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전생보고서-32화 (32/111)

0032 / 0111 ----------------------------------------------

4장, 제도에서 온 불청객.

“참, 오라버니. 하이어드 경께서 제가 동행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불허한다. 그는 북부를 지킬 의무가 있다.”

아스탄이 단칼에 거절했다.

“오라버니 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단칼에 자르시다니 너무하셔요. 어차피 하이어드 경도 제도에 방문해야하는 길, 그 길에 동행을 요청하는 거랍니다. 저는 센트리움에서 노스트라드까지 오는 내내 너무 무섭고 불안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돌아가는 길도 너무나 걱정되어서 잠자리를 설치기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하이어드 경이 계셔 주신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경은 검은 늑대의 주인, 그는 황가를 수호할 본분을 가지죠. 그렇다면 제게도 자격이 있지 않나요?”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은 애비가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윤은 검공의 후예로서 제도 센트리움에 방문해야한다. 어차피 제도로 가는 길이다. 황제의 질녀인 애비가일이 동행을 요청하여도 거부할만한 마땅한 핑계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단순히 황제나 공작의 명을 받고 윤에게 접근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애비가일의 속내는 과연 무엇인가. 아스탄은 잠시 눈가를 굳힌 채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위험부담을 안고 가는 거라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져야한다.

“……허하지. 본공도 제도로 가야하니 함께 가자꾸나. 이 오라비의 동행으로 네 불안이 덜어진다면 좋겠구나.”

절반의 허락에 애비가일은 아쉬웠으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네 모임에 끝까지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애비가일. 하이어드 경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그를 양보해주지 않겠나?”

“……기꺼이요.”

애비가일이 생긋 웃었다.

공작성의 서쪽 날개로 돌아가는 길, 윤이 앞장서서 걸었고 아스탄은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본디 길을 안내하는 시종을 제외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이 앞서서 걷는 것이 원칙이다. 제르센이 보았다면 기함했을 예법이지만 아스탄은 개의치 않았다. 윤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속내를 숨긴 채 음흉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역시 살롱에 참석하는 건 맞지 않아. 질색이야.”

“……그런 것 치곤 잘만 적응하고 있던데, 애비가일과 산책도 하고 오지 않았나.”

돌아오는 대꾸가 묘하게 뾰족하다. 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스탄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생각에 닿는 게 있다는 듯 장난스럽게 눈가를 접으며 킬킬거렸다. 그 미소에 아스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야, 약혼녀랑 잠깐 산책했다고 삐진 거야?”

“누가 약혼녀지?”

아스탄이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을 되돌렸다. 윤은 잠시 침묵했다. 애비가일의 말에 따르면 아스탄과 혼인을 맺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느껴졌는데 아니었던 걸까. 그리고 확인하듯 되물었다.

“애비가일 공녀 말야, 약혼녀 아니야?”

“절대 아니다.”

아스탄은 한자 한자 씹어뱉듯 말했다.

“난 또…. 공녀가 제도까지 에스코트 해달라는 걸 네가 반대하기에 약혼녀에게 다른 남자가 근처에 있는 게 싫은 건가 했지.”

“애비가일은 약혼녀가 절대 아니야. 내겐 약혼녀가 없다.”

“……그래?”

“그 녀석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다 거짓말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답하였다는 걸 깨달은 아스탄이 낭패한 얼굴을 했다. 윤의 착각에 왜 이렇게 짜증이 치미는 지 알 수 없다.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채찍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노스트라드 공작으로서, 황태자로서 자리를 잡은 후 황제의 마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윤이 연관되면 자신을 잃어버렸다.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치워버리면 될 텐데, 그것은 또 싫었다. 아스탄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왜? 애비가일 공녀와 약혼을 하게 되면, 이스트민스트 공작을 네 편으로 만들 수 있잖아.”

“……너라면 그 여자가 좋은가.”

“뭐어. 미인이고… 권세가의 상속녀고… 나쁘지는 않을 거 같은데.”

공녀의 장점을 꼽으며 윤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아스탄이 코웃음 쳤다.

“널 이스트민스트 공작으로 만들어줄까? 그것을 원하나?”

“……미안. 내가 실수했어.”

단칼에 거절한 윤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물론 애비가일은 아름답고 기품 있는 숙녀였다. 그러나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은 어쩐지 알 수 없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지금도 그 눈빛을 떠올리자 뱀 앞에 선 개구리마냥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른다.

두 사람은 사촌이다. 그러니 자주 만났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스트민스트 공녀에게 질색하는 게 이해가 간다. 윤 역시 그녀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내가 오해를 한 건 말이야. 보통은 자기 여자 옆에 낯선 남자가 있는 것만 봐도 질색해서였거든. 싫어서 질색한 것도 모르고…… 기분 나빴다면 미안.”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윤이 사과했다. 아스탄은 그 모습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스.”

“……아스탄이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직전, 말을 걸어오는 윤 때문에 어렴풋하게 떠오를 듯 어른거리던 집중이 깨어졌다. 아스탄이 미간을 좁혔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왜 이제껏 약혼이나 혼인을 하지 않은 거야?”

약혼녀가 없다는 건 애비가일을 통해 증명되었고,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건 공작부인의 방이 열리지 않음으로서 알 수 있었다.

아스탄의 나이는 올해 스물. 약혼녀가 아니라 부인이 있어도 이상치 않을 나이다. 물론 레나드도 스물셋까지 약혼만 했을 뿐 혼인을 하지 않았다. 그건 제국의 기틀을 쌓는 중이라 외척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아스탄이다. 혼인 동맹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을 텐데, 왜 이제껏 약혼도 하지 않은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글쎄.”

아스탄은 윤의 생각지 못한 질문에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의 자아가 확립된 순간부터 무수히 많은 목숨의 위협과 시련을 겪어야했다. 살아남기 위해, 저주와도 같은 광증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급급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마음에 담을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렇다 고해서 권력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제 곁의 사람을 정하고 싶진 않았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의 모친, 황후 이델라는 무척 약한 여자였다. 제 남편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 그러나 황가의 광증은 그 피가 닿지 않은 사람도 미치게 만들었고, 남편이 아들을 살해한 순간 연약한 정신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유폐되어 별궁에서 가둬진 불쌍한 여자다.

“…반드시 내가 지켜 주어야하는 약한 사람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내가 기대도 좋을 만큼 강한 사람을 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여태 없었고.”

“아스, 은근 로맨티스트네.”

윤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음, 좋네. 강한 사람.”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윤은 고개까지 끄덕끄덕하며 곱씹었다.

어쩌면 자신의 이상형도 그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에 돌아온 후 만났던 여자 친구들을 떠올렸다. 다들 제법 예쁘고 착했지만, 모두들 윤과 사귀며 힘들어했다. 모두들 같은 말을 하며 울었다.

‘오빠는 너무 속을 알 수 없어. 날 좋아하긴 해? 아닌 거 같아. 나만 좋아하고 나만 상처받잖아.’

도장으로 찍어낸 것 마냥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말. 그녀들이 좀 더 강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윤은 눈썹을 매만졌다.

어쨌든 이곳은 그란디아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가진 곳이다. 자신도 ‘정상’이 된다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연인도 없다는 거? 황태자가 그래도 돼?”

“세인들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지? 나도 묻겠다. 너는… 그곳에 두고 온 연인이 있느냐.”

“나 말이야? 없어.”

당연하다는 목소리. 이전에 느꼈던 위화감과 비슷한 감각에 아스탄이 미간을 좁혔다.

“인기는 제법 많았지만…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기에 그런 말을 하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잖아. 이렇게.”

윤이 자신의 검지로 눈썹을 치켜세워서 아스탄의 표정을 따라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아?”

“그런 뜻이 아니다.”

“하하, 여기선 고용된 윤이지만, 거기선 제법 잘나갔다고. ……그냥 인연이 없었던 것뿐이야.”

양 손을 허리에 올린 채 거만한 체 하는 윤 때문에 아스탄이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뗬다. 이후 나눈 대화는 평범한 일상 잡기였다.

약혼자에 대한 대화는 농담으로 끝이 났지만 아스탄의 뇌리 한 구석에는 찝찝함과 마음에 걸리는 것을 남겨두었다.

============================ 작품 후기 ============================

이 글을 읽고 추천과 댓글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과 001님, 마가아님, 양털양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순수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네요. 물론 의심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결백하고요.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과도한 비난에는 저도 맞설 예정입니다.

혹여 타사이트, 조아라 자게 등에서 근거없이 도를 넘어선 비방 등을 보신다면 부탁드립니다. 이제껏 커뮤니티 하나 가입하지 않고 뭘했는지 제가 한심스럽네요 ㅠㅠ. 제 메일은 [email protected] 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