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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위협
“흐…….”
책상에 앉아 열심히 답장을 작성하고 있던 솔라가 흐느꼈다. 급기야 고개를 처박고 “흐으히이….” 하고 우는 지 웃는 지 모를 소리를 냈다. 엎드린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펫 위에 누워 뒹굴거리던 윤이 향해 고개를 들었다.
“솔라 왜 그래?”
“크읏, 흠. 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쉽게 멈추지 못한다. 윤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솔라에게 다가갔다. 몸으로 편지를 가리려 하였지만, 평생 검이라곤 교양으로 배워본 게 다인 솔라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편지지에 향수를 입힌 듯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당신의 아름다움에 저는 벼락을 맞은 듯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검은 머릿결은 밤의 자락을 잘라내어 옮겨놓은 듯하였고 눈동자는 마치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버들가지처럼 낭창한 몸매는 신화 속 윈디아가 사랑했다던 소년 에로메스의 현신이 아닌가 착각될 정도였습니다…….”
“큽.”
“이거 나한테 온 거 맞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윤이 내던지듯 편지를 내려놓았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초대장이 아니라 연서 아닌가. 향수를 입힌 종이부터 온몸이 오그라드는 시적 표현까지. 윤은 다시 한 번 편지의 수신인을 확인하였다. 친애하는 하이어드 경에게. 황태자에게 고용된 자신의 성이 맞았다. 발신인은 무려 남자였다.
“……예. 수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젊은 레보타스 경입니다.”
“레보타스?”
“남쪽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레보타스 변경백의 두 번째 아들이지요. 형이 있긴 하나 정처의 소생이 아니라서, 차기 레보타스 변경백이 될 청년입니다.”
“그런 사람이 왜?”
“윤 님께 반했나봅니다.”
솔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나 입술 사이로 가늘게 웃음이 픽픽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허사였다.
“이분의 편지는 어찌 대답할까요? 편지의 말미를 확인하시면 클럽하우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떠냐고 제의하시는데요.”
“……정중하게, 사무적으로 거절해.”
“알겠습니다.”
솔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슥한 밤이 되었다. 침상에 홀로 누운 윤은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각한 천장의 문양이 눈이 빙글빙글 돌만큼 복잡했다. 황제의 침소인 천공의 방이나, 아스탄에게 주어진 바람의 방처럼 이름이 붙은 방은 아니었지만, 그 장엄함과 화려함은 과연 대제국의 황성이란 찬탄이 흘러나온다.
눈을 깜빡이며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윤은 젊은 레보타스 경이 보낸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단순히 얼굴을 한번 본 것만으로 사람에게 반한다니 그렇게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몸을 원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한때는 그 역시 누군가를 절실하게 좋아했고, 온몸을 다 바쳐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을 홀로 보낸 탓일까. 아니면 선을 긋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이제는 누군가 곁에 없는 게 더 익숙했다. 마음을 쉽게 주지 않게 되었다.
육체적 접촉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가 된 영향인 건지 본디 그렇게 타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적으로 무딘 편이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하여 연인이 아닌 타인과 성적인 행위를 한 적 없었다.
그렇게 허위허위 오랜 시간을 견뎌내었다. 그러나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처럼 잠이 쉽게 오지 않는 날. 외로움은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날아왔다. 형체가 없는 칼날은 막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아스탄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려주던 손길, 뜨거운 입맞춤, 자신을 갈구하는 듯한 눈빛. 그렇게 친밀한 접촉은 수십 년 만이었다. 어쩐지 뺨이 화끈거리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괴물을 좋아할 리 없다. 단순한 육체적 끌림일 것이다. 그렇게 단정 지었다.
“하아.”
윤은 비스듬히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역시 아스탄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덕분에 지금도 우울한 생각에 골몰하여 땅을 파고 있지 않은가. 얼른 자자. 눈을 꾹 감았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누군가의 흐느낌과 같은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
몰이꾼이 나팔을 불었다. 그와 동시에 사내들의 함성 소리가 숲을 울렸다. 황제나 그에 버금가는 고위 귀족이 짐승을 잡은 모양이었다. 하늘 위론 사냥을 위해 길들인 매가 낮게 날아다녔다. 사냥개들이 컹컹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센트리움의 근교, 라 트리아지 행궁에서 사냥대회가 열렸다. 오랜만에 열리는 사냥대회엔 황제를 비롯해 힘깨나 쓰는 귀족들은 모두 참석한 상태로, 훈련할 때를 제외하곤 두문불출하는 윤도 황제의 초대장은 거부하지 못했다.
사냥대회를 즐기는 건 오로지 남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흠모하는 숙녀를 향해 사냥감을 바치기 위해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털빛을 가진 짐승을 잡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좀 더 나이 든 귀족들은 사냥 자체에서 오는 여흥을 즐겼다.
그렇다 하여 정말 야생짐승을 사냥하는 건 아니었다. 라 트리아지 행궁은 트로아 산기슭에 위치하였는데, 그 산세가 낮고 완만하여 위험한 짐승이나 마물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에 풀어진 짐승들은 노련한 사냥꾼들이 야생에서 산 채로 잡아 풀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저 ‘사냥 흉내’였다.
윤은 불필요한 살생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일련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홀로 숲을 거닐었다. 아스탄은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사냥을 하며 친교를 다졌다. 내심 같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강요하진 않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 속을 거침없이 내딛으며 그란디아로 돌아오고 난 후의 일을 생각했다. 이제 한달이 좀 넘었으나 체감 시간은 반년은 되는 것 같다. 무척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현실에서 그저 시간을 죽이듯 흘려보내던 삶이 무척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남쪽의 온화한 기후에 쑥쑥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갈라진 틈으로 햇볕이 스며들었다. 연녹색 나뭇잎이 싱그럽게 반짝인다. 겨울의 햇살은 쨍하면서도 창백했다. 누군가의 머리색을 생각나게 했다.
“아스탄.”
윤은 소리 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스탄의 고백은 곱씹을수록 신기하고 의아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도통 이해 가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어디가 그리 좋은 걸까. 그는 젊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 지위 또한 대단했다. 자신이 좋은 이유가 궁금한 동시에, 거짓 같진 않아서 더욱 궁금해졌다. 제 마음을 가지고 놀다 버리면, 어디든지 쫓아올 거라 하였던가. 윤에게는 어떤 고백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쌀쌀한 기후였지만, 겹겹이 겹쳐 입은 옷 덕분에 그리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윤은 묘한 얼굴로 자신이 걸친 조끼를 쓸어내렸다. 사냥 대회의 승마복은 활동성을 떠나서 부를 과시하는 예장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편하게 입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질문에 솔라는 경악했다.
당신의 위치를 자각하라는 잔소리가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윤은 한귀로 흘리며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음, 역시 전하의 선물이 유용하 군요.”
솔라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오늘의 승마복은 아스탄과 세트로 맞춘 자색 겉옷이었다. 그 위에 검은 가죽조끼를 걸쳤다. 바지는 흰색에 가까운 아마 색이고, 검은색 부츠까지. 신경 쓴 차림새였다. 특히 윤기가 흐르는 흑 담비 털로 만든 조끼는 편하고 따뜻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 가죽을 차지하기 위해 노스트라드의 여성들이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할 정도였답니다.”
“……그래?”
“모르셨습니까? 전하께서 사냥 대회에서 직접 잡은 흑 담비입니다. …아! 그때 몸이 안좋으셨죠. 여튼 흑 담비는 어마어마하게 귀하거든요. 그것도 조끼를 만들 정도로 덩치가 컸으니 내다팔았어도 그 무게만큼 금을 지불해야했을 겁니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내력이 있었다니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상인을 통해 구입했거니 여겼다. 솔라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흠. 나도 한 마리 잡아다가 줄까.”
값을 매기기 힘든 귀한 짐승을 선물 받았으니, 그 보답으로 결고운 털을 지닌 짐승을 사냥해서 줄까. 은여우를 발견했으면 좋겠는 데 있으려나. 아스탄의 밝은 머리칼과 은색 짐승의털은 무척 잘어울릴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윤이 휘파람 소리를 내어 저 멀리서 혼자 산책 중이던 흑마를 불러내었다. 푸르렁거리며 다가오는 말을 쓰다듬으며 사냥을 시작할 채비를 하였다.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몰이꾼의 나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금발을 휘날리는 황제를 위시한 황제파 귀족들이었다.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활시위를 쟀다. 한쪽 눈을 감고 이쪽을 겨냥한다.
“헉-.”
누군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시선은 흔들림 없이 곧았다. 겁먹은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이내 흥미를 잃은 황제는 황제는 재미없다는 듯 허공을 향해 활을 쏘아 올렸다. 화살에 목이 꿴 새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번에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탓에 간헐적으로 경련하고 있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새를 수거해 뒤편의 말에 실었다.
“재미없군. 재미없어.”
“그렇습니까.”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어야지.”
“공격하시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쯧, 하고 혀를 찬 황제가 말을 몰아서 다가왔다.
“사냥대회는 즐거운가?”
“예.”
“하지만 경은… 사냥을 전혀 즐기지 않는 눈치인데.”
황제의 시선이 힐끔 윤의 뒤편을 향했다. 말 등은 비어있었고, 시종도 따르지 않는 모습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저도 곧 사냥을 시작할까 합니다.”
“지금? ……무어, 이미 늦었을 터이나 열심히 해보게.”
미묘한 말을 남긴 황제는 말을 달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던 귀족들이 윤을 한 번씩 쳐다본 후 황제의 뒤를 따랐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이스트민스트 공작, 카를로였다. 공작은 말에서 내려서 윤에게 다가왔다.
“반갑네. 하이어드 경. 나는 이스트민스트 공작, 카를로 레반스 이스트민스트요.”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미흡하게나마 검공의 후예라 불리고 있는 윤입니다.”
“잠시 산책을 하지 않겠나?”
“예.”
애비가일의 부친인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40대 초반의 키가 크고 풍채 좋은 사내였다. 옅은 아마색 머리를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겼는데, 격한 승마에도 머리카락이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은 모습에서 칼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시종을 멀찍이 물린 그는 윤과 걸음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 침묵이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공작이 말문을 열었다.
“애비가일이 경에게 신세를 졌다지.”
“신세라뇨.”
“아니, 경이 딸의 목숨을 구한 게 맞아. 이것은 어떠한 금은보화로도 보상할 수 없는 값진 것이지.”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도룬 영지의 경계에서 있었던 습격이라면 황태자를 겨냥한 거였다. 애초 같이 이동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기실 공작은 분노하고 있었다. 비록 제 권력을 추구했다하나, 성심으로 봉명한 세월이 수십년이다. 그러나 제 자식의 목숨도 하찮게 여기는 황제는 질녀 또한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제 눈에 돌멩이라 하여도, 남에게는 보석일 수 있는 법이었다.
“이 사람의 후의로써 그대에게 조언하지.”
“예.”
“황태자 전하의 곁을 비우지 말게. 크게 후회할터이니.”
“……무슨 의도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작이 멈추어섰다. 새파란 눈동자가 윤을 응시하였다.
“…황룡 가리온의 대리자인 그분을 성심으로 따랐지. 그러나 이 사람에게도 중요한 것이 있네, 이세상 무엇보다도. 그 보물을 흙발로 짓밟힐 뻔하였는데 아비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애비가일이 공격받아서 뚜껑 열렸단 뜻이었다. 공작이 딸을 대단히 아낀다더니 그 소문이 참이었나 보다. 윤은 공작의 진의를 의심하는 동시에 그 행동을 납득하였다.
그때 아스탄이 당했더라면, 무도한 자들에게 애비가일이 무슨 일을 겪었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두루뭉술한 조언으로 보은을 끝낸다는 것은 진정 아스탄의 편으로 돌아서진 않는다는 뜻이리라.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다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걸세.”
공작은 뒷짐을 진 채 하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윤은 말 위에 재빨리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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