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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누명.
센트리움을 중심으로 암약하는 붉은매 단은 순수 그란디아 인이 아닌 로아크의 야만인이나 사막 유목민의 피가 섞인 혼혈아들이 단의 주요 구성원이다. 그들의 유래는 자신들이 배척받자 뭉치기 시작함이 그 시초다. 핍박받은 분노를 터뜨리기라도 하듯 잔인한 수단과 방법으로 그 세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세력을 넓힌 지금은 센트리움의 뒷골목에서 범죄 조직의 거두로 악명을 떨쳐왔다.
붉은매 단은 종종 ‘높으신 분’의 의뢰를 받아 암살을 자행하였는데 그 수법이 잔악하기 그지없었다. 시신을 온전히 남기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놓아서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를 샀다. 은밀함보다는 원한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싶은 이들만이 붉은매 단에 의뢰를 해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재수 없는 손님이 오기 마련인데.’
창밖으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관의 심부름꾼들이 서둘러 홍등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우중충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회가 동하는 고객들이 더 많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붉은매 단장, 헌터는 창밖을 구경하며 나이프를 던졌다가 받으며 시간을 죽였다.
“이곳이 붉은매 단의 본부인가? 생각보다 허름하군.”
헌터의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삐거덕거리는 나무문이 거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검은 우장을 뒤집어쓴 남자 다섯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자 좁은 방이 가득 찼다. 헌터는 눈알을 굴려서 은밀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저들의 우두머리는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이고, 시종으로 보이는 묵직한 주머니를 든 남자가 하나, 기사가 셋이다. 귀족들은 상대하기 싫은데, 골치 아픈 손님이 왔군. 헌터는 욕을 중얼중얼했다.
“……의뢰?”
“그렇다.”
귀족임을 알고 있으나 헌터는 여전히 껄렁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상태였다. 우두머리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는다.
높으신 분인 건 분명한데. 자신의 태도를 트집 잡지 않는다. 마음이 넓은 건지,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는 건지.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헌터의 감은 계속 찝찝하다고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남자를 지키고 서 있는 기사들에게선 아무런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헌터의 무례한 행동에 백이면 백, 자신의 주인을 무시하느냐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게 되어있는데 저들은 달랐다. 마치 인형같이 그저 서 있을 뿐이다.
헌터는 자신의 콧잔등을 쓱쓱 긁었다.
“저쪽에 앉으슈.”
가죽이 군데군데 터져 제 속살을 내보이는 소파를 가리키자 검은 후드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그래도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녀? 차라도 한잔 드릴까?”
“손님 접대가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
남자가 킬킬 웃었다.
“그리고 겁이 없어.”
“그런 거 가지고 살면 제명에 못 죽는 법이라.”
공중으로 던졌던 나이프를 받으며 헌터는 슬며시 손에 힘을 주었다.
“…의뢰를 하겠다.”
남자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시종이 거대한 자루를 내밀었다. 떨어트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자루가 벌어지며 눈부신 황금과 보석이 굴러 나왔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천하의 헌터마저도 움찔할 정도다.
“목표는?”
“그란디아의 황태자.”
“말도 안 돼!”
헌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태자의 암살 의뢰라니! 말도 안 된다. 절대 맡을 수 없었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뒷감당을 누가 책임지란 말인가. 헌터는 자신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의뢰를 받을 수 없었다.
“설마 이제껏 그 많은 죄를 저질러 놓고서, 고작 애송이 숨통 하나 끊어놓는 게 안 된다고 이야기하진 않겠지?”
줄곧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가 그것을 벗었다. 황가의 상징과도 같은 눈부신 금발이 쏟아져 내린다. 남자는 비에 젖은 금발을 쓸어 넘겼다. 얼굴은 무척 초췌하였으나 번뜩이는 눈이 헌터를 꿰뚫어보고 있다.
“……황제.”
헌터가 신음했다.
**
도룬 남작성. 범행의 용의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금족령이 내려졌다. 덕분에 제도를 향하기 위한 일정은 상당히 지체된 상태였다. 도룬에서 하룻밤을 더 묵어갈지도 모르는 터라 도룬 남작 부인은 바쁘게 움직였다. 손님방을 재정비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등, 갑작스러운 준비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스타시온 공작 일행은 범인일 수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한 점 불편함 없이 접대해야 하는 손님이다. 하인들은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일거리에 바삐 뛰어다녔다. 그들은 모두 죽어 나자빠진 도룬 남작을 욕하였다. 슬퍼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스탄은 우선 남작성에 묵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의술사를 불러 도룬 남작의 사인(死因)을 정확히 밝히도록 지시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남작의 방에서 땀으로 목욕한 의술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척 베스파뇰과 롭 이벨로크, 도룬 남작의 시종장이 따라 나왔다. 의술사의 매수, 혹은 증거 인멸 등의 불미스러운 상황을 서로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끝났는가?”
아스탄의 하문에 의술사가 오체투지라도 할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그럼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오찬장에 모인 귀족들의 앞에선 의술사 막심은 흡사 졸도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영주 도룬 남작이 죽었다는 것만 해도 당황스러운데, 황태자 일행이 범인으로 의심받는 상황이라니! 자칫 잘못 대답했다가는 큰 경을 칠거란 생각에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대강 밝혀냈는가? 도룬 남작의 시신은 노스트라드로 옮겨서 다시 검시할 예정이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하라.”
“……위에 남은 음식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볼 때, 도룬 남작이 사망한 시각은 만찬 후 약 두 시간쯤으로 사료됩니다.”
아스탄의 하문에 막심은 목이 졸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확실한가?”
“예, 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저, 저는 이곳에 오기 전 센트리움에서 검시(檢屍)의 업무를 조, 조금 했습지요.”
아스탄은 도룬 남작 부인이 정성을 다한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식사하지 않는 사람은 아스탄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와인으로 목을 축이거나, 테이블 밑에 손을 내린 채 식사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있었다. 덕분에 요리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때 각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야기한다면 그 증명으로 충분하겠는가?”
“……예.”
도룬 남작 부인이 테이블 밑으로 내린 자신의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의 일행 중 범인이 있고, 그를 잡아낼 수 있을 거라 크게 기대치 않았다. 만약 범인이 나온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충분하다. 그저 발목을 잡길 원하였다. 어떻게든 이방인을 옭아매어 그더러 책임을 지라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남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 시각, 이방인 기사는 자신의 방에 없었음이 분명하였다. 왜냐면 그 시간, 자신의 딸이 그에게 ‘대화’를 청했고, 자리를 비웠단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남작 부인의 매서운 시선에 이방인의 뒤에 선 갈색 머리 시종, 솔라에게 향했다. 중한 일로 자리를 비웠다고 이리저리 내빼는 모습에 이를 갈았으나 지금은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진실이 어떻든 추궁할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다. 시종도 방에 놔둔 채 그가 향했을 곳은 많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밝히지 못한다면 오명을 벗기 힘들리라. 중요한 사람이라 핑계를 대었으나 이방인이 야심한 시각에 누구를 만난단 말인가. 어디 연무장에 박혀서 훈련이나 하였겠지. 그것도 증명하지 못하면 그만이다. 남작 부인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럼 본인부터 밝히도록 하지. 만찬 후 본인은 잠깐 서류를 본 후 휴식을 취하였다. 그때 도룬 남작가에서 준비한 시종이 목욕 시중을 든다 하였다가 거절당했으니 잘 알 것이다.”
아스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대답한 것은 애비가일이다.
“소녀 역시 만찬 후 몸단장을 하였어요. 그때 뜨거운 물을 나른 하녀들이 있었고 샤프롱인 디스그렌 백작 부인도 함께 있었지요.”
그와 동시에 차례대로 자신의 행적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귀한 손님인 아스탄과 애비가일, 윤을 제외하면 여럿이서 한방을 썼기 때문에 행적을 증명하기 용이하였다. 마지막으로 윤의 차례가 되었다.
“하이어드 경께서는 어디를 가셨는지요?”
“저는…….”
“그 시각, 당신이 자리를 비우셨음은 경의 시종께 직접 들은 사실이랍니다.”
솔라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윤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부러 포도주 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시간을 끌었다.
윤이 범인이 아님은 남작부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라면 몰라도, 이방인이 자신의 남편을 죽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제 행적을 명명백백히 밝혀내지 못한다면 기사의 명예는 더럽혀질 것이다. 명예 회복을 구실로 자신의 딸과 혼인을 제안할 속셈이었다.
남작 부인이 계산치 못한 사항이 있었으니 바로 애비가일이다. 자유롭게 연애하다가 혼인 후엔 후계자를 낳을 때까지 자중하는 행동이 최근의 풍토라지만 북부는 보수적인 곳이었다. 미혼 여성이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남자를 끌어들일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제도라 하더라도 큰 구설수에 오를 몸가짐이다. 그래서 솔라는 공녀가 윤을 절실하게 원함을 알 수 있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윤님.’
솔라는 흥미로 반짝이는 눈을 했다. 윤이 사실을 밝힌다면 차기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제 딸이 원하는 남자를 짝지어준다고 공언했다. 게다가 윤은 이십대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다. 그런 인재를 놓친다면 바보였다.
“저는…….”
윤은 머뭇거렸다. 아스탄은 자신의 입으로 목욕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고 하였다. 애비가일은…. 자신을 응시하는 애비가일의 적갈색 눈이 불길한 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먹이가 굴러 떨어지길 기다리는 구렁이 같았다. 입을 쩍 벌린 채, 윤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다. 소름이 움칠 돋았다. 공녀에 대해선 절대 언급해선 안 된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하시죠. 하이어드 경?”
도룬 남작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녀의 얼굴엔 의기양양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대답을 못 함은 당연하다. 하이어드 경은 본공과 함께 있었으니까.”
연회장엔 침묵이 흘렀다. 아스탄은 자신이 한 말의 파급력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우아한 자세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씹어 삼켰다. 준비된 와인으로 살짝 목을 축인 후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스탄의 신분이 지고한 황태자인지라 차마 재촉도 하지 못하고 애타게 그가 이어 말하길 기다렸다. 모든 것이 의도된 행동이다. 느긋한 기다림을 참지 못한 도룬 남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휴식을 취하셨다고…!”
“본인의 말을 부정하는 건가? ……휴식은 꼭 혼자서만 취해야하는 건 아니지.”
아스탄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에게 다가갔다. 연회장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아스탄을 따라 움직였다. 윤의 어깨를 지그시 끌어안은 후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여인의 것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귓전을 스쳤다. 사락, 마치 정오의 태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눈부신 백금발이 윤의 검은 머리카락에 섞여들었다.
지난 밤, 목욕탕에서의 일을 상기시키듯 은밀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윤의 얼굴이 새빨간 빛으로 변했다.
“본인이 왜 시중을 물렸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은 아스탄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 단번에 깨달았다. 동시에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하면서도 끈적끈적한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부끄럼이 많은 도룬 남작 영애의 두 뺨이 확 달아올랐다.
“…하이어드 경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내거든.”
윤은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아스탄을 마주보았다. 노을과도 같은 빛깔의 눈동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아스탄이 은밀한 목소리로 윤의 귀에 속삭였다.
‘박자를 맞춰.’
단순히 속삭이는 행동에도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마디가 길고 유려한 손이 윤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척추에서부터 야릇한 소름이 돋아 올라서 윤은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살갗이 가려운 것처럼 낯설고 묘한 감각에 등을 움찔거렸다.
쇄골 가에 닿은 손가락이 튜닉의 목 부분을 쓸어 넘기자 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헉! 누가 내뱉었는지 모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제, 제가 전하의 방에 찾아갔다는 건 남작성의 하인이 증명해줄 겁니다. 그에게 방을 가르쳐달라 했으니까요.”
윤은 아스탄과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이미 늦었다. 간신히 말을 이은 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생김새를 기억하나?”
“대충…….”
“그자의 모습을 도룬 남작 부인에게 얘기하면 그대의 행적이 드러나겠지. 그렇지 않소, 남작부인?”
아스탄은 명쾌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윤의 어깨를 살짝 쓸었다가 제 자리로 돌아가며 가볍게 제 손에 남은 감각을 음미하였다. 손바닥 안에 뜨겁게 감기던 체온에 피가 확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연회장이 아니었더라면, 밀폐된 방이었더라면, 이리 쉽게 놓아줄 수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어느새 욕심을 채워버리고 말았다.
의자에 앉는 아스탄을 쏘아보는 시선이 있었다. 애비가일이었다. 먹이를 빼앗긴 암사자 같이 사나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나서지 않았더라면 엉뚱한 자에게 빼앗길 뻔 했군.’
동시에 의아해졌다. 친하지는 않다하나 피를 나눈 사촌. 아스탄은 애비가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남자들을 깔아보며 제 발밑에 두길 즐겨하는 여자다. 윤에게 집착하는 모습은 그녀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애비가일을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스탄은 속내를 감춘 서늘한 얼굴로 도룬 남작부인을 돌아보았다.
“본공의 일행에게 더 궁금한 것이 있는가?”
“어, 없습니다.”
도룬 남작 부인은 황망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룬 남작의 사인은 독살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녀의 술법이지. 그렇지 않나 애비가일?”
아스탄은 자신의 사촌 여동생, 애비가일에게 시선을 주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비가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미소 짓는 붉은 입술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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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