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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34화 (3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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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약조.

아침 일찍 눈을 뜬 윤은 커다란 침대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두 발로 바닥을 디디고 서서 길게 기지개를 켜자, 굳어있던 근육이 풀리는 느낌에 개운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떠오른다.

닫혀있던 창문을 열자 밤 동안 묵은 기운이 빠져나가고 싱그러운 아침의 공기가 그를 반겼다. 잠시 뭘 할까 고민하던 윤은 모처럼 아침 일찍 일어났으니 수련을 하기로 결정했다. 생각을 곧장 실행으로 옮겼다. 시종을 부르지 않고 로브 룸에서 간단한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은 뒤, 경쾌한 발걸음으로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서쪽 날개에 위치한 연무장은 인적이 드물고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바닥은 부드러운 흙으로 자그마한 돌도 찾을 수 없었다. 아스탄과 자신이 자주 방문해서인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연무장 구석에 마련된 차양막과 누워서 쉴 수 있는 의자, 비에 맞지 않도록 천막을 설치해 가지런히 꽂혀있는 병장기들이 도드라진 변화였다.

연무장의 가운데 선 윤은 꼼꼼하게 몸을 풀고 난 후 빠른 동작으로 발도했다. 백년 만에 주인의 손에 돌아온 트리기토스가 반갑다는 듯 노래했다.

윤은 곧장 수련에 들어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치듯 검을 휘두르고 그 반동을 이용해 뒤돌아선 후 다시 올려친다. 춤을 추는 것과도 같이 부드러운 흐름으로 검을 휘두르지만 그 기세가 공기를 찢는 듯 매섭기 그지없다.

“……후우.”

마지막으로 진각을 밟으며 허공을 찌른 후 칼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짝짝짝!

박수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스완이 화들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바닥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허억!” 하고 숨 삼키는 소리를 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일부러 훔쳐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스완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공개된 연무장에서 모두와 함께 훈련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수련을 지켜보는 건 금기다. 물론 견식을 위해 보여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허락을 한 가까운 친인에 한정한다. 허락도 받지 않고 훔쳐보고 있던 스완의 행동은 예법에 어긋난 짓이었다. 결투를 신청하여도 무어라 변명할 수 없다.

이미 스완의 존재를 알고 있던 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어. 그리고 숨어있던 분도 나오시는 게 어떤지?”

“역시 하이어드 경은 배포가 넓군.”

하하 웃으며 나무 뒤에서 나타난 건 롭이었다. 용케 그 큰 덩치를 나무 뒤에 구겨 넣은 채 숨어있던 남자를 보고도 윤은 놀라지 않았다. 훈련 도중, 낯선 기운에 두 사람이 있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이벨로크경, 스완경.”

“아! 인사가 늦, 늦었습니다! 하이어드 경,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이구려.”

기합이 바짝 들어간 인사는 스완, 옆집 청년에게 하듯 소탈한 인사는 롭이었다. 윤이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경들은 이 새벽에 어인 일로…?”

“우린 당직 불침번이었지. 이제 교대하고 휴식하러 가는 길이오.”

그러고 보니 롭의 눈가에도 피로가 묻어있고, 스완은 아예 길을 가다가 곯아떨어질 것 같이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근위 기사들은 24시간 교대제로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꼬박 하루를 무거운 금속 갑옷을 입은 채 서 있어야한다. 잠깐잠깐 쉬는 시간이 주어지긴 했으나 피곤할 법 했다.

“저희야 그렇다 치고, 하이어드 경은 이른 아침부터 훈련에 매진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소드 익스퍼트가 되려면 이렇게 열심히 훈련을 해야겠지요!”

반짝이는 눈을 한 스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저도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 훈련을 하겠습니다!” 하고 선언하듯 말했다.

스완의 청록색 눈은 마치 불을 뿜듯 번쩍이고 있다. 아주 조금 양심에 찔려서, 윤은 그 해맑은 시선을 피했다.

“아차! 하이어드 경이라고 부르면 아니 되지. 검은 늑대 기사 단장이니 높여 불러야하는 걸 내가 잊고 있었소.”

롭이 자신의 이마를 치며 웃었다.

“그냥 편하게 불러줘. 이벨로크 경 역시 단장이잖아?”

“역시 그대는 호탕한 자로군!”

롭이 크게 웃으며 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때마다 윤의 몸이 휘청휘청했다. 스완은 안쓰러운 눈으로 윤을 쳐다보았다. 저 두드림에 당한 자들은 모두 시퍼런 멍을 등에 매달고 끙끙거렸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던 스완이 결심한 얼굴로 윤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저 하이어드 경!”

“그래 스완 경. 소리치지 않아도 내 성이 하이어드인 건 잘 알고 있어.”

한국식으로 하면 고용된 윤. 무려 황태자에게 고용된 몸이다. 윤이 웃으며 대꾸하자 스완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진다. 마치 잘 익은 사과 같다. 이세상의 귀족들은 대개 자신의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운다. 귀족 사회에서 솔직함은 천박함과도 같은 단어였다. 진심을 감추고, 거짓된 미소를 얼굴에 칠한다. 그래서 윤은 스완이 신기하고 또 귀엽게 느껴졌다.

북부의 귀족들은 좀 더 진솔하고 마음이 넓은 편이긴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이 단지 존경하던 영웅과 같은 나라에서 왔단 이유만으로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던가. 로아크란 강적을 상대해야하는 북부의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는 강자를 돕는다. 뭉치고 협동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덕분에 강자를 숭상하는 아직 남아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용기를 얻은 스완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지, 지도 한 수 부탁드립니다.”

“…뭐, 좋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터라 윤은 흔쾌히 승낙했다. 스완의 표정이 환해졌다.

‘호의를 베풀어주어 볼까.’

비록 언어를 가르치는 데 재능은 없었지만, 검술 사범으로서 윤은 제법 괜찮은 축에 속했다. 한때는 황제의 기사를 키워내는 스승이 아니었던가. 이전 대련을 청해왔던 스완의 재능은 제법 괜찮은 편이었고, 옆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 재능을 빠르게 꽃피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런데 스완 경. 피곤하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갚지 않아도 상관없어. 기대도 하지 않고.”

윤의 쓴웃음에 스완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저는 체프왈드 스완, 스완 남작가의 차남입니다! 경과 같은 분을 만나 참으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내 이름은 윤. 잘 부탁해.”

윤이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완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윤은 스완의 오른손을 끌어와 맞잡았다.

“이건 악수. 내가 살던 곳에서 주로 하는 인사야.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당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리는 거지.”

스완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든 후 떨어져나갔다. 스완의 얼굴이 다시금 시뻘게졌다.

“오! 아주 훌륭한 인사로군! 나도 부탁하오.”

롭이 제 손을 내밀어 윤의 손을 맞잡았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 안에 윤의 손이 쏙들어갔다. 마치 악력 대결을 하듯 어마어마한 힘으로 꾹 눌러쥔다. 롭은 힘차게 손을 흔들며 악수를 했다.

윤은 저릿저릿한 손을 쥐었다 펴며, 이건 호의의 표시가 아니라 싸우자는 의미 같단 생각을 하였다.

“이번엔 가검이야, 아니면 진검이야?”

“진검으로 부탁드립니다.”

스완의 눈이 기대감과 호승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대단한 실력의 검사에게 한 수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롭의 지도 아래, 윤과 스완은 서로 마주보고 섰다. 롭은 윤을 주시했다. 윤은 가볍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양 손으로 검을 잡아 이쪽을 겨누고 있다.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압!”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스완이 검을 휘둘러 왔다. 윤은 그것을 막아내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찔러 들어가며 공격을 해보았지만 윤은 번번이 그것을 허사로 되돌렸다. 이잇! 어쩐지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방어 일변도의 움직임에 스완이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의 대련 순간적으로 격해지면 그것을 막기 위하여 연무장 가에 서있던 롭은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비슷한 나이대의 두 사람이지만 그 실력 차는 현격했다. 기사단에서 무려 다섯 번째로 꼽히고, 수재라는 소리를 듣던 스완이 윤의 놀이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검공의 후예답게 윤의 실력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튼튼한 기초를 틀로 삼아 무수히 많은 실전을 거친 솜씨다. 만약 자신이 진검으로 맞붙는다면? 부끄러우나 자신이 이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 부럽다 못해서 질투 날 정도다. 롭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는 질투심을 겸허하게 인정했다.

“헉… 헉……. 정말 조금도 닿지 못했군요.”

스완은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도록 검을 휘둘렀으나 윤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도드라지는 실력 차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망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윤처럼 되고 싶었다. 강하고 여유로운 모습의 검사가 되고 팠다. 지금은 순수하게 존경하고 그를 닮길 바라는 마음이나 조금만 더 깊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이 되리라.

“스완 경, 그대의 공격은 너무 정직해. 예를 들어 내 어깨를 찔러 왔을 때 이렇게 했다면?”

윤은 스완이 휘둘렀던 공격 패턴을 기초로 하여 고쳐야하는 부분을 알려주었다. 예를 보여주듯, 검을 역수로 잡아 비스듬하게 찔러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아오는 검날에 스완이 움찔했다. 검끝은 그의 오른쪽 어깨 직전에서 멈추었다. 곧장 검을 거둔 윤이 빙긋 웃었다.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매서운 검초였다.

“경의 실력이 나쁘다는 건 아냐. 다만 실전 경험이 부족할 뿐 인거지.”

“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스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이어드 경.”

롭이 윤을 불렀다.

“나에게도 경의 검술을 다시금 견식해볼 기회를 주지 않겠소?”

“……미안하지만 이벨로크경,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갑자기 나타난 아스탄의 모습에 롭이 작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스탄의 등장에 모두들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제국의 검,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인사는 생략하라. 그걸 위해 온 것이 아니니.”

아스탄은 평소처럼 냉랭하고 무심한 얼굴이다. 허나 이상하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라 롭은 눈을 가늘게 떴다. 뛰어온 것 마냥 화사한 금발도 조금 흐트러진 듯 보였고, 풍겨오는 술 냄새도 롭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의아한 건 아스탄이 자신들을 쳐다보는 눈빛이다. 마치 우버 산맥에서 몰려온 눈보라처럼 싸늘하였다. 또한 제 여인을 노리는 불한당을 쳐다보는 시선이다. 도대체 왜? 롭이 눈을 끔뻑거렸다.

============================ 작품 후기 ============================

독like도 님 및 나전보를 읽어주시고 선추코를 눌러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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