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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약조.
“이벨로크 경, 본공에게 양보하지 않겠나?”
말이 양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롭은 아쉬운 표정 숨기지 못했지만, 쉽게 포기하였다. 감히 주공이 청하는데 항명할 부하가 어디에 있겠는가. 공작의 말을 거스를 만큼 그의 간은 크지 않았다.
“……위험할 텐데.”
윤 역시 아스탄에게서 풍겨오는 옅은 술 냄새를 맡았다.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눈빛도 올곧아서 술에 취한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한 대련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내가 싫은 건가?”
아스탄이 눈썹을 찡그린다. 쳐다보는 시선은 롭을 볼 때와 달리 무척 처량하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풀이 죽은 아이 같기도 했다. 자신보다 덩치 큰 건장한 남자에게 가질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독한 화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독에 빠진 사람의 술 냄새도 이보다는 덜 지독할 것이다.
윤은 롭과 스완에게 얼른 물러가라며 손짓했다. 윤이 입모양으로 ‘이벨로크 경, 다음기회에.’라고 해주었기 때문에 롭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해 얼빠진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스완의 팔을 붙잡은 롭은 눈치껏 멀리 사라져갔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싫다. 대련을 하자.”
아스탄이 고개를 저었다. 대련을 해주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서 있을 듯 고집을 피웠다. 윤은 방법을 바꾸어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이제 피곤해. 쉬고 싶어. 그리고 검을 휘두를 상태가 아닌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나는 괜찮다. 술은 한 잔만 했을 뿐이야.”
“내가 안 괜찮다니까.”
자신이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빽빽 우기는 건 술 취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레퍼토리다.
‘제대로 취했네, 취했어.’
윤이 시선에 의심을 가득 담아 쳐다보자, 아스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냥 좀 앉아서 쉬자고. 쉬고 나서 대련을 해줄게.”
“……좋다.”
사실 밖으로 뛰쳐나온 것도 스스로 이해 못 할 행동이었기 때문에 아스탄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술기운이 뒤늦게 오르는 듯 머리가 아찔하였다.
연무장 밖에서는 제르센이 대기하고 있었다. 적개심을 아래로 눌러 밟은 눈빛이었으나, 그 속내까진 감추지 못하였다. 윤은 모르는 체 하며 빙긋 웃었다.
“아이그너 경. 아스탄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화주 한 병 반입니다.
윤의 하대는 자연스러웠다. 제르센은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한 뒤 좀 놀랐다.
윤 역시 다른 의미로 놀랐다.
‘하도 멀쩡한 신색이라 가벼운 뱅쇼나 와인을 몇 잔 마신 줄 알았더니 완전 술꾼 아니야.’
보카로 왕국의 특산품인 화주(火酒)는 현실에선 럼주나 빼갈처럼 독한 술이다. 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를 정도로 알코올의 함량이 높다. 코끼리가 마셔도 취해서 쓰러질 만큼 독한 술을 마신 녀석이 대련을 하자고? 아마 아스탄의 신분이 황태자나 공작이 아니었더라면, 제정신이냐고 그 등을 퍽퍽 때려주었을 것이다.
“아스탄의 침실로 안내해줘.”
“……예.”
제르센의 안내에 따라 이전에도 방문한 적 있던 공작의 침실로 들어섰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듯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화려한 색실을 사용해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태피스트리는 사총사의 모험을 다루고 있었다. 역시나 노스트라드라고 해야 할 지. 윤은 조금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북쪽의 귀부인들은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해 집에서 소일거리로 태피스트리를 짠다. 물론 그녀들이 전부 완성하는 것은 아니고 하인들이 틀을 만들면 귀부인이 거드는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는 집안의 저력을 보여주는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보통은 집안의 설화나 전설을 다루고 있건만, 노스트라드에서 구경한 대부분의 태피스트리는 오로지 검공이 주인공이었다.
‘태피스트리에 정신 팔릴 때가 아니지.’
윤은 단호한 얼굴로 침상을 가리켰다.
“아스탄. 저쪽에 누워.”
“싫다.”
아스탄이 고집을 부렸다.
“이리 오기나 해.”
윤은 혀를 쯧쯧 차며 아스탄을 끌고 침대로 올라갔다. 저보다 덩치 큰 사내였으나 순순히 끌려왔기 때문에 그리 힘들진 않았다. 아스탄을 침대에 눕힌 뒤 그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윤은 그의 옆에 앉아서 침상 머리맡에 등을 기댔다.
정신 차리니 침상에 누워있게 된 아스탄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윤이 손을 들어서 아스탄의 눈꺼풀을 덮어주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자고 일어나면 지칠 때까지 실컷 놀아 줄 테니까 얼른 자둬.”
윤의 행동은 무척 능숙했다. 레나드가 어렸던 시절, 잠을 자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늘 이렇게 재웠기 때문이다. 유모보다는 자신을 좋아해서, 늘 침대로 파고들던 아이를 떠올리며 윤은 쓴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레나드에게 해줄 때처럼 아스탄의 가슴을 도닥여줄 필요도 없었다. 마치 줄이 끊긴 인형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윤은 아스탄을 가만 지켜보았다. 본의 아니게 잠든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날렵하게 뻗은 콧날과 감은 눈 아래로 속눈썹이 드리운 그늘, 섬세한 턱선까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매혹적이고 완벽했다.
마치 독 사과를 먹은 백설 공주처럼 얌전하게 잠이 든 모습에 윤은 킥킥 웃었다. 녀석이 깰 때 까지 무얼 해야 하나. 책이라도 읽을까. 앉은 채로 길게 기지개를 켠 후 제르센을 돌아보았다.
“아이그너 경.”
“예, 예!”
제르센은 얼빠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자로 잰 듯 흐트러짐 없이 날카롭던 보좌관이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윤이 고개를 기웃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오늘 아스탄의 공적인 업무는 무엇이 있지?”
“……알현이 있으나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뒤로 미뤄두도록 해.”
“그,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이그너 경도 쉬도록 해. 아스탄이 깨면 종을 울릴 터이니. 설마 내가 해코지 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장난스러우면서도 뼈가 담긴 질문에 제르센이 고개가 떨어져나가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럼 물러가보겠습니다.”
제르센은 황망한 표정으로 비틀비틀 아스탄의 침실을 벗어났다. 자신이 본 것이 맞는 지 몇 번이고 눈을 비비던 그는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찬물을 가져오도록 명해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아스탄이 잠에 들었다. 그것도 곁에 사람을 두고서 말이다.
불면은 아스탄이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지속되던 것이다. 의사들의 약은 당연히 듣지 않았으며, 마법사들이 온갖 저주 해금 마법을 퍼부었지만 통하지 않았고, 성직자들의 축성도 전혀 듣지 않았다. 미리엄 황녀처럼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몽유병으로 방황하는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황가의 광증이란 진단이 내려졌다.
제르센은 아스탄이 악몽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화주를 몇 병이나 마셔도 쉬이 잠들지 못하던 자신의 주군이다. 옅은 잠에 들더라도 몇 분이 되지 않아 깨어나는 사람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할 만큼 지쳐 쓰러져 잠이 드는 것이다. 잠을 자기 위해 검을 미친 듯이 휘두른 덕분에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하며 천재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웃지 못 할 비화다. 그러나 악몽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최후의 방법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아스탄의 불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귀족 유모, 아이그너 자작부인은 아스탄을 재울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를 황후로 삼아야한다며 농을 할 정도다. 제르센 역시 그런 여인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여주인으로 모셔도 좋다고 생각했다. 허나 모두 실패였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그렇게 편한 표정으로 수면을 취하다니, 두 눈으로 목격한 지금도 쉬이 믿기 힘들었다.
‘……이를 어찌한다.’
제르센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뇌에 잠겼다.
아스탄은 눈을 번쩍 떴다. 자고 일어날 때면 늘 불유쾌하게 따라붙는 두통 하나 없이 상쾌한 활력이 전신에 흘렀다. ‘날아갈 것 같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몸이 가벼웠다. 다만 술을 마시고 잠든 탓에 목구멍이 말라붙는 갈증에 목에 손을 얹었을 뿐이다.
창밖을 보자 오후의 강렬한 햇빛이 캐노피를 뚫고 들어와 그의 얼굴 앞을 아른거렸다. 눈이 부셔와 반사적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허나 수면 후의 상쾌함을 해치지 못했다. 오히려 이 햇빛마저 기분 좋단 생각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 이런 적이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이던 그 순간, 번개처럼 아침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겪는 악몽, 그 악몽의 여운에 술을 마신 자신, 그리고……. 아스탄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옆을 보았다. 윤이 팔짱을 낀 상태로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꺾인 고개가 불편해 보였다.
아스탄이 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람을 옆에 둔 채 잠이 들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귀족 가문의 사람들은 결코 침실을 나누지 않는다.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부부 역시 사랑이 끝나면 제 방으로 돌아가 잠이 든다. 부모 역시 제 아이를 침대에 재우지 않는다. 아이 역시 유모도, 부모도 없이 홀로 잠이 들었다. 침실은 오로지 개인의 영역이었다. 그 역시 홀로 잠드는 생활에 익숙했다.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곁에 사람을 두어본 적도 있었으나 오히려 정신만 사나워졌을 뿐이다. 헌데 윤은…….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이 더욱 심해졌다.
“…아스?”
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가려져 있던 까만 눈동자에 정광이 돌고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탄은 연약한 소리를 들었다. 차갑게 굳어있던 심장이 삐걱 이며 제 궤도를 바꾸는 소리였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히 그것을 들었다.
“나도 잠들었네. 잘 잤어?”
아스탄이 대답 대신 눈만 깜빡였다.
윤이 생글 웃었다.
“너 술 마시니까 귀엽더라.”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선택한 아스탄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 같아선 아침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으드드. 앉아서 잤더니 목이 아프네.”
윤이 입을 가리며 크게 하품을 했다. 팔을 이리저리 꺾어가며 스트레칭을 했다. 목도 결리는 주먹을 쥐고 가볍게 두드린다.
“……이래서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안 돼. 괜히 일찍 일어났더니 졸리기만 하고. 아스 침대 좀 빌려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온 윤이 아스탄의 옆에 누웠다. 아스탄이 당황하건 말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무엇을…….”
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을 잡아 당겼다.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아스탄은 침대 위로 털썩 쓰러지듯 누웠다. 아기를 재우듯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아프지 않게 몇 번 두드리더니,
“너도 피곤하지? 그러니까 더 자자.”
하곤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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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전보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