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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누명.
6장, 누명.
도룬 영지로 접어든 마차가 영주성 앞에 도착했다. 그 사이 순찰을 도는 병사나 기사의 모습은 전연 발견하지 못했다. 도룬 영주성은 영지민들을 전혀 보호하지 않고, 단지 영주 일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어진 듯 보였다. 구식으로 축조된 요새는 성 주변으로 땅을 파서 깊은 강을 만들었었고, 도개교를 내리지 않으면 누구도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문을 열어라! 우린 노스트라드 공작 전하의 일행이다!”
롭 이벨로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성문의 앞에서 외쳤다. 그와 동시에, 드르륵 소리와 함께 도개교가 내려졌다. 마차가 안으로 들어서자 도개교가 올라가며 외부로 나가는 길을 차단한다.
마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도룬 남작으로 보이는 이가 손을 비비며 이쪽으로 다가선다. 도룬 남작은 자그마한 체구에 생쥐를 떠올리게 하는 잿빛 머리칼과 눈동자, 본인은 멋들어지다고 생각하겠으나 다른 사람이 보기엔 간사함의 상징 같은 콧수염의 중년 사내였다. 간신배를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이런 외모가 아닐까. 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신 아돌프 디어 도룬, 제국의 검,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황가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도룬 남작은 극상의 예를 표하며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숙여보였다. 조심스레 미소 짓는 표정마저도 얍삽했다.
아스탄은 무심한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도룬 남작의 눈동자에서 붉은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 검공의 후예는 어느 분이신지요?”
콧수염을 씰룩거리던 도룬 남작이 검공의 후예 윤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도룬 남작의 얼굴이 환해지며 누군가의 앞에 가서 선다.
“아…! 당신께서 하이어드 경이십니까?”
도룬 남작은 롭 이벨로크에게 기사의 인사를 청했다.
“참으로 우직한 덩치를 가지고 계십니다! 역시 젊은 나이…… 에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가 되신 게 아니군요!”
“…….”
“…허어.”
모두가 침묵했다.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도룬 남작이 롭 이벨로크에게 손바닥을 비비적거리는 꼴을 지켜보았다. 아스탄 바로 옆에 윤이 서 있었다. 건장한 아스탄에게 가려져서 그가 잘 보이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단단히 헛다리를 짚었다.
롭 이벨로크는 전형적인 제국 북부인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억센 이목구비와 거대한 덩치, 그리고 햇볕에 그을렸다 하나 북부의 만년설처럼 창백한 피부는 차 대륙인이라 착각을 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롭의 나이 30대 후반, 아무리 노안이라 하더라도 스물두 살로 봐줄 순 없었다.
‘검공의 후예가 아벨라르 대륙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숙지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심지어 척 베스파뇰 조차 남작의 한심한 꼴에 입술을 꿈틀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객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와 있던 도룬 남작 부인마저도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남편을 외면하였다.
척 베스파뇰은 꿈틀거리는 입술을 사려 물었다. 한심하고 우스워서였다. 자신의 실수에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침이 튀도록 호령하던 사내는 도망가고 없었다. 문득 도룬 남작이 이정도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생각은 뇌리 한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참으로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분이시군요. 튼튼한 체격에 매서운 눈빛이라니! 로아크의 야만인들이 벌벌 떨겠습니다!”
도룬 남작이 롭 이벨로크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후일 롭이 말하기를 자신의 손발이 오그라들어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하였다. 스완 역시 “아휴,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줄 알았지 말입니다.”하고 제 팔을 벅벅 긁었다.
“흥.”
질 좋은 철광석이 나는 광산을 보유하고 있어 부유한 영지의 남작임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꼬락서니에 애비가일은 노골적인 조소를 얼굴에 띄웠다. 자신의 백부가 저자를 중용하는 건 쓰다가 버려도 별 아쉬울 게 없어서다. 멸시의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않는 애비가일의 행동에 남작 부인의 낯에 좌절의 그림자가 스쳤다.
“도룬 남작, 나는 회색 늑대 기사단장 롭 이벨로크라 하오. 검공의 후예, 하이어드 경은 이쪽이지.”
보다 못한 롭이 윤을 가리키며 말했다. 쥐방울만한 도룬 남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윤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하하하, 참으로 화사하신 공자분이어서 검공의 후예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처럼 앳된 미공자를 그 누가 험악한 기사라 착각할까요. 제도로 가면 많은 영애들이 경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표하겠지요.”
입을 열면 열수록 점입가경이다. 롭의 거대한 덩치를 찬양할 때는 언제고 험악하다고 헐뜯는 모습에 결국 도룬 남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윈디아께서 노하셨는지 바람이 춥답니다.”
저녁은 도룬 남작이 야심차게 준비한 연회장에서 만찬이 이루어졌다. 철광석의 산지로 부유한 영지답게 최근 유행하는 로카이유 양식으로 방을 꾸몄다. 화려하고 복잡한 양각으로 돋을새김 하는 것이 로카이유 양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과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사치스러움이 지나쳐 천박한 모양새가 졸부와도 같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건 도룬성의 호스트인 도룬 남작이고, 손님이 앉는 가장 상석엔 노스트라드 공작 아스탄,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 윤의 순서로 앉았다. 그 다음 자리는 적당히 신분에 맞춰서 앉았다.
맞은편의 가족석엔 도룬 남작 부인, 그리고 도룬 남작의 두 자녀가 자리 잡았다. 도룬 남작 부인은 제법 미인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두 남매는 모두 도룬 남작을 빼닮았다. 윤을 비롯한 사람들은 핏줄의 장난질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 귀한 객들이 도룬을 방문해주셨으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부디 준비한 만찬을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도룬 남작이 포도주 잔을 들어 올리며 읊은 인사의 말로 만찬을 시작하였다.
조개 관자로 만든 전채요리부터 시작해서 향신료를 듬뿍 곁들인 메추리구이까지, 제법 신경 쓴 태가 나는 요리들이었다.
“공녀, 혹 입에 맞지 않는 것이라도 있으신지…?”
눈치 없는 도룬 남작이 애비가일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만찬 자리에선 아무리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도 반 정도는 먹는 것이 예의다. 그러나 애비가일은 그런 예법을 무시한 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나름 솜씨 있는 요리사를 섭외하였으나 좋은 것에 길들여진 그녀에겐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도룬 남작부인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남작 부인은 애비가일이 자신의 영지를 들른다는 소식에 필사적으로 준비를 하였다. 조만간 딸의 데뷔탕트를 위해 제도로 가야하는 남작 부인은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공녀의 행동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치와 사교계는 전혀 다른 형태의 전장이다. 지방 귀족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센트리움에서 데뷔탕트를 치렀을 때 얼마나 무시당했던가. 자신의 딸은 설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여독에 입맛이 없을 뿐입니다. 훌륭한 식사였어요.”
애비가일이 입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눈을 내리깐 표정으론 그게 아니라 말하고 있었으나 표면적인 겉치레에도 도룬 남작은 과장되게 안심하며 껄껄 웃었다.
“저는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렇다면 푹 쉬어야지요. 하하하.”
식사가 끝나지 않았건만 먼저 일어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애비가일의 무례한 행동에도 도룬 남작은 하하 웃었다.
그에 비해 남작 부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돌려서 행동하는 것도 아닌, 대놓고 주는 면박에 그녀의 손은 수치심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자신의 딸을 한번 쳐다보았다. 딸 역시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한숨이 나올 만치 매력적인 황태자나 차 대륙인 기사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고, 공녀가 조각조각난 자존심을 뭉갰다. 아마 방에 돌아가면 울고불고 난리날 것이다.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남작 부인의 목표에는 이스트민스트 공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윤도 있었다. 조만간 봄이 오며 사교 시즌이 시작될 때, 연회에서 에스코트 약속을 받아내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황태자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으니 이방인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멍청한 남편이 롭 이벨로크란 기사와 착각하며 모두 망쳤다.
남작 부인은 애비가일이 손도 제대로 대지 않은 메추리구이를 거칠게 씹었다. 고기가 공녀와 남편이라도 되는 양.
문득, 그녀는 남편이 제도에서 돌아오고 난 후 이상해졌단 생각을 하였다. 평소에도 멍청한 작자라 경멸하긴 하였다. 허나 지금은 단순한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인형 같지 않은가. 멍청이를 더 멍청이로 만드는 마법 같은 건 없었기에 망상을 그만두었다.
“그럼, 평온한 밤 보내시어요.”
애비가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에게 눈길을 한 번 주었다.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상처 난 자존심에 소금이 들여 부어졌다.
기실 그녀가 불쾌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지고 싶은 보석을 가지지 못하자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짜증이 난 탓이다.
노스트라드에서 도룬으로 오는 내내 애비가일의 마차에 방문할 생각도 않은 윤의 모습에 애가 탔다. 마치 노스트라드 공작의 마차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 마냥 그곳에만 계속 머물렀다. 샤프롱인 디스그렌 백작부인은 채신없다며 애비가일을 질책해서 짜증은 두 배로 일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애비가일은 복도의 창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저가 보아도 황홀하리만치 아름답다. 미모로도 부족해 재력에 권력, 훌륭한 혈통까지 가지고 있다. 이정도면 최상품이다. 귀족들이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고 생각해보았을 때, 자신 같은 여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윤이라는 작자는 제게 관심을 표하지 않는 건 지 알 수 없었다.
본시 남자들이란 겉모습에 혹하는 한심한 존재 아니던가. 생각 같아서는 발을 쿵쿵 구르며 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애비가일은 짜증을 억누르며 미끄러지듯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 작품 후기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못찾았지만 열심히 복구해나가고 있어요!
저번 화를 보고 많은 질문을 주셨지만 차마 뒷내용을 알려드리는 거라 답변해드릴 수 없는 저의 심정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ㅠ_ㅠ
그래도 오늘도 일일연재! 비록 평소 오던 시간보다는 늦었지만, 오늘 안에 왔으니까요 ^^ (뻔뻔)
이 소설을 읽어주신 모든 분과 쪼그마이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