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0 / 0111 ----------------------------------------------
9장, 고발.
감옥 밖으로 나온 윤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불쾌한 공기를 몰아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뭇거리던 아스탄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한참을 고르고 고르던 말이 겨우 ‘신경 쓰지 마라.’ 라니. 참으로 위로에 서투른 남자다. 윤은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로릭의 말에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저런 것에 일일이 상처받았다면 윤의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의미 없는 사람에게 신경 쓰기엔 그는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오히려 네가 화를 냈을 때 더 속상했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어색하게나마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이 기분 좋아서 윤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로릭은… 너무 심하게 처벌하지 말아줘.”
“그는 죄인이다.”
아스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딱히 내가 피해를 본 것도 아니고.”
“만약 네가 신분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저 감옥에 갇히는 건 너였을 거다.”
“결론은 잘 풀렸잖아.”
“넌 화도 나지 않는 건가?”
“설마, 난 성자가 아니라고.”
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설마 로릭이 이번 일을 혼자 꾸몄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배후는 따로 있겠지. 하지만 그가 네게 큰 잘못을 했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로릭의 배후는 황제라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윤을 죄인으로 만들어야할 황제가 가만히 넘겼다는 거다. 오히려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찜찜한 의문을 묻어두었다.
찌뿌듯한 목을 이리저리 꺾던 윤이 입을 열었다.
“아스,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아스탄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이쪽으로.”
본관에서 뒤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기사단이 사용하는 구역이 나타난다. 황성의 기사단이 사용하는 장소로 추운 날씨에도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황가의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외지지 않고 개방된 곳에 위치하였다.
“……일부러 왔지?”
“맞아. 이곳은 근위 기사단과 수도 기사단이 사용하는 곳이지.”
“여긴 어느 편이야?”
“나의 편이 삼분지 일, 황제의 편이 삼분지 일. 나머지는 어느 쪽도 선택 못한 이들.”
“치열하네.”
윤은 아스탄의 의중을 곧장 눈치채었다. 광증에 이성을 잃은 황제보다는 황태자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제법 괜찮은 계책이다. 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란디아로 돌아온 후 제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아스탄 밖에 없었고, 그와 대련을 하는 동시에 원하는 바도 이룰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아스탄은 제르센의 시중을 받아 몸을 단단히 죄고 있던 옷가지를 벗었다. 하늘하늘한 슈미즈에 바지만 받쳐 입었다. 몸의 선을 따라 달라붙는 옷감인 탓에 긴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윤 역시 홑겹의 옷만 입은 채 가볍게 발 구르기를 하며 몸을 풀었다. 쌀쌀한 날씨에 추위를 느끼긴 하였으나, 몸을 움직이면 금세 체온이 달아오를 터였다. 윤은 트리기토스를 가볍게 쥐었다. 이번에도 자신을 막대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었다.
“검은? 진검으로 대련하는 게 어때?”
“좋다.”
무수히 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 데 대련을 시작했다. 두 개의 검은 빠르게 교차하고 부딪히길 반복하였다. 순식간에 수십 합이 지나갔다. 아스탄은 공격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용맹한 공격 일변도였다. 윤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며 간간히 가벼운 반격을 가했다.
두 사람의 공방은 검무를 추는 것처럼 완벽한 합을 자랑했다. 한동안 연무장은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스탄에게 젊은이 특유의 자신만만한 패기가 느껴진다면, 윤의 검술은 간결하면서도 노련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아스타시온 전하께선 일찍이 검의 천재라 불리시던 분이었으니 그 대단함을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하이어드 경과 막상막하를 이루시니 말입니다.”
솔라가 가볍게 감탄했다.
“그러니 문제지.”
“예? 형님 무어라 하셨습니까?”
제르센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련에 쏠려있던 솔라는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칫!”
윤의 명치를 향해 자신 있게 찔러 들어간 일격이 막혔다. 검날을 맞댄 채 서로를 응시했다.
“본격적으로 가볼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팟! 하고 아스탄의 검이 불타올랐다. 머리색과도 같은 찬란한 금빛 검기가 반짝거리며 빛을 흩뿌렸다. 윤 역시 기세를 올렸다. 윤의 것은 검푸른 빛깔로 강렬한 흑백의 대비를 이루었다. 검기와 검기가 충돌할 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아스, 너 소드 익스퍼트라는 거 거짓말이지?”
“……무슨 뜻인가?”
“내 생각엔 그 이상인 것 같아서.”
그 나이 대엔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의 고수였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가 되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윤은 아스탄이 보이는 것 이상의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눈치채었다.
씩, 웃은 윤은 목을 향해 재빨리 검을 찔러 넣었다. 아스탄이 상체를 회전시키며 검 끝을 쳐내었으나 검기가 일으킨 풍압에 슈미즈 위로 작은 실선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맨살이 드러난다. 살갗은 건드리지 않고 옷자락만을 가른 솜씨에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과연 검공이란 명칭이 아깝지 않았다.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아스탄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축였다. 육식 동물과도 같이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기세를 끌어올릴 때였다.
“그만!”
대련이 더욱 격해지기 전 윤은 중단을 선언했다.
연무장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본 이들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특히나 중립에 선 이들은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과연 검공의 후예라고 해야하는 걸까. 그 실력은 대단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역시 네 진짜 실력을 보긴 힘든 건가?”
“내 나이가 몇인데, 너에게 밀리면 어떡해.”
한 겨울의 날씨에도 두 사람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특히나 얇은 슈미즈 차림이었던 아스탄의 웃옷은 몸에 달라붙어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땀에 젖은 살결은 은은한 상아빛으로 빛났다. 어쩐지 여인의 속살을 훔쳐보는 기분에 윤은 눈동자를 굴리며 먼 산을 보며 대꾸했다.
“…그런가.”
아스탄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긴다.
“나라고 늦게 태어나고 싶었던 건 아니야. 차라리…”
“차라리?”
네가 이 땅에 처음 떨어졌을 때 내가 있었다면. 하고 무심결에 말을 내뱉기 직전, 아스탄은 그것을 삼켜냈다. 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어.”
자신들을 둘러싼 기사들의 낯을 확인한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탄이 노리는 바가 제대로 먹혀들어간 듯싶었다. 모두 놀라고, 흥분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란디아 제국은 소드 마스터가 그 기틀을 닦아 세운 곳. 북부만큼은 아니었으나 센트리움에도 무를 숭상하는 기풍은 남아있었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한 가문의 후계자인 경우는 많지 않다. 단장 급을 제외하면 대부분 차남이나 삼남으로 중대사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권조차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지. 이 몸이 누군데.”
윤은 가볍게 웃으며 아스탄과 주먹을 마주 대었다.
============================ 작품 후기 ============================
튜란도트님과 평량님의 후원쿠폰에 감사드립니다!
후아 벌써 60회네요. 여기까지오는데 약 45일이 걸렸습니다. 모두 독자님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