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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33화 (3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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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약조.

5장, 약조.

아아아!

눈보라를 몰고 온 밤의 여신이 울부짖었다. 그녀의 세찬 비명소리에 창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린다. 시종이 지피고 간 벽난로는 싸늘하게 식어서 방 밖과 다를 추위가 방안을 맴돌았다. 한 겨울의 오싹한 냉기가 옷 속을 파고든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남자는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홀로 술을 들이키는 자신의 모양새가 참으로 한심하다. 남자는 킥킥 웃으며 다시금 술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러나 병 속의 액체는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미간을 구기며 빈병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진 병이 바닥을 뒹굴었다.

“…하아.”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남자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끝에 한 사람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초상 속 주인공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쓸어서 넘긴 하얗고 앳된 얼굴의 청년이다. 장난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깜빡이며 눈웃음 칠 것 같았고,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은 금방이라도 “렌!”하고 말을 건네올 듯하다.

남자는 홀린 듯 다가가선 입을 맞출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손을 들어 그 뺨을 쓰다듬었다. 산 사람의 온기 대신 싸늘함만이 그를 반긴다. 얼마나 많이 쓰다듬었는지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손때가 내려앉았다.

“……ㄴ.”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빠져나와 자신을 다정하게 끌어안아 줄 것 같다. 하지만 헛된 소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앞의 청년을 죽인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견딜 수 없어진 남자가 말을 달려서 밖으로 나갔다. 시종들이 황급히 “폐하!”하고 외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으나 그는 박차를 멈추지 아니하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그의 뺨을 내려친다.

이윽고 그가 도착한 곳은 노스트라드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이다. 척박하던 시절과 달리 점점 발전하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빈껍데기만 남은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이다. 사람들을 다스리고, 문화를 발전시키고,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 허나 비어버린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려라……. 그러면 그가 올 것이다. 멀고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네 곁에 나타날 것이다.”

흐린 눈으로 도시를 돌아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언제 그가 올 것인가. 자신이 한 줌의 흙이 되어 썩어문드러진 후에? 죄 많은 영혼이 깊고 어두운 연옥에 갇힌 후에나 올 것인가.

“……거짓말. 그는 오지 않아.”

남자, 레나드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

아스탄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 온 몸이 묵직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머릿속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엉망진창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꿈속의 남자가 자신인건지, 지금의 자신이 꿈속의 남자인 건지 한동안 구별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그가 캐노피를 걷어 밖으로 나오자 불침번을 서고 있던 시종이 황급히 달려와 침의 위에 가운을 입혀주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머릿속을 긁어대는 것처럼 두통이 일어 기분이 불쾌해졌다.

“뱅쇼를…… 아니 술을 가져와라. 독한 것으로.”

그리 명령한 아스탄은 창문 근처에 있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턱에 손을 괸 상태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꿈의 여운은 늘 그렇듯 언제나 불쾌하였다. 그러나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아스탄은 곰곰이 꿈 속 내용을 더듬어나갔다. 이전과 다른 형태의 꿈, 처음 겪는 누군가의 기억.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폐인 같은 몰골로 술을 마시던 남자의 외양은 자신과 무척 흡사했으며, 광휘의 회랑에 걸려있던 초상화와도 일치했다. 그렇다면 꿈속의 남자는 현제 레나디온인 것일까. 그리고 낯선 이의 초상이 있었다.

“큿!”

초상화 속의 청년을 떠올리려하자 머릿속을 날카로운 가시로 긁어대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두통이 일었다. 분명 그의 모습을 어딘가에서 봤건만……. 아스탄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신음을 삼켰다.

아스탄은 그가 검공이라 생각했다. 없어진 것인지, 없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검공에 대한 기록은 거의 소실되었다. 그나마 검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센트리움 북쪽 지구에 있는 동상과 은화에 새겨진 옆모습뿐이다.

“전하, 기침하셨나이까.”

제르센은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아스탄의 옆에 화주와 빈속에 먹어도 무리가 가지 않는 간단한 안주를 내려놓았다. 악몽에 시달리는 아스탄이 아침부터 독한 술을 찾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르센의 손놀림은 익숙했다.

술잔을 든 채 아스탄은 창밖을 보았다. 밤의 여신이 펼쳐놓은 장막은 점점 걷혀가는 이른 새벽, 검은 머리 청년이 연무장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훈련을 하려는 듯 간편한 옷을 입었으며, 발걸음도 소년처럼 경쾌했다. 아스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스스로 놀랐다. 웃음이 무척 헤퍼졌단 생각이 들었다.

“제르센, 그대는 아직도 윤을, 하이어드 경을 의심하고 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제르센은 잠시 고민했다. 윤, 정체를 알 수 없는 차 대륙인. 검공과 같은 곳에서 왔으며, 그 역시 뛰어난 경지의 검사. 빈민 구제책을 생각해낸 걸로 보아 머리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예상된다.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지만 제르센은 윤이 싫었다. 본 데 없이 버릇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지해서 무례한 것이라면 교육을 할 터였다. 그러나 윤이라는 작자는 완벽한 귀족식 예법을 알고 있음에도 제멋대로 구는 모습을 보인다. 최악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허락하겠다.”

“저는 하이어드 경이 싫습니다.”

제르센은 흘러내린 모노클을 추켜올리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아스탄은 그 이유를 묻는 대신 술을 홀짝였다. 잔이 비자 제르센은 다시 술을 채웠다. 몇 번을 반복하자 술병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었다.

“싫은 이유를 대라면 아마 알현 때까지 전하의 시간을 앗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자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마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요.”

“정말 싫어하는 군.”

“진솔하게 답변하라 하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시종으로서 당돌한 행동이었으나 아스탄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믿고 있는 심복 중 하나였기에 제 의견을 말하는 데 거침 없었다. 그 역시 막힌 사람은 아니어서, 부하 직원의 간언을 흘려듣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엔 오랜 시간이 존재한다. 제르센의 모친인 아이그너 자작부인은 아스탄의 귀족 유모 출신이다. 덕분에 제르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스탄을 지켜보았고, 아스탄이 쫓겨나자 아이그너 가문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포기하고 노스트라드로 따라와 주었다. 열다섯 어린 소년에게 무척 큰 의지가 되었다. 지금에 와선 일등 시종이자 보좌관이 되었다.

“제르센 아이그너.”

“예.”

“명령이다. 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해.”

아스탄이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것은 아스타시온 전하의 뜻입니까, 황태자이자 노스트라드 공작의 뜻입니까.”

“어느 쪽이냐에 따라 네 대답이 갈린단 뜻인가?”

제르센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다.

“그대 역시 맹랑해지는 군. 양쪽 모두의 뜻이다.”

“……노력하겠습니다.”

제르센에게서 대답을 이끌어내는 건 이정도가 최선이다. 과한 강요는 반발을 불러올 뿐, 믿고 맡겨두는 것이 좋다. 명령을 받은 이상, 제르센은 윤을 인정하기 위해 노력할 터였다.

“그리고 윤과 함께 본인도 제도, 센트리움으로 가겠다.”

“전하!”

제르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스탄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창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결착을 낼 시간이 왔을 뿐이야. 어차피 황제는 나를 소환하였다. 그에 따르지 않으면 반역의 죄가 덧씌워질 뿐이야.”

“부디 결정을 거두어주십시오! 위험합니다!”

“홀로 가겠단 뜻이 아니야. 윤과 롭을 데려가겠다. 그리하면 소드 익스퍼트 경지의 검사가 둘이나 있지.”

“……차라리 거병을 하시옵소서.”

반역. 제르센이 무시무시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어차피 아스탄이 정상적으로 황좌에 오를 길은 요원하다. 패륜을 저지를 거라면, 승률이 높은 쪽에 수를 던져야한다. 맨몸으로 제도로 향하는 것은 나 죽여 달라며 목을 내놓는 꼴이다. 참모로서도, 그의 놀이 동무로서도 결코 찬성할 수 없는 전술이었다.

“제도 센트리움 행은 그저 눈가림일 뿐이다. 제도에 들린 후 곧장 용의 계곡으로 갈 생각이다. 내가 불완전한 황태자인 것은 그대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용의 계곡은 우버 산맥에 속해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제국의 남쪽 끝이다. 노스트라드에서 용의 계곡을 가기 위해선 반드시 센트리움을 지나야한다. 제도행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아스탄은 이제껏 황태자로 책봉되었음에도 인장을 받지 못하였다. 렉스 그랑드에 의거하여 황룡의 인장을 받지 못한 자는 황제의 위에 오를 수 없다고 되어 있다.

황제는 대법전의 수호자, 그가 대법전을 어긴다는 것은 패륜보다 더 지탄을 살 행위였다. 정통성도 위협을 받게 된다. 제르센은 입술을 깨물었다.

“회색 늑대 기사단을 모두 데려가시지요.”

“안 돼. 분명 팔라티온께서는 단 열의 숫자로 오라고 하시더군. 그대신 제르센, 그 일행에 너도 참석한다.”

“……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대의 쓰임새가 무력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장점은 머리에 있어.”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던 윤에게 어린 청년과 롭 이벨로크가 다가간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롭이 크게 웃으며 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윤의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스탄은 미간에 주름이 패도록 눈썹을 찌푸렸다. 세 사람은 한참동안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롭 이벨로크는 그렇다 쳐도, 어린 녀석이 거슬렸다. 그가 윤을 바라보는 눈은 선망으로 반짝거린다. 아니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선망 이상의 감정이다. 저자의 이름이 체프왈드 스완이던가. 기사단 내에서는 서열 다섯 번째로 나이에 비해 빼어난 실력을 가진 이였다.

윤이 불쑥 손을 내민다. 스완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가만 서있자, 억지로 손을 끌어와 악수를 했다. 아스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르센의 의아한 시선이 좇아온다.

“본인의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승리할 방도를 찾도록 해. 그대가 본인의 참모이지 않은가. ……그리고 옷을 준비하도록. 밖으로 나가겠다.”

============================ 작품 후기 ============================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과 snako양님, 짱좋아님, 하뎽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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