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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44화 (4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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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습격

“……어떡하지?”

마차 안에서 줄곧 서류를 보고 있던 아스탄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인 윤이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도룬 남작성을 빠져 나온 지 세 시간. 그는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좌절하길 반복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긴 하였으나, 자신과 엮이는 것이 그리 싫은가 싶어서 기분이 나빠졌다.

아스탄이 불쾌함을 숨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 그리 난감한가.”

“아스, 너는 괜찮아?”

“……아스탄이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무에 있지? 남색이 큰 허물도 아니지 않나.”

“그, 그게 아니라!”

아스탄의 태연한 반응에 윤이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어떤 부분에서 걱정하는지 아스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큰 허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 하고 있었으나 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답답한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다.

“너도 연인이 있을 거 아니야. 그 사람이 소문을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참, 그랬지.”

“너는 왜 그렇게 질색하는 거지? …일전 연인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걸릴 것도 없을텐데, 혹 마음에 품은 사람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아스탄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쥔 채 윤의 대답을 기다렸다. 혹여 긍정의 대답을 표한다면 자신은…. 아스탄은 제 감정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튀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도 모르는 이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사납고 난폭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제 무릎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윤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마주보았다. 아스탄은 여전히 나이답지 않게 서늘하니 무심한 얼굴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초조해 보이는 것은 왜 인가. 그저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떠오른 의문을 쉽게 흘려보냈다.

“없어.”

“정말인가?”

아스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되돌렸다.

“없다니까. ……난 혼자였어. 어쨌든, 중요한건 이게 아니야. 이 상황을 어떻게 하냐고-.”

“문제될 게 없지 않나. 나는 줄곧 말했다.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고.”

“칼솜씨가 탐난다는 거였잖아.”

속내를 감춘 진심을 윤은 단칼에 잘랐다. 네가 좋다는 고백으로 들렸지만, 윤은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아스탄과 같은 일국의 황태자가 무엇이 부족해서 같은 사내가 좋단 말인가. 여자만큼 아름다운 미소년도 아니었고, 괴물이나 다름없는 자신이다.

아스탄은 이전에 느꼈던 위화감과 비슷한 감각에 미간을 좁혔다. 눈앞의 청년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어긋나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정답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습격이다!”

밖에서 들리는 병장기 소리에 윤과 아스탄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르센이 멍한 얼굴로 말을 달렸다. 하이어드 경을 받아들이라는 게 정말 그런 뜻이었나? 머릿속이 헝클어진 털실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꼬이고 매듭이 졌는데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방인 검사를 노스트라드 공작이 아닌, 공비로 맞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제르센은 침울해졌다. 자신의 생각이 무리수가 아닐 것 같아서였다.

어느새 해가 서산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해가 짧은 북쪽의 겨울이다. 도룬 영지에서 지체했기 때문에 야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아들을 어린 나이에 북쪽으로 내쫓아주신 황제폐하의 은혜 덕분에 야숙은 이골이 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말을 달리면 야영지가 나타난다.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말을 모는 속도를 높이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제르센의 뺨을 긁고 지나갔다. 화살이었다. 바닥에 꽂히는 화살을 본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습격이다!”

“모두 대열을 정비하라!”

“전하를 보호하라!”

화살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방패를 들어 올리거나 검으로 쳐내며 화살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검을 들고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길-!”

스완은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리 강한 이들은 없었으나 그 수가 너무도 많았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은 탓에 단출한 수로 떠나온 공작의 일행이 상대하기엔 중과부적이다. 게다가 습격자는 공작의 마차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습격자의 의중을 깨달은 것인지 이스트민스트 공녀의 기사들과 황제의 기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쪽으로 오는 이들의 공격만 방어했다.

“빌어먹을!”

공작의 마차로 달려가던 복면인의 등을 내려치며 스완이 크게 욕설을 내뱉었다. 롭 이벨로크를 비롯한 기사들, 심지어 제르센이나 부상당한 에단 마저도 분발하였으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쏘아진 화살에 말이 쓰러지고, 스완은 크게 낙마하여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마차의 문을 앞에 둔 습격자는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황금은 내 것이다!’

의뢰인은 황태자의 목을 따면 무려 자신의 몸무게만큼의 금을 준다 하였다. 후환이 두렵기는 하였으나 걱정 없었다. 감히 황족의 암살을 의뢰한 자가 누구인지 모두들 짐작하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헌터가 이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흉수는 황제다. 황제가 미쳐서 제 자식을 죽이기 시작한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흉수가 마차를 향해 검을 내려치려던 순간, 문이 열리고 검푸르게 타오르는 검날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이것도 못 막아?”

검공, 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윤은 옆으로 고개를 두어 번 꺾었다. 가볍게 손목을 들리는 동작에서도 무시 못 할 중압감이 풍겨왔다. 빈틈 가득한 자세에도 습격자들은 감히 윤을 공격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가 얼마나 강자인지를.

“요즘 애들이 약해진 건지.”

윤은 혀를 쯧쯧 찼다. 아스탄을 보호하기 위해 마차 안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수세에 몰리자 행동에 나섰으나 한심하단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빨리 끝내자고.”

트리기토스를 가볍게 거머쥔 윤이 공격에 나섰다. 근처에 서 있는 흉수를 향해 노도와 같이 검을 찔러들었다. 그야말로 초식 동물의 무리 속에 풀어놓은 호랑이와도 같았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습격자들이 쓰러져나갔다. 단순하게 검을 움직이는 행동에도 지고한 묘리가 담겨 있었다.

“크아악!”

“괴물이다!”

“…레파토리는 백년이 지나도 비슷하네.”

윤이 혀를 쯧쯧 찼다.

“곤란해, 곤란해. 이러면 곤란하다고.”

나무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헌터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나타난 순간 상황은 반전되었다. 마치 사신이 추는 검무처럼 남자의 검로에 따라 죽음이 피어올랐다. 저자는 생포하라고 들었는데, 그전에 자신들이 모두 죽어버릴 듯 했다.

황태자를 지키듯 마차의 문 앞에 버티고 선 윤을 상대로 검을 휘둘러봤자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이방인 검사인가.’

예상치 못한 수에 헌터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을 들어 수신호를 내렸다. 겁을 먹은 이들이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할 때 반대쪽에서 또 다른 무리들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힘을 빼는 용도밖에 되지 않았다. 어차피 뒷골목의 잡배였다. 죽어나자빠져도 아쉽지 않았다.

본디 힘을 빼고 난 후 뒤처리로 붉은매 단이 나설 예정이었으나, 검은 머리 이방인으로 인해 계획이 모두 뭉개졌다. 어떻게든 황태자를 마차 밖으로 끌어내야한다. 석궁을 든 궁수부대들이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가 나오기만 한다면 화살꽂이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나도 가볼까?”

헌터는 잰 몸놀림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아크의 피가 반쯤 섞인 그는 강자를 보자 호승심이 끓어올라서 참을 수 없었다.

“어딜 감히!”

마차를 향해 달려드는 흉수들을 모두 베어 넘겼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윤을 공격해온다. 챙! 검기를 불어놓은 검은 다른 병장기들을 썩둑썩둑 잘라냈다.

두 번째 나타난 녀석들은 꽤나 강했다. 가끔 수세에 몰리는 동료가 있으면 석궁으로 견제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구른 세월이 저들의 나이보다 훨씬 많은 윤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다. 냉정한 눈으로 전황을 살핀 윤은 스완을 발견했다. 낙마한 충격으로 기절한 스완은 용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언제까지 멍청하게 있을 거야.”

바닥을 구르고 있는 스완의 목덜미를 잡아채 마차 쪽으로 집어던졌다. 낙마한 고통보다 윤에게 잡아 던져진 충격이 더욱 컸다. 정신을 차린 스완은 데굴데굴 굴러 마차의 밑으로 숨어들었다. 마차의 밑에 숨은 건 스완 뿐만이 아니었다. 윤은 재빨리 에단과 로릭도 마차를 향해 던졌다.

그 와중에 솔라는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이 개 같은 자식이!”

열 받은 용병이 솔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할 수 없다! 솔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지나온 삶이 마치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솔라는 아이그너 가문의 차남이었다. 제르센은 장남으로서 아이그너 가문의 후계자로서 길러졌다. 그리고 황태자의 가신이 되었다. 동생 에단은 제 꿈을 찾아 떠나버렸다.

솔라는 붕 뜬 아이였다. 제 형처럼 똑똑하지도 못했고, 막내 동생처럼 다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친은 늘 자신을 덜떨어지고 모자란 아이로 보았다. 솔라도 이견이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이 그다지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늘 허무했기 때문에 말초적인 재미를 찾아서 살아왔다. 근래 들어 그나마 재미있었던 건 차 대륙 출신의 이방인 검사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것도 끝이군.’

죽음은 무서운 동시에 무섭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슬며시 한쪽 눈을 뜨자 이마에 낯익은 검이 박힌 습격자가 눈을 부릅뜬 채 굳어있었다.

“나이스샷.”

검을 집어던져서 습격자를 처리한 윤이 그 와중에도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솔라는 놀랐다. 윤이 자신을 구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솔라 아이그너!”

“네, 네!”

“이 멍청아! 굳어서 뭐하는 거야? 내 검을 당장 들고 와!”

윤은 빈손이었다. 난전의 상황에서 제 목숨을 도외시하고 자신을 구했다. 가슴 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빨리!”

감동도 잠시 솔라는 낑낑거리며 습격자의 머리에서 검을 뽑으려 애썼다. 허나 뼈에 깊숙이 박힌 탓에 쉽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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