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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68화 (6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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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위협

황태자를 맞이하는 대연회는 영광의 방에서 열렸다. 황성의 본관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방은 개축하는 데만 20년이 걸릴 정도로 수많은 예산과 시간을 들여서 완공하는데, 3층 높이의 거대한 방은 황제의 즉위식, 후계자의 탄생 등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며 제국의 영광을 상징했다.

화려한 천장화와 샹들리에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벽면에는 거대한 거울과 창문을 절묘하게 섞었으며 2층에 걸쳐 만든 수십 개의 테라스는 지친 발을 쉬게 하거나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악공들이 4분의 3박자 왈츠를 연주하는 소리는 마법을 이용해 증폭시켜서, 궁에서 멀리 떨어진 마차까지 들려왔다.

“차 대륙에서 온 검공의 후예, 하이어드 경 드십니다!”

호명관이 윤의 이름을 외쳤다. 대연회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열려서, 입장 순서도 작위 순으로 정하였는데 제 순서를 놓치면 입실이 불가하였다. 덕분에 작위가 낮은 귀족들은 일찌감치 도착하여 기다렸고 고위 귀족들은 다소 느긋하게 출발하였다. 윤은 여타 자작들과 같은 순배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윤은 노스트라드 공작에게 성을 수여받았을 뿐, 작위는 없었다. 그러나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가 자작으로 임명받는 것을 감안하여 정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윤을 탐색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마치 시장에 나온 가축을 보는 듯 계산적인 눈빛에 벌써부터 질려버리고 말았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눈으로 살피기만 할 뿐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황태자의 사람임은 분명한데, 이제껏 사교활동을 하지 않은 탓에 그 성향을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윤은 벽의 꽃 신세였으나 이쪽이 편하긴 하였다.

롭과 스완의 얼굴이 저 멀리서 보였다. 스완은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귀족 영애와 대화를 나누었고, 롭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커다란 손으로 핑거푸드를 쉴 새 없이 집어먹었다. 부끄러운 두 남자의 모습에 윤은 아는 체 하려다 그만두었다.

“솔라. 아스탄은 언제 들어오는 거야?”

“지금이 백작의 입장 차례니 한 시간 이상 소요되겠군요.”

“…망할.”

얼굴만 비추고 도망가려고 했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샴페인을 한잔 받아든 윤은 테라스로 나갔다. 연금술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붉게, 또는 푸르게 밤하늘을 물들이는 불꽃을 한참 감상하고 있자니 루 로열의 순서가 되었다.

-뿌우우-!

뿔나팔을 불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호명관이 목을 가다듬었다. 입장을 위해 깔린 붉은 비로드 천 옆으로 물러난 귀족들은 옷매무시를 점검한 후 예를 표했다.

“황룡 가리온의 대리자로서 그란디아를 통치하는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드시나이다. 모두 자리에서 그 은혜를 표하시기를!”

호명관은 배에 힘을 주어 힘차게 외쳤다.

황족들이 입장할 때만 열리는 거대한 문이 열렸다. 이윽고 황제 팔라티온 2세를 선두로 하여 황태자 아스탄, 샤리크 백작 부인이 입장을 시작했다. 하가한 황녀들은 루 로열로서 입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광의 문으로 들어선 황가의 일원은 단 셋에 불과했다. 한때 황자녀만 열하나에 달하던 황가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출했다.

“노스트라드 공작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아스타시온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기 한량없어 이 연회를 열었소.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축사를 마친 후 가장 높은 단상에 착석한 황제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을 굽어보는 시선은 오만했다. 정말 미친 사람인건지, 아니면 멀쩡한 사람이 미친 척 하는 건지 모호할 만큼 이지적인 눈빛이었다.

윤은 눈동자를 굴려 아스탄을 찾았다. 건장한 체격에 잘 맞게 재단된 남색의 예장을 입은 덕분에 태양과도 같은 머리칼이 더욱 찬란한 빛을 발휘하였다. 전설 속 신수 그리핀처럼 패기 넘치고 당당한 모습은 주변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한 사람을 소개하지. 하이어드 경. 이쪽으로.”

황제의 부름에 윤은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단상에 올랐다. 사람들의 반짝이는 시선이 자신의 등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수십, 수백 개의 눈동자가 저를 발가벗길 듯 샅샅이 살피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단상에 선 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쪽 무릎은 세워 앉았다. 황제가 장식용 검을 뽑아들었다.

“사냥 대회에서 보여준 그대의 무위는 참으로 대단하지. 렉스 그랑드에 따라 합당한 보상을 하여 그대를 받아들이고자하오.”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대에게 남쪽에 위치한 변경백의 영지, 클레먼스를 하사하지. 그대는 앞으로 클레먼스 변경백으로서 국경을 수호하길 바라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일순 수군거림이 퍼져 나왔다. 영지를 하사받을 거라는 건 예상된 일이었으나 그 보상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후작과도 동등한 변경백의 영지라니. 소드 익스퍼트에게 주어질 영지로 과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의 의중을 살필 정도다.

대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각 파별로 시선을 나누었다. 검공의 후인, 아니 이제는 클레먼스 변경백이 된 윤은 실질적인 권력까지 거머쥐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순순히 황태자에게 권력을 이양할 생각이었던가. 수많은 생각들이 눈빛 사이로 오고갔다.

침묵이 길어지자 황제가 짐짓 불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짐의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명을 성심으로 받들겠나이다.”

윤은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검등으로 윤의 양쪽 어깨를 짚었다. 윤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예를 표했다.

“자, 이제 연회를 즐기도록 하지.”

황제가 크게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악공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주를 시작하였다. 연회의 첫 춤은 신분이 가장 높은 이가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음악의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일 뿐이다. 노골적인 훼방에 아스탄의 표정이 가볍게 굳었으나, 이내 그는 산뜻하게 웃으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폐하, 미욱한 본공에게 첫 춤의 기회를 넘겨주셔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마치 자신에게 아량을 베푼 양 선수를 쳤다. 황제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잠시 아스탄을 노려보더니, 코웃음치곤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누구와 춤을 출 것인가. 그와 신분이 맞는 여인은 애비가일 뿐이다. 그러나 제 질녀의 독살스러운 표정을 보건데 춤을 거절할 가능성도 무척 높아보였다. 어디 창피나 당해보라지. 황제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몸을 일으킨 아스탄은 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이어드 경, 아니 클레먼스 변경백. 나와 함께하지 않겠는가.”

윤은 말끄러미 아스탄의 손을 바라보았다. 크고 단단하고 의지가 되는 손. 잠시 머뭇거렸다. 단순히 춤을 청하는 뜻만이 담긴 게 아니었다. 동시에 어정쩡하게 대답을 회피한, 그의 마음을 받아달라는 요청과 마찬가지다.

“그대 또한 이 연회의 주인공이지 않은가.”

아름다운 적자색 눈동자는 강한 소유욕을 갈무리한 채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며 갈증이 일어서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이 손을 잡으면, 이제는 무를 수 없다.

아스탄은 머뭇거리고 있는 윤의 손을 잡아채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격렬한 풍랑을 속에 감춘 고요한 시선으로 윤을 응시했다. 청년의 모습을 한, 아주 오래 전의 사람은 무척 겁이 많았다. 망설이는 것이리라.

어서 내 손을 잡아, 윤. 네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다만 퇴로를 차단하고, 양 옆으로 벽을 세워 단 하나의 길을 만들 뿐이다. 인내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으나 아스탄은 어쩐지 이 기다림이 익숙하다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남자에게 춤을 청하는 황태자의 기행에 놀란 것도 잠시, 소문에 쐐기를 박는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모두들 황태자와 클레먼스 변경백, 윤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주 같이 짙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해사하면서도 차분한 얼굴은 무척 희었다. 아직은 소년처럼 뼈대가 가느다란 몸을 감싼 흰색 예장은 단출하였으나 고아한 매력을 더했다.

‘당신! 제정신이야?’

대연회장에서 가장 신분이 지고한 여성, 애비가일이 얼굴을 가린 부채를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공녀, 표정을 가다듬으시지요. 그리고 손에서 힘을 빼세요.”

애비가일의 샤프롱, 디스그렌 백작부인이 살며시 속삭였다. 자칫 부챗살이 부러져서 다치기라고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비가일은 간신히 미소 지었으나 눈가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스탄의 돌발 행동은 황제파 여럿을 물 먹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춤을 추는 건 괜찮다. 하지만 응당 자신에게 왔어야했다. 이후의 일은 그녀의 소관이 아니다. 다른 남자를 잡아서 춤을 추던, 추잡스러운 연애사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건 상관없는 일이다. 이렇게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어찌 회복한단 말인가.

상처입은 살쾡이처럼, 애비가일의 눈이 번뜩였다. 이 수치는 반드시 갚아주고 말 것이다.

윤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아스탄의 손을 잡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맞잡은 손을 에스코트하여 천천히 홀의 중심으로 향했다.

“첫 춤은… 왈츠로 하지.”

아스탄의 명에 따라 악공들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느릿하면서도 흥겨운 멜로디가 영광의 방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럽게 아스탄은 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레이디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에 미간을 찌푸린 윤이 눈을 치떴다.

“뭐야, 내가 여자 차례야?”

“억울하면 네가 선수를 쳤어야지.”

아스탄이 눈웃음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도 이쪽이 더 낫지 않느냐. 이전에도 춰본 적 있을 텐데.”

“언제? ……아, 그땐 내가 먼저 청했었고, 너도 여자 박자로 췄었잖아.”

“글쎄, 기억나지 않는 군.”

“나참.”

뻔뻔한 대꾸에 윤은 기막혀하며 투덜투덜했다. 손을 잡은 걸 무를 수도 없었다. 이윽고 음악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여자 파트를 처음 추는 거나 다름없는 윤의 다리가 몇 번 꼬였지만, 허리를 단단하게 감은 팔 때문에 넘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연회에서 언제부터 남자와 남자가 춤을 추는 게 당연해진거야. 내가 있었을 땐….”

“맞아. 단 한번도, 그런 적 없었다.”

“뭐?”

“그렇게 한 눈 팔면 넘어질 텐데?”

왈츠에 이은 춤곡은 좀 더 빠른 템포였다. 윤의 다리가 마구 꼬였다. 아스탄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윤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들어 올리며 크게 회전했다. 강하게 끌어 안겨 빙글빙글 돌았다.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흩뿌리는 빛의 포말이 어지러웠다. 에라 모르겠다. 윤은 아스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축제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wjadjssl님, 평량님, 튜란토트님께 감사드립니다 8ㅅ8!

그리고 parkso1215님께서 윤이를 그려주셨답니다 ^0^ 공지사항으로 오시면 보실 수 있어요!

우헤헤헤 저는 넘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왈츠에서 이렇게 남녀가 끌어안고 도는 장면은 없습니다... 하지만... 넣고 싶었습니다...(/...) 오늘 좀 더 길게 쓸 예정이었는데, 야근을 하는 바람에 8ㅅ8... 회사를 뿌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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