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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37화 (3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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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약조.

“지금은 빈민구제책보다 더 시급한 게 있다. 우선 이쪽으로 들어오도록 해.”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탄이 집무실에 딸린 방을 가리켰다. 방으로 향하는 윤을 향해 제르센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눈 밑이 무척 검었고, 음울한 기색이 먹구름처럼 끼어있다. 윤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제르센 경.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소리는 또한 다 죽어가고 있었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 더 캐묻기도 무엇해서 윤은 그저 힘내라는 듯 제르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고. 제르센 경. 다 잘 될 거야.”

“……네, 그렇겠지요.”

제르센은 더욱 우울해졌다.

윤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아스탄은 문을 닫았다. 암중에 존재하는 수신호위를 제외하곤 누구도 방에 들이지 않았다.

“일단 앉도록 하지.”

“응.”

윤이 자리에 앉자마자 아스탄이 본론을 꺼냈다.

“황제가 호출한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나흘 후 이스트민스트 공녀와 함께 제도로 향하게 될 거다.”

“위험하지 않을까? 그쪽에서 돌변하면 어떡해.”

윤은 이스트민스트 공녀와 함께 온 황제의 수신호위들이 암살자로 나설 수 있다고 예상했다. 돌변해서 습격한다 해도, 이미 죽은 후엔 항거할 수 없다. 아스탄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비가일이 강짜를 부렸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긴 하지.”

“이번 여정에서 황제가 허락한 이들은 단 열 명. 그 이상의 숫자는 안보문제로 허락하지 못하겠다하더군. 나머지 수하들은 이후 천천히 제도로 들어올 계획이다.”

“위험해.”

아스탄을 제외하면 아홉 명이다. 시종을 포함하면 싸울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반드시 제도로 오는 길에 아스탄을 죽이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느껴졌다.

“황제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어.”

“널 죽이겠단 의지가 충만하시구나. 네 아버지께선.”

아스탄이 피식 웃으며 긍정했다.

윤은 심각한 얼굴로 거리를 계산했다. 노스트라드에서 센트리움까지 약 1000카타르(킬로미터). 마차로 움직인다면 나흘에 달하는 긴 여정이다. 최소 한두 번의 습격은 각오해야할 것이다. 물론 아스탄과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 다른 일행들이 문제다.

아스탄은 대답 대신 서가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반듯하게 접혀있던 것을 펼치자 성인 남성의 키만큼 커졌다. 아벨라르 대륙의 전도였다. 가지고 있는 것조차 역천의 죄가 되는 귀물로 4대 공작에게만 주어졌다. 행정과 군역을 담당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보여주게 되어 있었으나 아스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이 노스트라드.”

아스탄은 손을 들어 북부를 가리켰다. 필기체로 노스트라드라 적혀있다. 윤의 시선이 빠르게 지도를 훑었다. 도룬, 반 무어. 노스트라드를 둘러싼 황제파의 영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아스탄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제도 센트리움을 지나 남쪽을 가리킨다.

용의 계곡.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제도 행은 눈가림일 뿐이야.”

“……하지만.”

윤이 눈을 들어 아스탄과 시선을 마주했다. 강한 자신감과 의지가 배어있었다.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가야할 곳이지. 황제의 정보력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노스트라드를 벗어난 순간 습격은 시작될 거다. 차라리 떠들썩하고 요란하게 움직이는 게 나아.”

“그건 맞는 말이야.”

“나를 믿고 따라와라. 우리는 반드시 목적한 바를 이룰 것이다.”

아스탄이 선언하듯 말했다.

‘망할, 솔직히 기대되잖아.’

윤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위험하고 말도 안 되는 길이라는 걸 아는데, 믿고 따라가고 싶어져 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

이레인 크라이슬러의 삶은 대체로 불행했다. 좋았던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린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생각을 했다. 사람의 삶이 좋은 패와 나쁜 패를 선택하는 걸로 결정된다면 자신의 패는 언제나 나쁜 패인 게 분명하다고.

이레인의 모친, 마라는 청소 하녀 출신이었다. 귀부인 밑에 시녀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녀들은 일하지 않고 말벗이 되거나 간단한 치장을 도와줄 뿐이다. 시녀들의 명을 받아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이 하녀다.

하녀들에게도 계급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침방 하녀다. 수를 놓고,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은 하녀들의 것이 된다. 그 천으로 손수건이나 킬트를 만들어 팔면 쏠쏠한 돈이 된다. 그 다음이 주방 하녀고, 가장 천한 위치가 세탁방의 하녀다.

하루 종일 고된 무게의 옷감과 양잿물에 씨름을 하다보면 손끝이 퉁퉁 불어터져서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무거운 것들을 들다보니 자연스럽게 팔뚝은 억세지고, 힘든 일을 하다 보니 성격은 그악스러워진다. 덕분에 세탁방 하녀들은 가장 가난한 이들이나 가는 장소였다. 그리고 세탁방 하녀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청소 하녀다. 청소란 허리가 부러지도록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광과 윤기를 내야하는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마라는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자식들을 내보냈는데, 마라는 운이 좋아 황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라는 동생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손끝이 여물고 성실한 성격이라 황제의 침방까지 청소하게 되었다.

그리 예쁘지 않은 마라의 특징은 눈동자였다. 검은 색으로도 보이는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마라의 평범한 얼굴에서 그나마 예쁘단 소리를 들을만했다. 덕분에 하인들의 치근거림을 적잖게 받았다고 라야는 친구를 추억했다.

황후 이델라처럼 깨져나갈 듯 연약한 아름다움도, 무수히 많은 황제의 연인들처럼 화려한 꽃 같은 아름다움도 마라에겐 없었다. 그녀들이 정원의 아름다운 꽃이라면 마라는 잡초였다.

마라가 황제의 눈에 든 건 아주 우연의 산물이다. 황제의 기상 의식이 끝난 후에야 청소 하녀들은 방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림자처럼 아주 재빠르고 깨끗하게 청소를 끝내했다.  마라는 손이 빨라 종종 황제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평소처럼 청소를 끝내고 나가려던 마라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성화 속 성기사처럼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었다. 마라와 눈이 마주친 청년의 얼굴에 잔악한 흥미가 졌다. 그리고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고통과 눈물, 황제의 웃음소리.

손을 대기만해도 경을 쳤던 새하얀 시트위에 마라의 눈물과 피가 점점이 뿌려졌다. 황제는 재미없단 목소리로 “처녀였군.”하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단 하룻밤에 이레인은 잉태되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는 배를 보며 마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악마의 씨를 배었다며 밤마다 흐느끼고 어두운 통로를 배회했다. 사람들은 황가의 광증에 물들었다며 수군거렸다.

이레인이 세상에서 첫 숨을 내뱉었을 때, 마라의 숨은 거두어졌다. 귀족 유모는 이레인이 한 살이 되자 떠나갔고, 평민 유모 라야만이 아이의 곁에 남았다. 그 후 재수 없는 아이라며 이레인은 배척을 받았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받는 수준 높은 교육도 이레인에게는 열외였다. 그런 이레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해야했다. 황제의 광증이 제 자식들을 죽이는 방향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나마 자애롭던 황태자 알렉시온이 살해당하고, 아스타시온은 유배당했다. 차례차례 형제자매들이 죽어나갔다. 이레인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피로 물든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이레인은 불행의 원인이 자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마라가 자신을 잉태할 일도, 귀족 유모의 아이가 성홍열로 죽는 일도, 라야의 남편이 마차 사고로 죽는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패를 고를 기회가 자신에게 온다면, 이번만큼은 좋은 패를 고르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노스트라드에 도착한 지 한 달, 처음으로 이레인은 자신이 좋은 패를 골랐다고 생각했다.

제국 북부의 역사가 한 눈에 담긴 대도서관은 천장이 무척 높아서 목을 꺾어야 그 끝이 보인다. 천장을 장식한 것은 프레스코화 타입의 천장화로 금발의 기사에게 축성을 내리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화려한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첨탑이 보인다. 첨탑의 종이 정오를 알렸다.

맥카터 교수와 이레인의 수업은 대도서관, 그 안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교수의 옆으로는 보기만 해도 현훈이 이는 고서들이 잔뜩 늘어섰다.

“노스트라드의 대도서관에는 북부 방언으로 쓰인 글도 많지요.”

맥카터 교수가 북부 방언을 능숙하게 읊으며 강독을 시작했다. 이레인은 반짝이는 눈으로 수업에 집중했다. 소리 없이 방안으로 들어온 윤은 책상의 끄트머리에 앉아서 두 사람의 수업을 지켜보았다.

노스트라드로 온지 한 달, 우울하고 소심한 성격의 아이는 많이 밝아져 있었다. 새하얗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금을 녹인 듯 해사한 금발의 아이는 아기 천사 같이 사랑스러웠다.

“북부 방언에는 고어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덕분에 대륙 공용어를 익힌 사람들에게는 다른 대륙의 언어와도 같지요. 덕분에 중앙의 멍청이들이 금서로 지정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해 북부에 멀쩡하게 보존된 책들도 많습니다. 이 책이 바로 금서들입니다.”

정말 바보들이죠. 하며 맥카터 교수가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이레인이 입을 틀어막고 풉, 하고 웃었다. 윤 역시 숨죽여 웃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린 윤이 맥카터 교수에겐 눈인사를 건넸다. 그의 허락을 받은 후 이레인에게 다가갔다.

“이레인.”

“윤 님!”

오랜만에 보는 윤의 모습에 이레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검은 늑대 기사단장이 된 윤은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레인과 보내는 시간도 줄었다. 이레인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누구 덕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욕심을 내었다가, 윤마저 불행해질까봐 두려웠다.

“잘 지냈어?”

“네!”

이레인은 그간의 이야기를 재잘재잘 떠들었다. 라야가 일이 없어져서 침울하다는 이야기, 자신의 수업 진도 등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윤은 웃으며 경청했다. 맥카터 교수도 차를 마시며 이레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고 있었다. 윤은 새삼스럽게 아스탄이 좋은 선생님을 수배해주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윤이 본론을 꺼냈다.

“이레인, 당분간 북부를 비울 것 같아.”

“……제도로, 센트리움으로 가시는 건가요?”

눈치 빠른 꼬마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단숨에 눈치 챘다.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낯빛에 마음이 쓰였다. 위로하듯 자그마한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떨리는 손으로 과자를 집어든 이레인이 끄트머리를 살짝 베어 물었다. 달콤한 설탕의 맛에도 가라앉은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 윤 님을 부른다니, 대체 무슨 이유인 것일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신의 아버지, 팔라티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공작성의 분위기 역시 생각하였다. 공작의 기사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듯 훈련에 박차를 가했고, 삼엄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네에….”

이레인은 속에서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자신의 불행이 윤에게 옮아가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기약 없는 약속에 슬퍼졌다. 왜 자신은 아이인 것일까. 아스탄 형님처럼 크고 강한 남자였으면 좋겠다. 그를 지켜줄 수 있을 텐데. 이레인은 작은 손을 모아 몇 번이고 기도했다. 얼른 자라기를. 하지만 그 기도가 부족했나보다.

‘제가 불행해져도 좋아요. 벨라드님. 그러니까 윤 님을 지켜주세요.’

이레인은 다시 기도했다.

이레인이 윤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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