버텨야한단 뜻이다.
혼란스럽던 대륙을 평화롭게 만들겠단 꿈을 품고 말을 달리던 시절의 두근거림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윤은 지그시 가슴께를 눌렀다. 아스탄은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내듯 살아가던 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가의 광증이 아스탄에게 찾아온다면 어떡할까 고민도 되었다. 그러나 노스트라드의 주민들을 생각하던 모습은 거짓이 아니다. 광증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던 그라면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새끼 여우는 물위를 이리저리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깨끗해진 은빛털이 반짝였다. 설움도 잊은 목도리는 윤에게 달려와 헥헥 거리며 분홍색 혀를 내밀어 뺨을 핥았다. 윤이 웃으며 코를 비볐다.
씻고나와 단장을 한 윤은 곧장 추수(秋水)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황제의 사적인 공간으로, 레나드가 즐겨 쓰던 방이다. 이곳에서 윤이 죽었다.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황제가 앉아있었다. 인사를 생략했지만 황제는 개의치않는 듯 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을 아는가?”
“……본성 중 하나 아닙니까.”
“그대는 이제 거짓말에 능숙하군.”
마치 황제는 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수척하게 야위었으나 붉은 눈동자만은 형형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쁘띠아파르트망이 폭파되었고, 수많은 기사들이 죽었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본성은 평온했다. 찜찜한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그대를 불렀지. 멀쩡한 모습으로 오게될 줄은 몰랐지만.”
“그 기대를 배반해서 죄송하기 그지 없군요.”
“미안하다면 좀 더 정중하게 구는 건 어떤가.”
“내 정체를 알고 있지 않나? 이쪽이 훨씬 조상님일텐데. 그쪽이 내 손자의 아들 뻘 쯤 되던가.”
황제가 소리내어 웃었다.
“무어 틀린 말은 아니군. 그대의 무례를 용서한다. 짐이 그대에게 황제에게 반말할 권리를 수여하노라.”
“무례를 범하는 김에, 좀 더 저지르도록 하지. 왜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미워하는 건가?”
“‘내’가 미워한다고? 그래. 그랬지.”
윤은 줄곧 궁금했다. 어째서 자신의 아들을 미워하는 것일까. 광증이 아닐 때의 황제는 멀쩡했다. 지금도 지치고 마른, 30대 초반의 남자로 보일 뿐이었다. 붉은 눈동자 또한 이지로 또렷했다.
“이 피가 증오스러우니까.”
황제는 음울하게 웃었다. 윤은 걸음을 옮겨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황제의 표정에선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자신을 향한 강한 열망과 증오가 함께 느껴진다는 거다.
“아스탄은 어디 있지?”
“너를 만나고 있는 건 나다!”
황제가 돌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팽팽한 줄다리기다. 윤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신중하게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왜 아스탄인가?”
“당연하잖아. 그는 내… 연인이야.”
머뭇거리던 윤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살기를 드러내었다. 윤은 확신했다. 황제는 자신에게 이유모를 집착을 하고 있었다. 만난 시간도 얼마되지 않건만,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아스탄이 말한대로 이 광증의 시작이 자신이기 때문인 걸까.
“짐의 아들은 돌아갔다. 이후는 짐은 모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스탄의 기운이 느껴져. 다시 묻겠어. 아스탄은 어디에 있지?”
윤이 살기를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반인반마의 수신 호위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만!”
황제가 손을 들어 막았다. 황제의 손발을 자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군. 윤은 혀를 찼다. 고작 다섯에 달하는 반인반마따위 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비칠비칠 걸어 윤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나를 원하나?”
윤은 도발하듯 말을 놓았다.
“이제 아예 말을 놓는 건가? …뭐, 이쪽이 익숙해서 좋긴 하군.”
“내 질문에 대답해.”
“……그래. 원해.”
황제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룩해진 사타구니를 윤의 허벅지에 비볐다.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에 혐오감이 치밀었으나 그것을 눌러 참았다.
“아스탄을 먼저 보여줘.”
“그래, 아스탄이 그리 보고 싶다면야. 그렇게 하지!”
황제가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벽난로의 촛불을 뽑아서, 샹들리에에 꽂아넣었다. 문이 열렸다. 역시. 윤은 황제의 뒤를 따랐다.
‘역시 비밀 통로로군.’
윤은 조심스럽게 복도를 살폈다. 사람의 흔적 따윈 없었다. 이곳에서 황제를 죽여버리는 건 쉽다. 그러나 아스탄을 찾기 위해서는 황제가 필요했다. 월스턴과 함께 그란디아의 황성을 짓던 시절을 떠올렸다. 이곳 외에도 무수히 많은 비밀을 숨겨두었는데, 열쇠 또한 평범하지 않아서 조상에게서 이어진 혈통이 그 열쇠가 되는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의 끝, 문이 드러나고 황제가 주술 문자 위에 자신의 피를 묻혔다.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로 기둥에 묶인 아스탄의 모습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반인반마의 수신호위도 보였다. 제 주인을 지키려다가, 수적 열세에 밀려 망가진 듯 싶었다.
“아스!”
또 다른 주인의 모습에 윤의 품에서 새끼 여우가 폴짝 뛰어내렸다. 얼른 달려가서 아스탄의 허벅지를 물고 앞발로 통통 때렸지만 깨어날 줄 몰랐다. 흑발의 인간이 얼마나 나빴는지 일러야하는데. 여우는 또다시 원통함에 울었다.
윤은 느릿한 걸음으로 아스탄에게 다가가자, 황제가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비스듬하게 비껴섰다. 아스탄을 살폈는데, 그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코 밑에 손을 가져다대자 미약한 숨이 느껴졌다. 기운을 흘려보낸 윤이 멈칫했다.
“아스타시온이 살아있는 걸 충분히 확인했겠지? 이젠 물러서.”
“……좋아.”
윤은 황제를 쏘아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어지럽고 좁은 방안엔 황제와 윤이 마주보고 섰다. 황제의 뒤편엔 아스탄이 있었다. 수신 호위의 수는 고작 다섯. 윤이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숫자였다. 지금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계속해서 억눌렀다.
“아스탄은 어떻게 된 거지?”
“이 방은 황룡의 방. 인장을 받지 못한 자가 들어오면 그 독에 중독되지.”
황제가 노래부르듯 흥얼거렸다.
“어지럽지 않나?”
“…별로.”
윤은 속이 뒤집히는 감각을 참아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무형의 독에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초월자인 윤이기에 죽음까지 이를 것 같진 않았지만, 오래 노출되면 분명 위험했다. 아스탄 역시 이 저주와 같은 독에 당한 게 틀림 없었다.
“독을 해독하는 방법은?”
“글쎄. 황룡의 피가 이어져있으니 죽진 않겠지.”
황제가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했다.
“다시 묻겠다. 해독제는 있는 건가?”
“물론.”
“해독제를 내놔. 그렇지 않는다면 널 죽이겠어. 궁지에 몰린 쥐도 고양이를 물게 되어있는 법.”
윤이 검을 빼어들어 황제에게 겨누었다.
“아스타시온을 살리고 싶나?”
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황제를 노려보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속내를 간파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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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웰님, 잠뚱님, 평량님, qkr43105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