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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59화 (5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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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발.

“저는 단지 검공과 같은 곳에서 온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검공의 후인(後人)입니다.”

윤은 당당한 태도로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밝혀진 진실은 마치 파이어볼과도 같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던 재판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리며 달아올랐다.

“그게 무슨 뜻이지? 설명하라.”

황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침묵을 지키는 그를 대신해 아스탄이 물었다.

“대를 거치긴 하였으나 검공과 같은 유파의 검술을 배웠고, 그의 후계자라 자청할 수 있습니다.”

유파라 하여도 별 건 없다. 바로 한국검도 말이다. 윤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윤이 아스탄과 짜낸 거짓말은 이러했다. 검공은 초연히 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란디아에 대한 충심까지 내려놓은 건 아니다. 우버 산맥 깊숙한 곳에 숨어든 그는 재질이 뛰어난 차 대륙인을 골라서 후인을 키웠다. 그리고 제국이 혼란스러울 때 밖으로 나가서 힘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검공의 후계를 증명할 방법이 있나? 현재까지 네 발언은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우선 소드 오러입니다.”

“……소드 오러? 그것이 어찌 증명이 된 단 말인가.”

센트리움의 대법관, 제나우 백작이 처음으로 발언하였다. 제나우 백작은 문관으로, 검술엔 무지했다. 시의적절한 그의 질문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사람마다 소드 오러의 색이 모두 다릅니다. 허나 같은 검술을 배웠다면 비슷한 빛깔의 오러를 띄지요.”

윤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무가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덕분에 소드 오러는 그 사람을 드러내는 지문과도 같았다.

“무기를 드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허한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윤을 향해 몸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아스탄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태도에 차가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재판정의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척 베스파뇰은 황제의 손짓에 따라 윤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벌써 두 번째였다. 검사에게 검은 목숨과 다름없다. 벌써 윤에게 몇 번이나 목숨을 빼앗긴 거였다.

재미있는 악연이라 생각하며 윤이 검을 뽑아들었다. 반듯한 파지법(把持法)으로 죽도를 쥐었다. 윤의 눈이 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검공의 소드 오러는 짙은 흑색. 덕분에 그의 흑발흑안과 어우러져 로아크와의 전쟁 당시 전장의 흑색 악마라 불렸지요.”

검이 울기 시작하며 천천히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불꽃이 튀는 것처럼 팍-! 하고 오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선명한 빛깔의 검기에 재판의 참관인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마나를 살라먹으며, 짙게 솟아오른 검기는 윤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세인들의 시선이 윤을 응시했다. 십대 후반으로나 보이는 희고 앳된 얼굴, 아벨라르 인과 대비되는 작고 가냘프기까지 한 체구였다. 오랜 시간 수련을 한 덕분인지 당당하게 뻗은 어깨가 있었으나 몸은 호리호리했다. 허나 무시 못 할 위엄이 느껴졌다.

“이렇게 말입니다.”

윤이 검기를 거두었다. 사람들이 작게 술렁거렸다.

청년의 말대로 정녕 검공의 후계자라면 첩자라는 의심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검공이 제국을 배신할 리 없기 때문이다!

우버 산맥에서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해왔다면, 제국의 현황에 무지한 모습이 이해된다. 동시에 청년의 무례한 모습도 납득할 수 있었다.

검가(劍家)에 있어서 배분이란 몹시 중요하였다. 제자를 아들로 치며, 제자들 간에도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형님과 아우의 위치를 정하였다. 청년의 말대로 그가 정녕 검공의 후예라고 하면, 직계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뻘. 현 황제에게 있어선 아득한 조상님이 된단 뜻이었다.

이는 제국 권력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노스트라드 공작은 검공의 후계에게 전승되는 자리이다. 저자를 황제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신들의 행동은 어느 쪽에 줄을 대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인가. 그들의 머리는 빠르게 계산을 시작하였다.

“정숙하시오!”

땅땅땅! 아스탄은 법봉을 두드렸다.

“하이어드 경, 계속 발언하시오. 허나 단지 오러만으로는 그대의 발언을 인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 사료된다. 추가 증거가 있는가?”

“이것을 모르는 분들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윤은 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미스릴로 줄을 만들고, 그 가운데 박힌 보석은 깨알 같은 주술 문자가 새겨진 문스톤 펜던트다.

지루한 표정으로 재판을 관람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대마녀 안즈마네가 만들어낸 귀물, 공간 이동 목걸이였다. 황가의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은 반출이 엄격하게 제한된 탓에 그림으로나 봐온 마도구가 눈 앞에 나타났다.그들은 흡사 윤과 사랑에 빠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초대 황후셨던 안즈마네 폐하가 만들어낸 귀물, 공간 이동의 목걸이지요. 이것은 황후께서 검공에게 하사하신 것입니다.”

목걸이의 뒤편엔 안즈마네의 짤막한 편지까지 세공되어 있다.

사랑하는 윤에게.

고마워, 앤지. 나도 사랑해. 물론 친구로서. 윤은 친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힘을 잃고 회복중이나 문스톤은 윤을 달래듯 부드럽게 공명해 보인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궁지에 몰릴 뻔 했다. 소드 오러 정도로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데 어폐가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발당하기 전부터 윤은 자신의 신분이 불확실함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은 검공으로서 살던 시절의 윤이 아니었다. 검공 시절에도 많은 오해를 샀다. 외부의 첩자부터 시작해, 차 대륙에서 급파한 간자에서 마족이라는 소문까지. 하지만 시황제의 친우였고, 대제국의 공작이라는 신분이 윤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달랐다.

불명확한 자신의 신분에 대한 폭로전이 이루어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줄곧 생각해왔었고, 나름의 대비책까지 마련했다. 비록 첩자라는 오해를 받아 법정에까지 서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귀속 마법이 걸린 검공의 물건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귀속 마법은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옮겨지지 않는 것을 아시지요?”

윤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이 목걸이를 증거로서 제출합니다. 단지 훔친 것이라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물려받은 목걸이라면, 어느 순간 제게 돌아와 있을 겁니다.”

“증거품을 받아들이겠다.”

황제가 받아들었다. 꾸미던 계책이 허사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분나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쾌한 미소까지 띠고 있다.

로릭의 몸은 불쌍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를 모함하였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렉스 그랑드에 있어 내통의 죄를 중하게 치는 만큼, 무고의 죄도 무거운 죄목이었다. 간절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폐하. 한 마디 간언을 올려도 되겠나이까.”

“허락한다.”

“2차 공판을 무위로 돌리는. 아카데메이아에서 언어학자를 불러서 로아크의 문자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여도 충분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검공은 그란디아의 상징, 그 후계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공작의 말도 일리가 있군. 오히려 연회를 열어야겠어. 검공의 후계가 우리에게 왔으니, 참으로 큰 홍복이 아닌가.”

윤과 아스탄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윤이 씩 웃었다.

재판은 그들의 승리였다.

지하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다. 아스탄과 윤은 촛불에 의지하여 지하 감옥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가는 내내 들리는 것은 죄수들의 신음 소리와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들, 그리고 맡을 수 있는 것은 썩어 들어가는 살이 내뿜는 지독한 악취고,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도 겁먹지 않고 바닥을 돌아다니는 쥐떼들이다. 도저히 적응 될 것 같지 않은 공간에 윤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로릭은 독방에 홀로 수감되어 있었다. 내통죄 모함이라는 죄질이 흉악하였으나 얼굴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고문은 가하지 않은 모양이다.

“로릭.”

벽에 기대어 고개를 꾸벅이던 로릭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철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선다. 조금 수척해진 얼굴의 청년은 윤이었고,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사람은 노스트라드 공작이다. 자신을 이곳에 가둔 자들. 로릭은 반사적으로 적개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로릭 도우슨. 왜 그랬지? 왜 날 모함했어?”

“알아서 뭣하려고?”

로릭이 빈정거리자 윤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조금은 슬픈 표정이었다.

“협박 당했나? 아니면 그저 돈욕심에 날 팔아 넘긴 건가?”

“……네가 증오스러워서다.”

네가 차라리 빨리 나타나서 나를 구해주었더라면 팔이 망가지지 않았을 거고, 늦게 나타나서 내가 죽어버린 후에 황자를 구하였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꿎은 원망의 화살을 윤에게 쏘아 보냈으나 모두 빗나갔다. 로릭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렇군.”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로릭이 킬킬 웃었다. 자신이 줄곧 윤에게 느끼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열등감이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병든 노모와 지참금이 없어 시집을 가지 못한 누이. 운이 좋게 황가의 기사가 되었지만, 고작해야 시녀 소생의 황자 밑에서 일할 뿐이다. 아등바등 몸부림을 쳐봐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단번에 꿈도 꾸지 못할 장소로로 날아올랐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이런 비참함 따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척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추한 감정의 발로였다. 같이 진창에 구르길 바랐다. 그래서 배신하였으나 그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윤은 영웅의 후예로서 인정받았고, 자신은 죄인이 되어 이곳에 갇혀있다.

“검공의 후예에 소드 익스퍼트라니-. 나로서는 따라갈 수도 없어.”

“……로릭 도우슨.”

“넌 뭐든지 쉽지? 황태자에게 제멋대로 굴고, 황자에게 반말을 하여도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반반한 얼굴로 황태자를 꼬셨어? 이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 인생이야?”

가면을 벗은 로릭은 추악한 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며 악다구니를 썼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서글프게 바라보던 윤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서늘하게 식은 검은 눈동자만이 로릭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정녕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해?”

“그래! 운이 좋은 너 같은 놈이 내 기분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고!”

로릭은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댔다. 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네가 반성하고 있다면. 나는 널 구할 생각이었다.”

“……거짓말!”

“그 이유는 네게 어떠한 기대조차 품지 않았기 때문이지. 네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고.”

물론 로릭의 배신에 화가 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보다 분노의 강도는 약하였다. 로릭은 그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 뒤통수를 맞아 기분이 나빴을 뿐. 윤은 로릭의 모함으로 인하여 손해를 본 것이 없다. 오히려 이득을 얻었다 보아도 좋았다. 자신의 확실한 신분을 만천하에 알렸으니.

“로릭 도우슨. 내가 정녕 삶을 쉽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의 오만이고 착각이다.”

씨근덕거리고 있는 로릭을 향해 윤은 냉정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네 하찮은 잣대로 남을 재려하지 마라. ……내가 어리석었군. 가자, 아스탄.”

윤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감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줄곧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던 황태자는 로릭을 한번 강하게 노려본 후 윤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혔다. 이윽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

더러운 바닥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마치 비와도 같이 점점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모두 거짓말이다. 윤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강하고 당당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동경했다.

로릭은 홀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헝어헝, 큰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두드리며 오열했다. 허나 이미 늦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구리구리도사님, 튜란도트님, 류웰님, 평량님의 후원쿠폰에 감사드립니다 8ㅅ8!!!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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