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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누명.
황제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기대어 앉아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광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월스턴의 피를 이은 모든 이들이 증오스럽다! 파괴적인 갈망은 제 자식들을, 그리고 본인을 향하고 있었다. 크라이슬러의 피가 이어진 이들을 모두 죽인 후 마지막으로 칼끝이 향할 곳은 자신이라는 것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상관없는 일이다.
황가의 피를 이어 매력적으로 잘생긴 얼굴은 형편없이 망가진 지 오래였다. 눈 밑이 검게 그늘지고, 입술은 하얗게 갈라져서 일어났다. 손톱을 세워 얼굴을 긁어내리자 붉은 실선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지나치게 힘을 사용한 탓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남자를 엄습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제는 집무실의 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거칠게 걷어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천이 사정없이 찢어져나갔다. 가려져있던 초상화가 드러났다. 남자는 초상화 속의 청년을 응시하였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뛰쳐나올 것 같은 생생한 생동감이 있었으나 그림일 뿐이다.
“네가 다시 돌아왔어.”
남자는 청년의 얼굴을 애무하듯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림 속 청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ㄴ.”
남자가 킬킬 웃었다.
“네가-…. 네가 증오스러워….”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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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었다. 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더니 온몸의 근육이 삐거덕 거리는 것 같아 누운 채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저 멀리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우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오는 걸로 보아 이쪽으로 그 소식이 전해지는 게 머지않은 듯했다. 아침부터 이리 소란스럽다니 무슨 일이지. 게다가 손님이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없는 체 하는 법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셨습니까.”
솔라는 캐노피를 걷고 나오는 윤에게 민트를 띄운 물 잔을 내밀었다. 단숨에 들이켠 윤이 솔라를 돌아보았다.
“솔라.”
“시키실 것이 있으십니까?”
윤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제 밤, 솔라는 제가 간섭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현실에 적응하느라 그란디아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잊어버린 자신의 실책도 문제지만, 솔라 또한 잘못을 범했다. 그 시간에 공녀의 샤프롱이 불러낸 이유를 눈치 채었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밤 보내십시오, 라니. 명백히 자신의 등을 떠미는 행동이었다.
제 딴에는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애비가일의 위치는 그란디아의 미혼 영식이라면 누구라도 탐을 낼만한 자리였으니까. 허나 방법이 나빴다. 적어도 윤의 의중을 먼저 확인했어야 옳았다. 브릭의 자손이라고 반가운 마음에 너무 많이 봐준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솔라에게 할 말을 입안에서 굴리던 윤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신의 사람이 아니다. 제도행이 끝난 후 내치면 그만이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솔라는 의아한 듯 “아니요-.” 하고 대답하려다가 “아!”하고 제 주먹과 손바닥을 마주쳤다.
“윤님께서 방을 나가신 직후 도룬 남작 영애의 유모가 찾아왔었습니다.”
“……남작 영애의 유모가?”
솔라의 시중을 받아 세안을 한 윤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용건은 무엇이지?”
“잠시 대화를 청하셨습니다.”
윤의 입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이쪽도 그런 용건이었나. 골이 아프게 되었군.
하필이면 애비가일이 불러서 자리를 비웠을 때 도룬 남작 영애도 찾아오다니. 소문이 이상하게 날까 신경 쓰였다. 그리고 황당했다. 아스탄이 아닌 자신이 타겟이라니. 위치 선정이 심히 잘못되었다. 늘 월스턴의 뒤에 가려져있던 터라 이런 상황이 신선하게 느껴지긴 했다. 이와 별개로 윤의 곤란은 쉬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어라고 대답했지?”
“잠깐 자리를 비우셨노라고, 돌아오시는 대로 전하겠다고 알렸습니다.”
“순순히 가던가?”
“물론 아니었지요.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는 걸 중요한 분을 만나느라 늦어질 수 있음을 알리니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방을 떠나기 전까지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혹 윤님께 누군가 왔습니까?”
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혼자 방에 있을 때도 누군가 방문하지 않았으니 도룬 남작 영애가 포기했나보다.
‘하긴 그럴만한 용기를 지닌 것 같진 않았지.’
희미하게 기억에 남은 영애의 소심한 얼굴을 떠올리며 윤은 생각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도록 하지.”
“예.”
솔라는 소매가 긴 튜닉을 가져왔다. 윤이 옷을 입는 걸 도우면서 오늘의 일정을 간략하게 안내했다. 도룬 남작과 조찬 후 다시 제도로 향할 예정이기 때문에 간편한 행장이었다. 튜닉 위엔 벨트를 두르고, 트리기토스를 찼다.
“이제 슬슬 조찬을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하인이 방문하지 않는 군요.”
“그러게.”
공작 일행은 조찬을 마친 후 곧장 도룬을 떠날 예정이었다. 귀족들이 원래 게으른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미리 떠날 시간을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그것을 지체하다니. 이건 크나큰 결례였다. 솔라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윤은 밖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여행을 떠나기 위한 활기참이 아닌, 무언가 일이 터진 듯 불안한 공기가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솔라를 내보내서 밖의 사정을 살필까.’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솔라는 잠깐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문 밖으로 나갔다. 소곤소곤 이어지는 말소리. 방으로 돌아온 솔라의 얼굴은 역력히 굳어있었다.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서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소리로 윤에게 보고했다.
“……도룬 남작이 살해당했다 합니다.”
영주성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도룬 남작 부인과 그의 자녀들, 공작의 일행은 모두 남작의 방으로 모였다.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다들 황망한 표정이었다. 현장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남작의 방은 아침에 시종이 발견했던 그대로 놓아둔 상태였다. 고인의 예로써 남작의 시신 위에만 흰 천을 덮었다.
“천을 걷도록 하여라.”
아스탄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시종은 바들바들 떨며 천을 걷었다.
도룬 남작의 모습은 독살로 죽은 이의 것과 같았다. 낯빛이 검게 변색된 상태로 눈은 위쪽으로 돌아가 있다. 드러난 흰자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죽기 직전까지 상당한 고통을 느낀 듯 얼굴이 일그러졌고 입술 또한 크게 벌어진 상태다. 손은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전날 저녁, 만찬장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영주였다. 좋은 영주라 할 수는 없었으나, 겁이 많고 멍청한 위인이라 적을 만들고 다니는 유형도 아니라 들었다.
‘원한을 살만한 곳이라곤….’
윤은 잠시 아스탄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아스탄이 멍청이도 아니고 이런 시기에 암살을 도모할 리가 없지 않은가.
황제의 손발이라 할 수 있는 척 베스파뇰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저쪽도 살해의 동기는 없다. 도룬 남작은 황제파의 돈줄이라 할 수 있는 귀족이다.
“보고하라.”
아스탄은 최초의 발견자를 돌아보았다. 도룬 남작의 근위 시종이었다.
“오, 오늘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남작께선 늘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편인데, 오늘은 종을 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방으로 들어갔더니,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셨습니다.”
시종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중간 중간 이마에 괸 땀을 훔쳐내며 한숨을 내쉬는 등 말을 끊기기는 하였으나 거짓을 고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밤 동안 도개교를 올리기 때문에 아무도 이 성을 드나들지 못합니다. 범인은 이 성에 있던 자가 틀림없어요!”
남작부인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남편이 죽었음에도 완벽하게 치장을 끝마친 상태였다. 남작부인에게서 남편이 죽은 슬픔은 찾을 수 없었다.
눈엣가시로 여기던 남편이 죽었다. 그것도 살해당한 모습이다. 범인을 밝혀내야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려다 그만두었다. 정성껏 바른 입술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황태자 일행이 범인이 아니라면, 혐의는 당연하게 도룬 남작 일가로 쏠리게 된다. 자칫 아비를 죽인 아들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쓸 위기에 그녀는 결국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편이 죽은 것은 전혀 슬프지 않았으나 제 아들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자 짜증이 치민 탓이다.
어차피 황태자의 편은 되지 못한다. 황제에게 빌붙어있으려면 아스탄의 이름에 먹물이라도 끼얹어야했다. 남작부인은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평소와 달랐던 건 공작 전하의 일행이 영주성에 추가되었다는 것뿐입니다.”
남작부인이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 채 아스탄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가 흉수라도 되는 양 사나운 시선이었다.
“렉스 그랑드의 지킴이께 요청합니다. 제 남편은 누군가의 위협에 살해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범인을 명명백백히 밝혀주시옵소서!”
“받아들이겠다.”
아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부인의 얼굴이 환해짐도 잠시, 아스탄이 이어하는 말에 제 표정을 간수하지 못했다.
“허나 우리는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제도로 향하는 몸. 갈 길이 바쁘다. 그러니 수하를 보내서 정식으로 확인하겠노라.”
“……전하의 일행 중 여기에 범인이 있다 하여도요?”
“본공을 범인이라 생각하는 건가?”
말실수를 깨달은 남작부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노골적으로 황태자를 범인으로 몰고 가고 있었고, 아스탄은 그 점을 짚어 역공을 했다.
남작부인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나이다. 그저 저는 이 사건을 한 점 의혹 없이 낱낱이 밝히고 싶음을 원할 뿐입니다.”
“도개교가 올라가면 아무도 오가지 못한 다 하였지. 그 말은 이 성안에 있는 모두가 범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한다면 본인이 범인이 될 수 있지. 허면 그대도, 그대의 자식들도 흉수가 될 수 있단 뜻이다.”
“……저희는 범인이 아닙니다!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자식이 되어 아비를 해한단 말입니까.”
호기롭게 끼어든 도룬 남작 영식이 아스탄의 서늘한 시선과 마주했다. 나이차도 얼마 나지 않건만 비교도 되지 않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 기세에 절로 위축된 영식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살인은 가장 중한 죄 중 하나. 렉스 그랑드의 지킴이로서 결백함을 증명하겠다. 본인의 일행이 전날 밤 무엇을 하였는지 명명백백히 밝힌 후 이곳을 떠나도록 하지. 그것으로 만족하나?”
“……예.”
남작 부인은 제 두 손을 맞잡았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뗬다. 공작의 일행 중 그 행적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지 않던가. 그녀의 시선이 윤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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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