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전생보고서-66화 (6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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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위협

센트리움을 달구는 주요 화제는 단연 황태자의 귀환에 이어, 검공의 후인이 보인 무위였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냥 대회에서 마물의 상대로 보여준 그의 압도적인 무위, 아니 신위는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더욱이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검공과 달리 앳되고 화사한 얼굴, 적당한 키에 팔다리가 길고 호리호리한 체구는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그란디아인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

애비가일의 도자기처럼 희고 고운 손이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꽃향기를 머금은 찻물의 아름다운 수색을 눈으로 감상했다. 오후의 티타임애 애용하는 찻잔은 흰 바탕에 섬세한 문양을 그려 넣어 만든 도자기로 차 대륙에서 건너온 귀물이다.

황제의 연인인 샤리크 백작 부인의 살롱을 찾은 동방 상인이 소개하였을 때 애비가일은 반드시 손에 넣겠노라 마음먹었다. 결국 백작 부인이 구입하려던 물건을 가로채는 데 성공한 덕분에 한동안 살롱에서 등이 따끔거렸더랬다. 애비가일은 쿡쿡 웃었다. 이 찻잔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만 빼고.

검공의 후예, 윤.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눈앞에서 살랑거리고 있으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애비가일. 듣고 있나요?”

말벗인 아반디아 후작 영애, 엘리사벳의 부름에 애비가일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모처럼 화창한 날씨. 궁정의 여인들은 삼삼오오 각자의 방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것 또한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서로가 가진 정보와 재력을 가늠하는 여인들만의 전장이었다. 이런 전장에서 다른 생각에 빠지다니, 애비가일은 저의 실책에 속으로 혀를 찼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눈썹을 늘어트리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제 뺨을 감쌌다.

“미안해요. …마음을 빼앗긴 분의 생각이 제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어찌할 수 없었답니다.”

“어머, 애비가일. 당신이요?”

도도하기로 소문난 애비가일이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이 흥미로운 화제에 빠질 수 없다는 듯 델 무어 백작 영애, 소피아가 역력한 흥미를 드러내며 끼어들었다. 엘리사벳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표했다. 애비가일이 은밀하게 눈웃음 지었다.

“바로 검공의 후예, 하이어드경이죠.”

“아! 영애는 노스트라드에서 뵌 적 있겠군요. 게다가 제도로 넘어올 때도 함께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무도한 자들의 습격에서 저를 구해주셨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를 구한 것이지만, 그녀는 저 좋을 대로 해석하였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요. 정말 그 소문대로 아름다운 분이신가요?”

“예에-. 그 어떤 차 대륙 인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깊은 빛깔의 머리칼과 눈동자는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요. 게다가 다른 기사들처럼 우락부락한 체구가 아니라 늘씬하면서도 단정한 외양은 로망스 속 소년 기사님 같았답니다.”

“어머나, 상상만 해도 황홀하여라. 허나 그분을 뵙고 싶어도 두문불출하시니….”

소피아는 아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조만간 있을 겨울의 연회에 작위를 얻으시겠죠? 그렇다면 응당 모습을 드러내셔야 하구요.”

“그렇겠지요.”

상급 소드 익스퍼트라함은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를 뜻한다. 렉스 그랑드에 따라 단승 귀족이 아닌 세습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현재 맥이 끊겨 황제의 보호 아래 놓인, 주인이 없는 영지들도 여럿 있었다. 이런 영지들은 전쟁 등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냥 대회에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검사이니 이름 뿐인 작위가 아닌 영지를 수여하여 검공을 묶어둘 게 분명했다.

즉, 작위로도 부족해 영지까지 지닌 어린 기사의 등장은 혼인 시장에 새로운 매물이 풀린다는 말과 동일했다.

“검공의 후인께선 어느 영지를 하사받으실까요? 북의 테오필레? 남의 레이네스? 아아, 궁금하여라.”

적당한 화제를 던져주자, 두 사람은 그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애비가일은 입가에 띤 냉소를 숨기기 위해 차를 마셨다. 그래봤자 저들은 갖지 못할 보석이었다. 군침을 흘리는 모양새가 기분 나빴지만,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기로 하였다. 언제나 승자는 그녀였으므로.

“…하지만 그분은 윈디아의 에로메스라는 소문이 있는 걸요.”

소피아가 말끝을 흐렸다.

에로메스.

신화시대의 이야기다.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진 신, 윈디아가 사랑한 아름다운 소년의 이름으로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드물지 않은 시대였으나 에로메스는 특별하였다. 비록 청룡의 질투로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윈디아가 자신의 신격을 쪼개어 에로메스에게 나눠주었고 영원한 생을 살아가는 정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에로메스는 신분이 높은 이에게 사랑받는 남성의 상징이 되었다.

“정말 소문이 맞는 걸가요?”

“묘한 일이군요. 황태자 전하의 에로메스가 검공의 후인이라니… 마치 역사가 반복되는 것 같잖아요?”

“그렇죠, 시황제 폐하와 검공께서 연인이었단 야사(野史)도 있었으니까요. 백오십 년의 시간이 지나서 또다시 그 후예가 만나 사랑에 빠지다니 어쩐지 낭만적인 이야기예요.”

애비가일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걸 눈치채지 못한 소피아 영애가 자신의 손을 맞잡고 낭만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피아 영애는 꿈 많고 발랄한 아가씨였으나 다소 주변머리는 부족해서 누구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다. 눈치챈 엘리사벳이 적당하게 대화를 끊었다.

“정말 그분께서 황태자 전하의 에로메스라면 슬픈 일이에요. 그러나 진정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면 그분도 달라지시겠지요.”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애비가일의 표정이 풀어진다. 엘리사벳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황성 안, 향기로운 차와 맛있는 티푸드. 그것보다 더욱 흥미로운 타인의 연애사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발목까지 잠기는 짐승의 털은 무척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바로 사냥대회에서 큰 화제를 불러온 백호의 털가죽으로 만든 깔개다. 깔끔하게 목을 따서 잡았기 때문에 망토로 써도 좋았을 상질의 가죽을 카펫으로 만드는 천인공노할 행동에 제르센은 침울하였으나 아스탄은 윤이 좋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윤이 백호 사냥에 성공한 건 요행에 가까웠다. 아스탄에게 줄 선물로 잡은 은여우가 너무 작아서, 더 선물할 게 없나 산을 어슬렁거리던 중 사향노루를 노리던 백호를 발견했다. 가히 영물이라 불릴 수 있을만한 덩치였지만 윤에게 발견된 이상 그 가죽을 고이 헌납하는 수밖에 없었다.

깔개 위에 벌러덩 드러누운 윤은 여전히 한량 같은 삶을 지내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노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게으름을 피우는 그의 행동에 제르센은 기막혀했지만 거칠 것 없었다.

“그래도 내가 큰 도움이 되었잖아? 안 그래?”

큰소리를 탕탕치는 모습에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솔라는 손바닥을 비비며 “우리 윤 님의 솜씨가 대단하죠. 나이스 샷!” 하고 저도 모를 단어를 외치며 아부했다. 두 주종은 무척 뻔뻔했다.

손바닥에 올리면 그 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자그마한 은여우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황태자의 방을 둘러본다. 그러더니 눈앞에 있는 백호의 털가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꼬리가 신나게 흔들거린다.

“목도리, 뭐하는 거야!”

은여우를 향해 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벼락같은 목소리에 여우의 목이 움츠러든다. 너무 작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새끼 짐승은 윤에게는 목도리, 아스탄에게는 여우라고 불리었다. 성장기를 맞은 탓에 이가 가려운건지 여기저기 이갈이를 하고 다니는 목도리는 제르센의 마음에 피눈물을 흐르게 하는 일등 공신이었다.

“자꾸 물어뜯으면 제르센에게 혼난다!”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린 짐승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치명적인 귀여움에 솔라는 육포를 내밀었고, 윤은 속지않는다는 듯 엄한 표정을 지었다.

“너가 이러고 다니니까 내가 자꾸 제르센에게 잔소리를 듣는 거잖아. 자꾸 그러면 지금 바로 목도리로 만들어버릴 거야.”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작은 짐승은 콧잔등까지 찌푸리며 눈을 치켜뜨곤 아르릉아르릉하며 울었다. 전혀 매섭지 않은 위협에 윤이 피식 웃으며 여우의 콧잔등을 튕겼다. 끼이잉. 눈앞이 번쩍하는 충격에 여우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코를 앞발로 매만졌다.

“무얼 하는 게냐.”

집무실에서 돌아온 아스탄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바람의 방에 들른 그는 제집처럼 누워있는 청년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놀고 있었지. 아스, 많이 바빠?”

은여우와 윤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애완동물과 그 주인의 모습이 꼭 같았다. 아스탄이 목 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제 시급한 건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간다.”

마물의 등장은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기사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외적의 방어 및 마물의 토벌이다. 센트리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물이 등장했다는 건 그 임무를 게을리했단 뜻이다. 일부러 마물을 풀어놓았다는 게 맞겠지만, 황제가 자신의 임무를 방기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번 일로 황제는 많은 신망을 잃었다.

아스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후계자를 잃을 뻔한 귀족들을 충동질해 황제를 지탄하였다. 이제껏 황자녀들이 죽어 나감에도 귀족들이 침묵하고 있었던 건, 엄밀히 말하면 자신들은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기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다.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이 습격자들에게 공격당했고, 사냥대회에 참석한 여타 영식들이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그들로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많이 피곤해보이는데.”

“아직은 견딜만 하다.”

제르센의 시중을 받아 아스탄은 다른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 게 시간낭비라 생각되었지만 이또한 부를 과시하는 방법이었기에 별 수 없었다.

황자에게 질린 사람들은 점차 아스탄의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덕분에 쉴 틈 없이 서류가 몰려들었다. 벌써 삼 일째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한 덕분에 눈이 뻑뻑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히 검술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체력의 소모로 나가떨어졌으리라.

“게다가…….”

“응?”

“재주는 내가 부리는데, 공은 엉뚱한 사람이 가로채어서 좀 짜증이 날 뿐이야.”

황태자의 귀환을 기념하여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센트리움으로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황성에서 열리는 주최하는 연회의 날엔 제도 곳곳에서 축제가 열렸다. 광장에서 밤새도록 음유시인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춤을 춘다. 귀족들은 화동들을 시켜 빵과 동전을 뿌려 흥을 돋구었다.

이러한 축제는 자신의 세력과 부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로, 그와 관련된 서류가 자신에게 몰려들고 있으니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터였다.

몸을 뒹굴려 엎드려 누운 윤은 자신의 턱밑에 두 손을 받친 채 아스탄을 올려다보았다.

“아스. 너도 좀 쉬는 게 어때.”

“아직은 곤란해.”

단호한 거절을 못들은 것처럼 남자다운 뼈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럴 땐 쉬어야한다니까.”

잠시 망설이던 아스탄은 못 이긴 척 순순히 윤의 옆에 누웠다. 푹신한 백호의 털이 몸을 편안하게 감싸온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아스탄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네가 이걸 들고 왔을 때를 생각하였지.”

윤이 제 몸보다 큰 백호를 지고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얼굴엔 경악이 떠올랐다. 게다가 레이디에게 바치듯 아스탄의 앞에 서서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땐 입에서 턱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크게 벌어졌었다. 체면을 목숨처럼 생각하던 이들이 참으로 우스웠다.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은여우가 아스탄의 뺨을 핥았다. 제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어린 짐승이 아스탄을 따르자 윤이 투덜거렸다.

“보통은 날 따라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봐 목도리. 널 잡은 건 나야. 알아?”

윤이 새끼 여우의 뺨을 꾹꾹 찔렀다. 심술궂은 장난에 은여우가 뭉툭한 이를 세워 윤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어떤 짐승이라도 제게 목도리 같은 이름을 붙인 이를 따르지 않을 것 같다만.”

비스듬히 누워 머리 밑에 팔을 받친 아스탄은 한 마리의 어린 짐승과 윤이 서로를 다투는 걸 웃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방은 적당히 따뜻했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눈앞에 있다. 마치 마음 속 비어있던 허전한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이런 순간을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린 기분이 들었다. 안온한 만족감에 아스탄은 손을 뻗어 윤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저와 눈싸움을 하던 이가 사라지자 은여우가 캥! 하고 울었다.

아스탄과 윤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싸우는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아스탄이 윤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윤은 아스탄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 작품 후기 ============================

평량님과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60화가 넘는 동안 주인공수의 애정전선은 퓨어하고도... 참으로... 우리 강산 맑고 푸르고 깨끗한 수위를 자랑하였습니다... 드디어.... 일까요?

*나전보 속에서 나오는 에로메스는 그리스에서 동성애적 관계를 칭할 때 성인 남성의 사랑을 받는 소년의 명칭인 에로메노스에서 착안했습니다. 에로 *(-_-)*가 아니예요.

그리고 윈디아의 에로메스 자체는 아폴론의 히아신스가 모티브예요!

그리고 공지사항을 보시면 parkso1215님께서 멋진 팬아트를 주셨어요! 무려 아스탄이랍니다 ^0^! (구애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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