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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73화 (7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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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역천

권력에는 눈이 없었다. 오로지 탐욕의 추구만이 있을 뿐이다. 피로 물든 권좌는 아비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상관이 제 아랫사람을 배신하며 그 덩치를 불렸다.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제 아비를 죽이고, 그 권력을 뺏어올 생각에 궁리한다. 아스탄은 자조어린 표정 위에 미소를 덧칠했다.

보고있던 서류에서 눈을 뗀 아스탄이 제 성격처럼 결벽적인 흰 튜닉을 입은 청년의 등을 보았다. 끙끙거리며 골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 일그러진 미소가 아닌 속에서부터 진심어린 웃음이 우러나온다.

센트리움에 와서 검공에 대한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가 전면에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현제 레나디온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황제의 검으로써 묵묵히 뒤를 지키고 있었다.

윤을 쭉 지켜본 결과 소드 마스터라는, 살아있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이용하지 않은 시황제의 생각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디 그 성품 또한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또래의 귀족과 비교하면 놀라우리 만치 순진했다. 그런 사람을 추잡한 흙탕물에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현제 레나디온이 야비하고 치졸한 인간으로 생각되었다. 제 대부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놓고서 그 필요가 없어지니 팽했다. 어진 황제라고? 아스탄은 냉소했다.

“첩자의 보고는 받았나?”

“예. 델 시더 변경백, 울란도르 경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합니다. 남부의 해적토벌에 정신이 없는 것 같더군요. 웨스트올로 공작은 며칠 전, 차 대륙으로 가는 배를 탔다고 합니다.”

군권은 아스탄에게 대부분 넘어왔다. 그러나 그도 손에 넣지 못한 이가 있었으니, 그란디아의 유이한 초월자인 마법사 웨스트올로 공작과 기사 시더 변경백이다. 그들은 중립을 취하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있었다. 큰 변수가 될 이들이기에 첩자들을 붙여 꾸준히 동태를 파악하였다.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델 시더는 해안 도시였다. 맞닿은 해상 국가는 없었으나 남쪽의 군도에서 해적의 약탈이이 큰 골칫덩어리다. 덕분에 해군제독인 울란도르가 움직이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스탄은 쿡쿡 쑤시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서류를 넘겼다.

그간 황제와 그 수족들이 방만하게 운영한 제국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자 한심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딘넬, 노스트라드의 세수를 걷는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현재 목표한 액수의 75%가 걷혔나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조세가 모두 도착하였을 텐데?”

“작년에 비해 흉작이 심하여, 세금을 거두는 일이 쉽지 않았나이다.”

노스트라드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는 딘넬 백작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스탄은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황룡 가리온의 축복으로 비옥한 농지를 가진 그란디아였지만, 노스트라드는 본디 춥고 척박했다. 덕분에 북부의 주민들은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렇다면 정화꾼의 준비는?”

“그것은 이제 시행만 남아있사옵니다.”

“가도를 만드는 일은 미루고, 정화꾼들을 먼저 투입하도록 하지.”

“명을 따르겠나이다.”

딘넬은 고개를 숙였다. 아스탄의 지시를 따라 일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유용성이 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은 황태자가 추진하는 일을 도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저 손발이 되어서 시키는 일을 시행하면 되었다.

정화꾼은 아스탄이 윤의 세계에 있다는 청소부에서 착안한 것이다. 시골의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시로 와서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가축을 길렀다. 덕분에 곳곳에선 소, 돼지, 닭 등이 아무데서나 배출하는 분뇨들로 도시를 더럽혔다.

그나마 노스트라드는 일 년 내내 서늘하고 추운 날씨였기에 냄새가 덜하였지만, 센트리움의 경우 부유한 지구를 벗어나면 악취로 후각을 잃을 정도다. 다른 영지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영주성의 해자에는 분뇨와 쓰레기들이 둥둥 떠다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고 전염병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스탄은 이를 모아서 분뇨 처리장을 만들 계획이었다. 비록 분뇨는 악취와 미관을 해치는 혐오 물질이었으나, 잘 발효시키면 질 좋은 비료가 된다. 이를 팔아서 노스트라드의 세수를 충당할 계획이다.

“노스트라드는 시험 무대에 불과해. 이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큰 수익원이 될 거다.”

제르센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분뇨가 쉬이 부패하지 않는 노스트라드만큼 좋은 시험 무대 또한 없었다.

“윤, 인수인계는 잘 되어가고 있나?”

“……몰라.”

서류더미를 뒤적이는 윤의 얼굴은 해쓱했다. 클레먼스 변경백이 되면서 어마어마한 서류를 떠안아야했다. 그간 황제의 재무관이 파견되어 관리할 뿐, 주인이 없는 영지에 쌓인 결재서류를 본 윤은 당장 작위를 내놓고 도망갈 생각을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탄이 윤에게 다가갔다. 그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서류를 짚자 움찔했다.

“클레먼스는 크진 않지만 작은 항구를 가지고 있지. 덕분에 해군 운용도 함께 해야 할 거다. 배의 종류는 알고 있나? 함장이 있겠지만, 최종 군수권자는 너임을 명심해야해.”

“대충. …하지만 난 육군이라는 걸 알아줘.”

윤이 투덜거렸다.

“황제가 머리를 썼군.”

아스탄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클레먼스는 제법 크고 부유한 영지였지만, 너무 오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재무관과 함께 빨리 내려가 영지 안정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면 제도를 오랜 시간 비워야한다. 아스탄과 윤을 떼어놓기에 이보다 적절한 방법은 없었다.

“이 부분은 뭐야? 이 부분 말이야. 평민들에게 걷는 조세의 종류가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윤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의 수식을 가리켰다. 아스탄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서 서류를 살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뺨이 맞닿을 듯 가까웠다.

“그란디아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그 종류에 따라 세수를 다르게 부과하지. 클레먼스의 경우 농경지와 어업을 할 수 있는 바다가 같이 있기에 이 두 종류를 따로 취급하게 된다. 어찌되었든 식량이지만, 종류가 다르니 각자 세율이 부과되는 거라 생각하면 쉽지.”

서류를 읽은 아스탄이 손가락으로 함께 숫자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펜을 잡고 아스탄의 설명을 적어 내려가던 윤은 문득 이 자세가 무척 묘하단 생각을 했다. 중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어쩐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간질간질한 감각이 야릇했다.

[윤, 후우, 힘을 빼.]

침대에서는 좀 더 거칠고 쉰 목소리의….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야성을 느꼈다.

‘으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나치게 힘을 준 탓에 깃털펜의 펜대가 뚝 부러졌다. 덕분에 잉크가 사정없이 튀며 손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스탄이 혀를 쯧, 차며 제르센에게서 손수건을 넘겨받아 윤의 손을 닦아주었다. 제 손으로 검 이상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 없고, 동생조차 돌본 적 없은 남자가 보여주는 모습에 롭과 제르센, 딘넬 백작까지. 눈이 동그랗게 변했으나 신경 쓰는 척도 하지 않았다.

“펜촉이 날카로우니 손이 베지 않도록 조심해.”

“…어, 응… 그렇게 할게. 깃털펜은 오랜만에 쓰는 거라 익숙치 않네. 만년필이라도 써야하나?”

“네 세계의 물품을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윤의 실없는 소리에 아스탄은 단호히 대꾸했다.

“거 좋은 분위기 방해해서 미안하오.”

둘의 모습을 뚱하니 바라보던 롭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가 바닥을 보았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결국 뒷목을 벅벅 긁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스탄은 롭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자못 매서웠다.

“주군, 황룡의 숲은 언제 가실 겁니까?”

“그건 내 아버지의 생각에 달려있지. 그리 먼 날의 이야기는 아닐거다.”

롭이 반색했다.

“정말입니까? 대충 언제인지 말씀이나 해주십시오. 아주 온몸이 근질거려 죽겠습니다.”

“슬슬 준비를 하도록 하지. 그때만큼 나를 죽이기도 쉽지 않을 터이니.”

“그렇긴 하지요.”

롭의 솔직한 대답에 제르센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눈치 없는 롭은 싱글벙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저는 몸이나 풀러 가야겠습니다. 가자 스완!”

“……예.”

롭의 거대한 덩치 뒤에 가려져있던 스완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탄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고. 황제의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의 앞에서도 거만한 인상을 지닌 시종장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제국의 검, 북벽 노스트라드 공작 전하를 뵙나이다. 현재 그란디아의 주인이신 황제, 팔라티온께서 전하를 뵙길 바라나이다.”

“그렇다면 보좌관 제르센 아이그너와 호위기사 롭 이벨로크를 데리고 가도록 하지.”

“황제께서 허락하신 분은 아스타시온 전하, 단 한분이십니다.”

노골적으로 아스탄을 해치겠다는 의사가 드러났기에 롭 이벨로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아스탄은 손을 들어 롭을 막았다.

“그래, 본공 혼자에게 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신가 보군. 폐하께서 불초소생을 뵙길 바라니 응당 그에 따르는 수밖에.”

흠잡을 데 없이 미려한 대답에 시종장은 미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나, 고개를 숙여 그것을 숨겼다. 당당하기 그지 없는 아스탄을 대하는 태도에는 조심스러움이 깃들여 있었다. 권력의 향방에 누구보다도 예민한 것들이 시종이다.

황제는 무슨 생각인 것일까.

아스탄은 황제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제르센의 시중을 받아 격식있게 옷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낙낙힌 품의 옷 사이엔 검을 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자, 가지.”

아스탄이 망투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이가 어리다하나 그는 대제국의 황태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은 아스탄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까 찜찜하단 생각을 했었으나, 황제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기에 다만 걱정이 담긴 눈으로 별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하나님과 부처님, 알라신님, 벨라드님에게 빌었다.

============================ 작품 후기 ============================

하루헤님 juven님, 평량님. 튜란토트님께 감사드립니다.

전자책의 경우 아직 확실하게 확정이 난게 아니라서요... 계약이 되거나 한 건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들리면 알려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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