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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밝혀지는 정체
헌터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자신의 신음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한 사람이 눕기에 빠듯할 만치 좁은 공간에 그는 갇혀있었다. 사방은 컴컴했다. 허리 높이의 자그마한 구멍이 발치에 뚫려있다. 성인 남자는 몸을 숙여 기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문이 흐릿하게 보였다.
암흑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창문도 없는 탓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발치에서 새어 들어오는 촛불의 빛이 아니었더라면 미쳐버렸으리라. 사방을 살핀 헌터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채었다.
바로 검은 탑이다. 제국에서도 악명 높은 죄수만을 수감하는 감옥이다. 이곳에선 그 어떠한 고문도 하지 않는다. 어떤 죄인은 쾌재를 부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오판이다. 육체적인 고통만이 괴로움이 아니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어둠과 침묵, 그리고 고독이다. 바깥의 시간도, 날씨도 알 수 없다. 단지 하루에 한 번 음식이 든 접시가 방안으로 들어올 뿐이다. 희희낙락하던 죄수들도 점차 웃음을 잃는다. 점점 외로움은 사람의 정신을 야금야금 좀먹어들어간다. 결국 미쳐서 벽에 머리를 찧고 죽어버리는 죄인들이 대다수였다.
‘어째서 추국을 하지 않는 거지?’
황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황태자는 그 배후를 밝히기 위해. 어느 쪽이든 고문을 가해야 옳았다. 그러나 며칠이고 헌터는 방치되었다.
헌터는 식사로 나온 말라 비틀어진 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미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겪었던가. 목이 틀어막히자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물이었으나 감로수보다 달았다. 배를 든든하게 채운 헌터는 다시 잠을 청했다. 일단 최대한 기운을 아껴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헌터의 눈앞에 낡은 천장이 있었다. 흙벽을 발라 만든 벽은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었다. 시야가 환했다. 검은 탑이 아니다. 헌터는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분명 사람이 살던 민가가 맞았다. 그리고 얼마전까지 이곳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있음도 알 수 있었다. 헌터의 몸을 덮은 건 여기저기 기웠으나 솜을 채워 넣은 이불이고, 입은 옷도 낡았지만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힌 상태다.
침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탁자엔 식었지만 맛깔스러운 스튜와 검은 빵이 놓여 있었다.
“내가 벌써 미친건가?”
검은탑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리 없으니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 헌터는 도로 자리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강박적으로 생각했다.
‘아니야! 나는 미치지 않았어!’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듯 자기 세뇌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람의 인기척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헌터는 숨 죽이고 자는 척 했다.
“아직 자고 있는 건가?”
청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정답을 알고 있지 않나.”
남자다운 음성이 대꾸했다. 차갑고 오만한 기품이 서린 목소리는 완벽한 궁정식 억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 깨지 않을래?”
청년이 헌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알고 있었나.”
헌터는 낭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래뵈도 죽은 척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는데 저들은 속지 않는다.
자신을 구한 이들인 걸까. 헌터는 차 대륙인 청년과 푸른 머리칼의 남자를 가만히 관찰했다. 가만 보니 청년은 제게 강렬한 일격을 선사한 황제의 표적이었다. 매서운 주먹을 생각하자, 그에게 맞았던 오른쪽 눈가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어디선가 본 듯 낯익었다.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기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색 머리카락의 귀족 중 저런 자가 있는지 기억을 열심히 뒤져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가만히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네가 붉은 매 단장, 헌터인가.”
남자가 하문했다. 명령형의 말투가 자연스러웠다.
“맞다. 내가 헌터다.”
“죽을래?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반말을.”
헌터보다 훨씬 어린 외양의 청년이 주먹을 들었다.
“계속 반말 쓸 거야?”
“아, 아니… 요.”
매서운 협박에 헌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문득 억울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중 청년이 가장 어려 보였다. 그런데 어린 녀석 운운하다니. 울컥한 표정을 본 청년이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헌터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다시 묻지. 너는 누구에게 사주를 받았나?”
“……이걸 대답함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뭔데… 요.”
뻗대기엔 청년의 주먹은 너무도 가까웠다. 헌터의 목소리는 절로 공손해졌다.
“감히 나와 거래를 하자는 건가.”
남자의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이 헌터를 후려쳤다.
“나 같은 시정잡배들은 귀족이고 황족이고 그런 거 모릅니다. 이거랑 이게 중요하지… 요.”
헌터가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돈을 흉내 낸 후 제 목을 가리켰다.
“네 목숨은 보장하지.”
“진짜입니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네까짓 하찮은 자에게 내가 무엇하러 거짓을 말한단 말인가.”
황제에게도 건들거리던 헌터는 남자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이 곳은 안전 가옥이다. 너를 배후에게서 지켜주지. 단, 내 말을 따른다면.”
“……돈은요.”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헌터를 쏘아보았다.
“네 쓸모는 황제를 향한 작은 고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제야 헌터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연인이라 소문난 차 대륙인 검사와 친근하게 구는 태도, 타고난 듯 몸에 두른 기품과 오만함, 수려한 외양은 모두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노스트라드 공작, 황태자 아스타시온이었다.
“선택하라. 이곳에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본공에게 협력해 비루한 목숨이라도 부지할 것인가.”
“다,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럼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한발짝이라도 밖으로 나간다면 거래는 파기다.”
헌터는 흔들 인형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헌터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청년이 양손을 턱에 괴었다.
“이봐, 헌터라고 했어? 쿠르쉬를 알아?”
“알게 뭐야… 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네 조상님일지도 모르는 사람.”
“난 내 부모의 이름도 몰라. 그런데 조상을 어떻게 알아… 요.”
야만인 로아크의 혼혈은 누구보다도 배척을 받았다. 부모 중 어느 쪽의 피가 섞였는지는 모르나 태어날 때부터 암흑가에 버림을 받았고, 운이 좋아 길드에 들었다. 길드장의 눈에 띄여 승승장구 끝에 이곳에 도달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데 조상을 알 리 없었다.
“미안.”
청년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사과를 해온다.
‘나참 귀족으로 보이는데 나 같은 시정잡배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건 또 처음 보네.’
머쓱한진 헌터는 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가 멈칫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찢어죽일 듯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시선에도 힘이 있다면 헌터의 몸은 갈기갈기 조각났을 것이다.
“뭐! 별거 아닙니다요. 거, 검공의 후예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요.”
그제야 사나운 시선의 칼날이 무뎌졌다. 헌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다 살아났네. 그런 후 제 목을 더듬어보았다. 아직 잘 붙어 있었다.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이 황태자를 향해 걸어갔다. 황태자는 한 번 더 자신을 쏘아본 후, 보호하듯 어깨를 끌어안은 채 모옥을 나섰다.
“그래, 헌터. 나중에 보자.”
청년, 윤이 손을 살랑 흔들었다.
두 사람은 안전가옥을 떠나 거리로 나왔다. 지금쯤 가짜 헌터의 처형식이 시행되고 있을 터였다. 사람을 바꿔치기한다는 사실이 찜찜하긴 하였으나 그 역시 흉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헌터는 확보해야할 주요 인물 중 하나다. 예상보다 쉽게 회유되었기 때문에 다소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활기를 되찾은 센트리움은 기분 좋은 번잡함으로 가득 찼다. 안전가옥이 위치한 북쪽 지구는 예로부터 평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북부 지구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좌판이 펼쳐지고, 갖가지 물품과 간식들을 판매하는 난전과 그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평민이라 하여 가난한 건 아니기에 소박하면서도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신나게 뛰어다니고 어른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윤은 손깍지를 껴서 뒷목을 받친 채 사람들에게 휩쓸려 느릿느릿 걸었다.
노스트라드에서와 달리 흑발흑안의 차 대륙 인도 간간히 보였다. 덕분이 검은 머리의 윤도 도드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틈에 섞여들 수 있었다. 아스탄과 나란히 걷던 윤이 힐끔힐끔 그를 곁눈질했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지?”
“……아니, 좀 낯설어서.”
아스탄 이마위로 가지런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짙은 남빛이다. 금발이 드문 것은 아니나 그처럼 찬란한 빛깔은 보기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섞여들 때 염색은 필수적인 절차였다.
머리색이 짙어졌기 때문일까. 좀 더 성숙하고 서늘한 인상을 주었다. 본디 냉랭한 인상이긴 하였으나 지금은 쉬이 말도 붙이지 못할 만큼 쌀쌀맞게 보인다. 그러나 더 잘 어울린단 생각은 들었다. 아스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많이 이상한가? 다음부터는 다른 색으로 고려해보지.”
“아니 그건 아니고. ……잘 어울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이쪽을 스쳐지나간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길을 가다 멈춰 서서 한참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외양의 남자였다. 마지막 말은 마치 속삭이는 듯 자그마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아스탄이 빙긋 눈웃음 지었다. 왠지 머쓱해진 윤은 걸음을 빨리했다.
“아스, 검공의 동상이 어느 쪽에 있어?”
“중앙대로를 따라 쭉 타고 올라가면 광장이다. 그곳에 있지.”
긴 손가락이 거리의 끝을 가리킨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집중하니 어렴풋하게 금속성의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뒷머리를 받친 손을 풀어낸 윤이 아스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얼른 가자!”
“……보지 않는 게 나을 텐데.”
아스탄의 중얼거림은 행인의 소음에 파묻혀 사라졌다.
“저게 나라고?”
윤이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꺾어 거대한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오우거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듯 거대한 덩치의 장한이 검을 빼어들고 하늘을 향해 치켜세웠다. 박박 깎은 머리카락과 남자다운 이목구비는 어깨들이 “형님!” 하고 부르는 직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윤에게는 기다란 장검인 트리기토스가 동상 속 남자의 손에 쥐여지자 꼬챙이처럼 가냘프게 보였다. 트리기토스가 웅웅 울었다. 아니 비웃었다.
“어쩐지.”
윤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했다. 처음엔 좀 걱정했었다. 자신의 초상화나 기록 등이 남아있을 테니 같은 외양을 지녔다고, 검공이라 의심받으면 어찌하나 싶어서 온갖 거짓말을 구상했었다. 그러나 거짓말은 필요 없었다
검공에 대한 기록은 묘하게 거짓말투성이인데다, 제 외모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이들도 없었다. 그저 같은 대륙에서 온 뛰어난 검사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 상황을 겪으며 생긴 의문이 동상을 본 순간 풀렸다. 누구도 연관 짓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내가 살던 곳이나 여기나 역사 왜곡은 심각하네.”
한숨을 길게 내쉰 윤이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른 녀석들의 동상도 이렇게 사기야?”
아스탄은 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렇구나.”
윤의 어깨가 축 쳐졌다. 윤은 제 외양이 미덥지 못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10대 후반 청소년의 외모로 박제된 탓에 너무 어려 보였다. 앳된 외모가 날이 갈수록 불리하다는 건 현실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통감한 사실이다. 늘 붙어 다니던 현일이 점점 사내다워질수록 비교되었다.
“저런 흉악한 동상보단 실제 네가 낫다.”
“……고마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에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기요!”
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작은 손이 있었다. 뒤돌아보자 빼빼마른 작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꺾어 윤을 올려다보았다.
“예쁜 오빠! 화, 화관 사세요!”
아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화관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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