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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49화 (4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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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밝혀지는 정체

8장, 밝혀지는 정체

신화시대, 열두 거인 신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때 대륙은 하나였다. 세상은 아픔과 고통 따윈 없었으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로웠다.

그러나 유일신의 권력을 탐낸 거인 신들은 전쟁을 시작하였고 대륙은 산산 조각 부서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전쟁은 부질없어 서로의 목숨을 남김없이 앗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었고, 신화시대의 마지막까지 생을 부지한 건 유일한 여신들이기도 하였던 대지모신(大地母神) 알타미아와 하스라였다.

두 여신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천공의 신 벨라드를 낳은 후 흙으로 돌아갔다. 이에 알타미아의 육신은 아벨라르가, 하스라의 신체는 차 대륙이 되었다.

홀로 남은 벨라드는 스러진 문명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만든 것은 바로 신과 용이다. 신은 스스로 낳았으며, 용은 거인 신의 뼈를 발라내어 몸체를 만들고 입김을 불어 영혼을 부화시켰다. 총 열 명의 신과 네 마리의 용은 벨라드를 대신해 세상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벨라드는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 거인신의 눈동자에서 요정를, 손톱에서 조인족을, 발톱과 머리카락에서 각종 이종족들을 만들어내었다. 마지막, 거인신의 살점인 흙을 빚어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다.

[중략]

세상사에 무심한 다른 용들과 달리 황룡은 인간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 창세신화 「벨라드의 서」 중 발췌 -

***

센트리움은 대제국 그란디아의 수도로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써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거대한 운하를 중심에 둔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나라나 다름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윳빛 성곽은 십년에 걸쳐 축조한 난공불락의 방어진이다. 찬란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는 잇따른 황가의 흉사로 활기가 가라앉아 침체되었다.

황태자 아스타시온이 제도로 귀환한다!

가을걷이도 끝나고 긴 겨울에 지루해하던 사람들은 간만에 들리는 기쁜 소식에 거리로 나왔다. 노스트라드에서 북방의 야만족을 상대하며 세운 혁혁한 전공은 제국민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기 충분하였다. 게다가 혜성같이 나타난 이방인 검사가 함께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더욱 흥분했다.

오늘, 센트리움의 북부 지구에서 공작은 화려한 개선식을 치를 예정이다. 덕분에 광장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꽃 사세요! 붉은 꽃입니다! 5실링이예요!”

“맛있는 새구이입니다! 제제새로 만들었습니다! 다 팔리기 전에 얼른 드십쇼-!”

잡상인들이 지나다니는 이들을 붙잡으며 열띤 호객 행위를 했다. 평소였다면 매정하게 뿌리쳤을 사람들도 오늘은 흔쾌히 주머니를 연다. 그만큼 기쁜 날이었다.

이윽고 정오, 개선식에만 사용되는 정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백마를 탄 기사들은 매서운 눈매로 말을 몰았고, 그 뒤를 따르는 화동이 꽃을 뿌렸다. 색색 종이들이 바람에 두둥실 날아올랐다.

사방이 뚫린 마차를 탄 공작은 흰색 정복을 입었다. 붉은 망토가 크게 부풀어 올라 바람에 휘날렸다. 태양을 그대로 옮겨놓은 백금발이 눈부시게 빛났고, 조각한 듯 수려한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그야말로 성화 속 주인공 같았다.

공작의 옆에는 소문 속 검사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라는 경이로운 경지에 오른 검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었다.

공작과 대비되는 흑색 예장을 차려입은 차 대륙인의 얼굴이 무척 어려 보였다. 공작의 어깨쯤에 오는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몸 역시 호리호리했다. 강인한 전사를 기대하였던 사람들은 조금 실망하였으나 환호를 멈추지는 아니하였다.

윤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머뭇거리다가 그 성원에 손을 들어 응답했다.

“긴장되나?”

“……별로.”

개선식이 끝나면 곧장 황궁으로 들어갈 예정이고, 황제와 만나게 된다. 비밀스러운 지식도 그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윤이 집으로 돌아갈 해답을 찾는다면? 아스탄은 난간을 비틀어 잡았다. 엄청난 힘에 쇠로 만든 봉이 그 형을 일그러트리며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행히 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성원에 응답하기 위해 손을 흔드느라 이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워낙 크고 시끄러워서 눈치채지 못했다. 아스탄은 몸을 비스듬히 돌려 그것을 가렸다.

“이런!”

손을 흔들던 윤이 눈을 크게 떴다. 꽃을 던지며 환호하던 어린 아이가 사람들에게 밀려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인파의 물결이 거대하여 자칫 잘못하다간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찬 아이의 커다란 눈과 마주쳤다.

“잠깐! 윤!”

생각에서 행동까지 이어진 시간은 무척 짧았다. 윤이 난간을 붙잡은 후 2층 높이의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꺄악!”

“행렬을 멈추어라!”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질렀다. 지휘하던 이들의 외침에 기사들은 황급히 말을 세웠다. 아스탄 역시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착지한 윤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어 몸을 일으켜준 후 더럽혀진 옷자락을 툭툭 털어내었다. 그리고 다친 곳이 있지 않은 지 조심스레 살폈다. 다행히 다리를 조금 밟힌 걸 제외하면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다.

“조심해야지.”

녹색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트려준 윤은 허겁지겁 달려오는 기사들을 향해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와아아!”

“하이어드 경!”

한낱 평민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직접 구해주었다.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에 윤을 향한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기사들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제 키보다도 높은 단상을 가볍게 올라갔다. 재빠른 몸놀림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행렬을 재정비한 이들이 가도행진을 재개했다.

“그렇게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

“…미안, 다음엔 말하고 뛰어내릴게.”

결코 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그다웠다. 아스탄은 피식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우와아악!”

“윤 하이어드!”

“노스트라드 공작 전하 만세!”

어마어마한 함성의 물결이 윤의 뒤를 따랐다.

황제의 알현실, 천공의 방.

벽벽마다 최신 유행인 로카이유 양식에 맞추어 양각된 문양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벽을 장식한 높은 기둥은 돋울 새김으로 조각한 자줏빛 대리석이었고, 목을 꺾어 쳐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화는 그 화려함에 눈이 부셨다. 창문에 걸린 커튼은 차 대륙에서 가져온 자색 비단으로 금실을 수놓은 끈을 매어 늘어트렸다.

가장 높은 단상 위 황제는 앉아 있었다. 지치고 쇠약한 안색의 그는 화려한 방에 파묻힌 듯보였다. 그러나 황제에게서 풍겨나오는 위엄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톱이 내는 파열음은 규칙적이다. 딱, 딱, 딱. 마치 시계 초침처럼 일정한 간격이 내는 소리에 도열한 신하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가득 찼다.

‘설마 황태자가 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죽이지는 않겠지.’

귀족들은 긴장한 시선을 나누었다. 황제의 행동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황가의 맥이 끊기게 생겼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제국은 조각 조각날 게 분명했다. 대륙은 또다시 화마에 휩싸일 터였다.

현재 그란디아는 안팎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황가의 광증은 끝을 모르고 심각해져가고 있었으며, 부패한 귀족들의 전횡이 횡행하였다. 바깥도 마치 불을 붙이지 않은 폭약처럼 여러 가지 위험들을 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북부에선 야만족 로아크가, 동쪽에선 사막민족 비모르가 활개를 쳤다.

‘그뿐만이 아니지.’

황제도 황태자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취하고 있는 행정부의 수장, 다이아벡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황제에겐 적이 너무도 많았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후궁, 샤리크 백작 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붉은 머리의 백작 부인은 자칫 잘못하다간 당근으로 착각당할 수 있는 녹색 실크로 드레스를 지어 입는 모험을 감행했다. 허나 절세의 미희라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드레스는 짜 맞춘 듯 어울렸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해사하게 웃고 있었으나 이 자리에서 가장 독심을 품고 있는 사람도 바로 그녀다.

황후의 소생은 아니라하나 황제의 인지를 받은 아들 6황자, 제닌을 잃어버린 백작 부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식이 살해당했음에도 슬퍼하지도 상복을 집지도 못하였다. 분하고 원통했다. 황가가 멸망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흉심을 숨긴 채 황제에게 꾀꼬리 같이 속삭였다.

“노스트라드 공작이 5년 만에 귀환하다니, 앞으로 폐하의 어깨가 더욱 든든해지겠지요.”

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이제까지의 골육상잔은 알지 못한다는 듯 황제에게 애교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제 역시 그녀를 마주보며 웃었다. 텅 빈 고목처럼 오싹한 미소였다.

“그래, 마리아. 나의 오랜 지기(知己)가 오고 있지.”

지기가 누구냐고 백작부인이 반문을 하기 전, 뿔 나팔이 울렸다.

“북쪽의 방벽, 노스트라드를 수호하는 황태자가 도착하였나이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알현의 주인공들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신분의 순서대로 입장하였는데, 황태자이자 노스트라드 공작인 아스탄,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 그리고 윤이 마지막이었다. 애비가일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한쪽 무릎을 세워 꿇어앉았다.

“황룡 가리온의 대리자로서 그란디아를 통치하는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그 은혜가 만고에 지속되기를.”

제 아비를 향해 벼려진 불같은 증오를 잘 갈무리한 아스탄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황제를 향한 인사말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버산맥과 자안강의 지배자, 렉스 그랑드의 수호자, 센트리움의 주인 등 황제를 향한 수식어는 많았으나 모두 당연한 것이기에 생략되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인사를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달리듯 뛰어내려와 윤을 덥석 끌어안았다.

“윤!”

윤이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황제가 윤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황제의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날 모르겠어? 윤?”

황제의 동공이 길게 찢어진다. 파충류를 닮은 눈동자에 윤이 짧게 신음했다.

“……가리온.”

“오랜만이야. 나의 지인(知人)이여.”

황제, 아니 황제의 몸을 빌린 황룡 가리온은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 작품 후기 ============================

벌써 50화가 코앞이네요. 이야기도 중반까지 진행된 것 같습니다 @[email protected] 열심히 달릴 수 있었던 건 우리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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