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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습격
야숙을 위해 하인들이 재게 돌아다녔다. 잔나무가지를 가져와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솥을 걸었다. 기사들도 역시 어슬렁거리며 숙영지 주변을 탐색했다. 시종들 또한 더러워진 갑옷과 검을 받아들어 피를 닦아내고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윤이 마차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움칠 몸을 굳혔다. 아직 윤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위가 불러온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기실 사람들은 무위를 직접 눈으로 본 자를 제외하곤, 윤의 강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앳된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구는 결코 검을 쥐는 기사로 보이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이번 습격으로 달라졌다. 공포마저 느꼈다. 섬세하고 단정한 이목구비 속에 도사린 사신은 무시무시했다. 공기로 와 닿는 태도의 변화에 윤은 쓰게 웃었다.
“제르센, 이 근처에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예, 예! 전하. 멀지 않은 곳에 폭포가 있다고 합니다.”
제르센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주군이 윤에게 심혈을 기울인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윤은 단순한 소드 익스퍼트가 아니었다. 일개 대대에 맞먹을 거라 예상되었다. 대대 하나의 병력은 병사 오백이다.
그란디아의 인구가 약 일억이고, 최근 그들을 귀찮게 구는 마르가스 왕국의 인구는 이천만명이다. 그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사람이서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단 뜻이었다.
“아스, 그러면 다녀오도록 할게.”
“같이 가도록 하지.”
혼자 훌쩍 떠나려는 윤을 아스탄이 붙잡았다.
“제르센, 본공과 하이어드 경은 잠시 호수에 다녀오겠다.”
“위험합니다!”
습격이 다시 이어질지도 몰랐다. 아스탄 홀로 움직인다는 건 제 목을 내놓고, 잘라가줍쇼. 하고 먹잇감을 흔드는 것과 진배 없었다.
“위험한 건 본공이 아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지.”
“……그렇긴 하지요. 그, 그럼 시중을 들 사람이라도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따라가고 싶었으나 이번 전투에서 오른팔을 다친 터라 움직임이 용이하지 않았다. 시중은커녕 거치적거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하이어드 경의 시종을 데려가도록 하지. 불만이 있는가?”
“……없습니다.”
“금방 다녀올터이니 심려치 말도록.”
솔라는 재빠르게 두 사람이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더러워지지 않도록 깨끗한 천에 싸맨 후 단단히 묶어서 손에 쥐었다. 반대쪽 손에는 목욕을 위한 도구를 들었다. 제 동생이 미덥지 않은 제르센은 침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공작 전하께 불편함을 느끼시지 못하도록 잘 모셔.
제르센이 눈을 부라렸다. 솔라는 제 형의 무시무시한 눈길을 모른척 한채, 흥흥 웃으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숙영지에서 오분쯤 걸었을까, 깎아지르는 절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폭포가 만들어낸 작은 호수가 살포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수면이 새하얗게 빛났다. 물가로 다가간 윤이 호수에 손을 담갔다. 늦겨울의 쌀쌀한 날씨다. 물은 얼음처럼 차갑기 그지 않다.
“아! 차가! 심장마비에 걸리겠는 걸.”
“네가?”
아스탄의 대꾸에 윤이 킬킬 웃었다. 자신에게 변함없이 대하는 사람은 아스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황태자다운 배포라고 해야할지, 타고난 성품이라고 해야할지. 제법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곧장 눈치챈 것만 봐도 그렇다.
네 태도가 변치 않아 고맙다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윤은 옷을 훌훌 벗은 후 물에 뛰어들었다.
-첨벙!
윤이 “아으, 추워!” 하고 이를 딱딱 부딪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 물길이 만들어진다.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피였다. 전투의 흔적을 씻어내기는커녕 첨벙첨벙 물장구까지 치며 놀기 바빴다. 솔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사신이라 생각될만큼 무시무시했는데,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년 아닌가. 어느 쪽이 진실된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은 우아한 태도로 옷을 벗는다. 그의 옷 역시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알몸으로 물속에 뛰어든 윤과 달리 아스탄은 탈의한 후 솔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여, 여기 있습니다!”
솔라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커다란 흰천을 내밀었다. 아스탄이 허리에 감은 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차가운 듯 잠깐 움찔하긴 하였으나, 거침없이 물 속으로 몸을 담그었다. 아스탄을 중심으로 붉은 파랑이 일었다.
느릿하게 몸에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팔에서부터 어깨, 목까지. 피를 씻어내는 모습이 익숙해보였다.
“아스, 차갑지 않아?”
“이정도면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니까. 산 속에서 이렇게 깨끗한 물에 씻을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겨야지.”
노스트라드 공작으로서 제 의무를 방기하지 않았기에 어린 나이부터 전장으로 내몰렸다. 그곳에선 황태자도, 병사도 모두 하나의 말에 불과 했다. 로아크의 함정과 부친이 보낸 암살자들의 협공에 도피하느라 며칠간 우버 산맥을 헤매이며 굶은 적도 있었다. 씻는 건 당연히 사치였다.
“아으, 더 이상 못있겠다. 난 나갈래.”
물이 많이 차가운 것인지, 윤의 살결은 발갛게 변했다. 입술도 새파랗게 변한 윤이 이를 딱딱 부딪쳤다. 물속에 고개를 쳐박고 대강 머리카락을 문질러 핏덩어리를 떨어냈다. 세수를 한 뒤, 자신은 다 씻었다며 나가려는 윤의 손목을 아스탄이 잡아챘다.
“피를 제대로 닦아내지 않고 나갈 생각인가.”
“다 씻었는데?”
윤이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는다. 아스탄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씻을 수 있는 도구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뒤돌아서도록 해.”
윤은 씩 웃으며 냉큼 뒤돌아섰다. 사양않는 태도에 아스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솔라는 이대로 세정액을 건네주어도 되는 건지 망설였다. 황태자가 남의 수발을 들어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공작 전하께서도 불쾌히 여기지 않으시니 괜찮겠지.’
그렇게 되뇌었지만,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솔라가 고민하건 말건, 아스탄은 윤의 머리카락을 직접 감겨주기 시작했다.
“아야! 아스탄 내 머리 뽑혀!”
당연하게도 무척 서툴렀다. 엉킨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찔끔 눈물이 날 정도였다. 윤이 꽥! 소리를 질렀다.
“너 이거 화풀이지? 내가 말 안듣는다고 이참에 내 머리카락 잡아 뽑는 거지?”
“……네 머리카락이 엉망이라서 그런 거야. 실수가 아니다.”
두 사람이 붙어있을 듯 나란히 서있기 때문인지 뼛속까지 파고들던 차가운 물도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긴 손가락이 두피를 마사지하듯 문지른다. 기분 좋은 손길도 잠시, 묘한 감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귓전을 스쳤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야릇한 느낌에 윤이 어깨를 움칠 떨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스탄의 시선이 느껴진다. 어쩐지 목이 간질간질했다. 목덜미를, 등을 핥듯이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신경이 두피를, 그리고 목을 향해 곤두섰다. 벅벅 긁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누르며 윤은 어깨를 웅크렸다.
“……다 끝났다.”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고, 고마워!”
아쉬운 듯 아스탄의 손길이 떨어져나가자 윤은 물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차가운 물에 몸을 맡긴 채 올올히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욕탕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 건지 자신이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는 듯했다.
아스탄 역시 제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꽃이 피어오르던 것처럼 귓불과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벗은 등은 여전히 가냘팠다. 눈 앞의 청년이 단시간에 수십의 습격자를 학살한 검사라고 누가 믿을까. 검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달라붙어있는, 가느다란 뒷목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과 함께 성욕이 난폭하게 기지개를 폈다.
아마 자신의 뒤쪽에 시종만 없었더라도 그리 하였을지도 모른다. 본디 아스탄은 남의 시선에 익숙한 남자였다. 허나 윤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시종이라 할지라도.
아스탄이 멍하니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시종, 솔라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윤이 제 목숨을 도외시하며 살린 녀석이다. 솔라가 움칠 떨더니 고개를 조아린다.
“솔라 아이그너.”
자연스럽게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예, 전하.”
아스탄의 부름에 솔라가 부복해보였다.
“그대는 오늘 운이 좋은 사내였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을 터.”
“……알고 있나이다. 성심으로 하이어드 경을 모시겠나이다.”
솔라는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아니,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솔라.”
거품을 씻어낸 윤이 물 밖으로 빠져나오며 말했다.
“이제까지 날 도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어.”
“윤 님?”
뒤늦게 당황을 수습한 솔라는 망연한 표정으로 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