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 / 0111 ----------------------------------------------
8장, 밝혀지는 정체
아이가 내민 건 하얀 풀꽃을 오밀조밀하게 엮어 만든 화관이다. 좋게 말하면 귀여웠고, 나쁘게 말하면 조잡한 솜씨다. 남자가 화관을 사서 어디에 쓸까 싶어서 거절하려던 차, 헐고 너절해진 옷소매자락 사이로 붉은 생채기가 보였다. 꽃을 꺾느라 풀에 베인 손도 엉망이다. 윤의 얼굴에 안쓰러운 빛이 스쳤다.
“……얼마니?”
“1, 10실링이요!”
겨우 맥주 두 잔 가격이었다. 윤은 아스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스탄이 눈썹을 찡그리더니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서 넘겨주었다. 10실링짜리 동화 두 개를 꺼낸 윤은 그 중 하나를 아이의 손바닥에 떨어트렸다.
“화관이 예쁘다. 하나 살 게.”
“가, 감사합니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두 손으로 동전을 꼭 쥐고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아참, 혹시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을 알려줄 수 있어? 그렇다면 심부름 값으로 10실링을 더 줄게.”
“……여, 여기서 대각선으로 가면 보라색 꽃이 그려진 여관이 있어요! 거기 1층은 주점 겸 식당인데,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에요!”
“알려줘서 고마워. 여기 약속한 돈.”
생각지 못했던 부수입에 여자아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흩트려 주었다. 여자아이가 타다닥 뛰어가는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던 윤이 화관을 손가락에 끼워 빙글빙글 돌렸다. 아스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응시하였다.
“……돈을 더 주어도 되었다만.”
“아냐. 그 정도가 적당해.”
평민처럼 입었다 하나 눈에 띄는 외모의 두 사람은 불량배들의 표적이 되었다. 여자아이가 접근했을 때부터 시정잡배들의 시선이 따라왔다는 걸 눈치 챘다. 동정심에 큰돈을 주어봤자 되레 얻어맞고 빼앗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분수에 넘치는 건 되레 재앙이 될 뿐이야.”
“그런가.”
“……책임지지 못할 동정은 하지 않는 게 좋고.”
윤의 목소리엔 깊은 회한이 배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흔적이 가득한 앙상한 몸을 보며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순간의 동정심을 발휘할 거라면 그만두는 게 낫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손대지 말아야 했다. 그건 긴 세월이 준 교훈이었다.
“아스, 잠깐만.”
윤이 까치발을 해선 아스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꼬마 숙녀가 만든 화관을 머리에 씌웠다. 금속성이 도는 검푸른 머리카락과 새하얀 풀꽃 화관의 조화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제법 괜찮았다. 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레이디 아스. 제법인데요?”
“시끄럽다.”
아스탄은 반사적으로 화관을 벗어 던지려다 멈칫했다. 아이의 작은 손이 생채가 나도록 풀꽃을 꺾어 엮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엮인 가시왕관이나 다름없었다.
“나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어. 그래도 아스는 이 곳의 주인이 될 거잖아.”
“…….”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켜주는 건 당연하다고 배웠어. 난 제왕학이니, 정치 같은 건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내가 떠나기 전까지 네 검이 되어 열심히 싸울게. 좋은 황제가 되어줘.”
쓸쓸한 얼굴로 말을 마친 윤이 빙글 돌아섰다.
“자! 우울한 얘기는 관두고 놀자!”
아스탄의 손목을 잡아끈 채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경쾌한 걸음으로 거침없이 노점을 누볐다. 평민들이 이용하는 노점이라서 그런지 별의별 음식들이 다 있었다. 아스탄에게는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양손에 제제새로 만든 꼬치를 든 윤이 야무지게 뜯어먹었다. 혼자만 먹는 게 미안했던지 아스탄에게도 내밀었다.
“아스, 너도 먹어봐. 맛있어.”
꼬치를 양껏 베어문 양쪽 볼이 불룩했다. 쿡쿡 찌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꼬치를 받아들었다. 이런 음식을 먹는 건 처음이지만, 윤이 워낙 맛있게 먹어서 궁금증이 일었다. 한입 베어 물자 확 끼쳐오는 누린내에 눈가를 찌푸렸다. 향신료를 쓰지 않은 탓에 고기 특유의 역한 향이 목에 걸렸다. 그러나 아스탄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 꼬마가 가르쳐준 식당이 이쪽이었지?”
신나서 앞서나가는 윤의 손을 꽉 붙잡았다. 놀라서 돌아보자, 아스탄은 무뚝뚝하게 “너 혼자 돌아다니다가 잃어버리면 곤란하니까.” 하고 핑계를 대었다. 인파가 잦아든 후에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붙잡힌 손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손의 땀이 불쾌하진 않을까.’
윤은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손과 손 사이에 괸 땀을 식히고 지나갔다.
문득 데이트 같단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 꽃을 얹은 미인과 함께하는 외출이라 나쁘지 않은데? 윤이 킥킥 웃자, 아스탄이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슥 치켜든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아서.”
맞잡은 손을 흥겹게 흔들며 앞장서서 걸었다. 머지않아 꼬마가 안내한 식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과연 이 근방에 가장 맛있다고 소문 난 집인지 바깥 문 밖으로 대기 행렬이 서 있다. 식사 때가 되어서인지 다른 곳도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다른 데도 비슷한 거 같은데, 여기서 기다릴까?”
“그렇게 하지.”
추위를 피하기 위한 난로가 타닥거리며 타오른다. 두 사람은 벽에 기대어서 순서를 기다렸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종업원을 불렀다.
“이곳의 추천 메뉴가 뭐죠?”
종업원을 향해 물었으나 대답을 한 사람은 얼굴이 불콰한 중년 남자였다.
“매콤한 토마토 스튜가 일품이지!”
그는 나무를 깎아 만든 잔을 흥겹게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흘러넘친 흑맥주가 바닥에 떨어졌다. 윤의 시선이 흑맥주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새로이 사귄 친우가 공작인 탓에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은 원 없이 먹었으나 이런 서민 음식은 맛보지 못한 터였다.
“……흑맥주도 두 잔 주세요. 시원하게요.”
“예이, 알겠습니다!”
아스탄은 주점의 난잡한 분위기가 어색한 듯 경직된 표정이다. 태어나길 황후 소생의 고귀한 황자로 태어났다. 비록 내침을 받았다 하나 지고한 공작의 지위도 함께였다. 아스탄 정도 되는 사람이 평민들 사이에 섞여 돌아다닐 일은 이제껏 없었을 것이다.
“아참, 화관 아직까지 쓰고 있었네.”
앉아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아스탄의 머리 위, 흰색 풀꽃 화관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내놈이 저런 걸 쓰다니. 하고 뜨악한 표정이었다. 아스탄이 화관을 벗어서 옆에 내려다 두었다. 아침 일찍 꺾어 만든 탓에 벌써 시들시들했다. 윤은 손가락으로 톡톡 흰 꽃을 건드렸다.
“부담스러웠지?”
“상관없다.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하니까.”
눈치를 살피던 윤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댄 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나갈까?”
“싫다는 건 아니야. 다만 어색할 뿐이다.”
“그럼 여기서 식사하는 거다?”
금세 음식이 나왔다. 붉은 빛이 도는 따끈한 고기 스튜와 곁들일 수 있는 빵, 그리고 흑맥주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자, 먹자.”
“응.”
윤은 숟가락을 들었다. 크게 떠서 입에 넣으니 살짝 칼칼한 맛이 일품이었다. 입이 매워지면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천국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매운 음식에 윤이 빠르게 먹어치우기 시작하자 아스탄도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생소한 음식에 어색한 표정이었으나 숟가락질을 멈추진 않았다.
“입에 안 맞으면 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
“그런 말 한 적 없다.”
아스탄은 우아한 예절로 식사를 마쳤다. 스튜는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네게 말했다시피 낯설었을 뿐이야. 처음이니까. 기미를 끝낸 후 차갑게 식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도, 이렇게 요란한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도.”
차분하게 말을 골라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제껏 겪지 못한 평민의 생활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힘든 삶을 눈으로 확인했다. 아마 윤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곳에 섞여들 일 없을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면 다행이야.”
윤이 웅얼웅얼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너와 함께 있으니 괜찮은 것 같군.”
아스탄이 마주 응시하며 눈으로만 웃었다. 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크게 뛰었다. 달아오른 뺨을 찰싹찰싹 두드린 그는 반쯤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취기가 뒤늦게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후원쿠폰을 주신 튜란도트님, 평량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