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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53화 (5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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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밝혀지는 정체

“……있지. 아스. 모두 말할게. 우선 부탁이 있어.”

“좋다. 네가 편한 방법으로 하도록 허하지.”

윤이 슬며시 웃었다.

“여긴 싫어. 밖으로 데려가줘.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넌 열병을 앓았다.”

“싫어? 언제는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준다며?”

소맷자락을 움켜쥔 윤이 조르듯 아스탄을 쳐다보았다. 까맣고 커다란 눈이 애원하듯 쳐다보자, 아스탄이 움칠했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애원하듯 바라보는 눈길에 아스탄은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게 다 말도 안 되게 해사한 외모 덕분이다.

“굳이 나가야겠나?”

“답답하다니까.”

호되게 몸살을 앓고 침상에서 이제 일어났다. 노스트라드에 비해 온후한 기후라지만, 겨울날 밖으로 데려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또 드러누우면 어쩔 거지?”

“걱정 마, 건강 빼면 이 몸은 시체라니까. 내가 얼마나 강한데?”

윤이 자신의 근육을 자랑하듯 팔을 들어올렸다. 워낙 날씬한 체격이라 근육이 살짝 솟아오를 뿐이다. 그것도 낙낙한 옷자락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에 아스탄이 피식 웃자 윤이 울컥했다.

“물론 네가 강한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겉모습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나라고 이런 모습을 원한 건 아니야.”

어느 순간 멈춰버린 성장은 시간이 지나도 다시 시작될 줄 몰랐다. 덕분에 윤은 10대 후반의 모습 그대로 박제된 상태였다. 면도를 하지 않아도 턱밑이 새파랗게 변한다거나 갸름한 턱이 단단해지는 일은 없었다. 아직은 동안이라 우길 수 있지만 그것도 한 때 뿐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 반드시 용을 만나서 그의 지혜를 빌려야 했다.

윤의 서러운 표정에 아스탄은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열병에 다시 걸려도 난 모른다.”

아스탄은 불침번을 서던 하인에게 마구간에서 말을 가져오도록 일렀다. 윤은 좋았어!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어딜 가면 좋을지 생각하였다. 사람이 많지 않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한 곳. 금세 좋은 장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거긴 추울 것이다.”

아스탄은 자신의 겉옷을 벗은 후 윤에게 둘러주었다. 옷을 입혀주기보다는 시중을 받는 입장이라서 그런지 무척 서툴렀으나 아스탄은 제법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여인에게 하듯 상냥한 손놀림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거 너무 큰데?”

“네 키가 작은 걸 원망하도록.”

붉은 가운은 아스탄의 키에 맞춘 탓에 윤에게는 무척 컸다. 소맷자락이 손을 가렸고, 끝부분은 바닥에 질질 끌려 엉망이 되었다.

무려 차 대륙에서 들어온 귀한 비단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태도에 시종이 보았더라면 기절하였을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지은 옷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만행에도 아스탄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얼굴이 희고 까만 머리카락이라서 그런지 붉은색도 제법 잘 어울린단 생각을 했을 뿐이다.

“……부러운 녀석.”

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스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성숙하고 잘생긴 얼굴에 건장한 체격은 ‘성인 남자’라고 그대로 써놓은 것만 같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몸, 길게 뻗은 팔다리는 그야말로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듯 이상적인 모습이다.

한국을 기준으로 하면 두 살이 어리고, 그란디아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오십 살 이상 연하인 아스탄이다. 헌데 이 차이는 무언가. 자신이 성장한다 해도 아스탄처럼 훌륭한 육체를 가질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어 새삼스럽게 억울해진다. 부러움 섞인 끈적끈적한 시선에 아스탄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부러워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몸을 단련할 수 있지? 만져 봐도 돼?”

허락도 하지 않았건만, 윤은 아스탄의 몸을 더듬더듬 만지기 시작했다. 근육으로 가득 찼다고 해서 마냥 돌덩이처럼 딱딱한 몸은 아니었다. 두터운 옷감 너머로 만져지는 육체는 적당한 탄력을 자랑한다.

“이야, 대박. 어떻게 단련한 거야?”

윤은 가슴팍을 꾹꾹 누르기도 하고 팔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가슴 근육도 멋지게 발달되어 있었으나 검을 휘두를 때 방해될 정도가 아니고, 팔의 근육은 힘이 들어가자 마치 쇳덩이처럼 딴딴했다. 이정도면 검사로서 최적의 몸이라 할 수 있었다.

학과 전공으로 스포츠 생리학을 배웠는데, 교재 속 육체보다 아스탄의 몸이 더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웠다.

“……그만.”

아스탄은 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가라앉아있었고 무언가를 억누르는 느낌이 풍겨왔다. 피처럼 짙은 색의 눈동자가 윤을 응시한다. 진득하게 옭아매는 듯 습한 시선에 어쩐지 민망해진 윤이 하하 웃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세게 움켜쥔 팔목을 놓아줄 생각을 않는다.

“이전에도 경고했을 텐데. 네가 살던 세상과 이곳은 많이 달라. ……남에게 함부로 만지는 건 조심하도록 해.”

아스탄은 윤의 손목을 놓아준 뒤, 제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두 마리의 말을 끌고 들어오는 하인에게 서두르라는 듯 손짓했다. 그가 퍼뜩 달려온다. 자다 깬 아스탄의 흑마는 기분이 나쁜 듯 땅을 박차며 푸르릉거리며 하인을 위협했다. 하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손을 물어버리려는 듯 난폭하게 굴었다.

“워워.”

아스탄의 손에 고삐가 쥐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마구간을 담당하는 하인은 억울한 눈으로 흑마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흑마가 다시 난폭하게 땅을 박찼다.

“이제 물러가보도록. 수고했다.”

말에게 걷어차일까 두려운 것처럼 하인은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아스탄이 날렵하게 말 위로 올라탔다. 윤을 위해 준비한 말은 갈색 갈기가 부드럽고, 까만 눈동자가 순해 보이는 암말이었다. 초보자에게 딱 적당해 보이는 말이다. 허나 윤은 그에 올라탈 생각을 않았다. 다만 해사한 얼굴로 뻔뻔하게 요구해왔다.

“태워줘.”

“승마를 하지 못하나?”

윤이 고개를 저어었다. 이 세계에 올 당시에는 수학여행 때 제주도에서 조랑말을 타본 게 전부였으나, 지금은 마술(馬術)의 고수라 할 수 있다. 마상 전투 경력만 오십 년에 달하는 그는 말 위에서 잠도 잘 수 있었다.

“귀찮아.”

“고작 그런 이유로 제국의 황태자를 부려먹겠다는 건가. 네 뻔뻔함은 겪을수록 놀랍군.”

아스탄은 타박하면서도, 윤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앞에 앉혔다. 다리를 가지런하게 모은 채 비스듬하게 앉은 자세였다. 그 자세가 불편한 듯 윤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다가 앞의 안장을 붙잡았다. 흑색 준마는 남자 두 사람을 태웠어도, 전혀 버겁지 않다는 듯 버티고 섰다.

아스탄은 윤의 머리 가마를 내려다보았다. 달라졌다. 무엇이 변하였는지 정확하게 집어내지 못하였으나, 아스탄은 윤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함을 알아차렸다. 좀 더 제멋대로 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리광을 피운다고 해야 할지. 그 변화는 나쁘진 않게 여겨졌다.

“꼭 붙잡도록 해.”

아스탄은 말을 달려서 단숨에 황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자안강과 연결된 운하였다. 어두운 길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아스탄의 마술에 윤은 감탄했다.

힘차게 달리는 말의 움직임에 따라 시야가 빠르게 변한다. 앞을 본 상태로 안장을 붙잡고 있던 윤은 그것이 불편해지자 몸을 돌려 아스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스탄의 호흡이 멈추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턱을 간질인다. 산뜻하고 맑은 향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메웠다. 마치 비 오고 난 후 맑게 갠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에 심장이 술렁거렸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준 채 말의 박차를 가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격한 승마

때문인지 아니면 제멋대로인 청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검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운하, 자안강이었다.

“오, 경치 좋은데?”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뛰어내린 윤은 운하로 다가갔다. 따뜻한 체온이 떨어져나가자 어딘가 허한 기분이 든다. 아스탄은 비어버린 품이 허전한 것처럼 가만히 앞을 노려보았다.

윤은 곧장 운하의 끝으로 다가갔다. 어둠이 물러나고, 희붐한 새벽빛에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강을 따라 배가 드나든다. 멀리 떨어진 강나루로 노동자들이 추운 날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짐을 운반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돌리면 센트리움의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백년의 시간을 실감하는 기분은 이상했다.

“……추워.”

거센 겨울바람이 옷 속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윤은 옷자락을 여몄다. 한서불침에 가까운 소드 마스터의 육체다. 이건 육신이 아닌 마음이 느끼는 추위다.

아스탄은 멀찍이 서서 세찬 바람에 까만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거리는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가느다란 목덜미가 드러난다. 작은 등은 무척 외로워보였고 또 지쳐있었다.

“아스탄, 여기 와서 앉자.”

두 사람은 운하의 끝에 나란히 앉았다.

“따뜻한 음료라도 가져올 걸 그랬군.”

“난 음료보단 술이 좋아.”

“네가 병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윤이 하하 웃었다. 이내 웃음이 잦아들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스탄은 어서 말하라며 재촉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도카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양새가 몹시 힘들고 괴로워보였기 때문이다.

“기다리겠다. 천천히 말해도 괜찮다.”

“……고마워.”

“이전엔 내가 너를 너무 몰아붙였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나름의 사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은 아스탄을 보며 눈을 반달로 접으며 미소 지었다.

“아냐, 지금 말해야한다고 생각해. 아스탄. 어쩌면 내가 미친 사람으로 보일 지도 몰라.”

“미친 사람만큼 네 배짱이 두둑하다는 건 알고 있다.”

윤이 하하 웃었다. 소리만 내어 웃던 입술이 일그러진다.

“우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게. ……일부러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고, 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의 진실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더럭 겁이 난다.

‘너는 내 말을 믿어줄까.’

다시 돌아온 그란디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그 중 윤에게 의미를 가진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스탄도 그에 속해 있었다.

“아스, 난… 내 이름은… 한국에서 불린 건 정해윤, 그리고 그란디아에서 불렸던 이름은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검공이란 과분한 별칭도 붙어있었지.”

아스탄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윤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왕이 되기 싫어 가출한 왕자가 있었어. 왕자는 비오는 날 밤, 우연히 사람을 주웠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이국적인 생김새의 소년은 낯선 외모를 가졌어.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왕자는 소년을 버리지 않았어. 그에게 말을 가르쳐주고, 낯선 세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지. ……후일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고백했을 때 왕자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하는 배포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어. 그가 바로 월스턴이야.”

윤은 두서없이 과거를 늘어놓았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마냥 막막했는데 한 번 입을 여니 생각보다 쉬웠다.

마녀의 피가 섞여 배척받던 소녀를 만났고, 고기를 먹다가 엘프의 숲에서 쫓겨난 엘프가 동행했다.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긴 시간이 흘러 오합지졸 같은 조합의 모험자들은 어느새 황제가 되고, 대마녀로 각성하고, 검공이 되고, 엘프족의 장로가 되었다. 모두들 성숙해져갔고, 제 위치를 찾아갔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소년은 늙지 않았다. 엘프를 제외한 모든 친구가 세상을 등졌음에도 처음 만났을 때의 외모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결국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친우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을 보살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를 훌륭한 황제로 키워내며, 제가 늙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니겠냐며 뿌듯해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방인. 누구도 곁에 두지 못했다. 언제나 혼자였고, 지독한 고독을 견딜 수 없어졌다.

윤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레나드에게 떠나겠다고 말했어.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자고 하더라. 그 술에 독이 들어있었어.”

목이 메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눈시울이 홧홧해졌다. 마음속으로만 곱씹고 있던 아픔을 털어놓는 건 무척 힘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꼴사납게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니까 내가 살던 원래 현실이더라.”

“……윤.”

역사서가 말하지 않는 참담한 진실에 무어라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스탄은 바닥을 짚고 있던 윤의 손을 꽉 잡았다. 언어로 전해진 것은 아니나 분명한 위로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곳에 다시 온 건 내가 죽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야.”

아스탄은 놀란 눈으로 윤을 보았다.

============================ 작품 후기 ============================

헤헤 연참입니다~ 일요일은 짜빠게티를 먹으면서 글을 써야지요 ~_~!

이 글을 읽고 선추코를 주신 모든 독자님들과 후원쿠폰을 주신 평량님과 튜란도트님께 감사드립니다 8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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