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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31화 (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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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제도에서 온 불청객.

“……애비가일 미리엄 이스트민스트?”

날아갈 듯 아름다운 서체에 적힌 이름을 읊은 윤이 고개를 들어 솔라를 마주보았다. 왜 굳이 여길? 하는 표정의 윤을 보며 솔라는 말문이 턱 막혔다. 정녕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하고 되묻고 싶었다.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은 당금 그란디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숙녀였다. 황제의 질녀라는 신분과 화사한 꽃 같은 아름다움으로 사교계의 중심에 위치했다. 게다가 이스트민스트 공가의 유일한 상속녀로, 그녀와 혼인을 할 경우 이스트민스트라는 거대한 영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이전엔 직계 자손 중 남자가 없으면, 방계의 남자에게 작위가 이어졌으나 그 폐단이 무수했다. 이후 렉스 그랑드를 작성할 당시 직계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의 남편에게 한정 상속한 뒤 딸이 낳는 아들에게 작위의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법률을 새로 제정했기 때문이다.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딸이 원하는 남자를 택하겠노라 선언했다. 덕분에 그녀에게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영식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쌀쌀맞은 성품이 흠이라 할 수 있으나 애비가일이 가진 어마어마한 이점에 비하면 티끌도 되지 않는다.

‘혹여 애비가일 공녀가 윤에게 관심이라도 보인다면….’

이스트민스트 공작, 윤 하이어드 이스트민스트.

좀 혀가 꼬이는 발음이지만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은 이스트민스트 공작의 일등 시종이 된다. 솔라는 부풀어 오르는 망상에 히죽 웃었다.

“솔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음흉 맞은 미소에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흠흠, 솔라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그녀가 가진 배경을 제외하고도, 현 노스트라드에서 이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초대장을 보낸 다른 귀족들 역시 애비가일 공녀의 살롱에 참석할 거고요. 피라미 몇 마리보다 잉어 하나가 더 좋은 법이지 않습니까. 뭐, 공녀는 잉어라기엔 좀 애매하지만요.”

정확히는 상어죠.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 솔라는 뒷말을 삼켰다.

“……잠깐, 이스트민스트 공작이라면 대표적인 황제파 귀족 아니야? 아스탄의 적이잖아.”

“사교계에선 또 다른 이야기지요. 정계에서는 적, 사교계에서는 친구. 사교계에서는 적, 정계에서는 친구인 경우도 많습니다. 공녀처럼 특수한 위치의 상속녀를 단지 정계에서 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건 안 될 일이지요.”

윤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과연 애비가일이란 이름의 공녀가 여는 살롱에 참석하는 게 맞는 건지 잠시 고민되었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는 사람입니다. 먼저 초대장까지 보냈으니 우호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라 봐도 좋겠지요. 혹시 압니까? 경으로 인해 4대 공가 중 이스트민스트가 황태자 저하의 편으로 돌아설지도 모르지요.”

“알겠어. 간다고 보내줘.”

솔라의 조언에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비가일의 살롱은 공작성의 동쪽 날개에서 열렸다. 공작성의 연회장을 빌렸다 하나 내부를 꾸민 것은 오로지 이스트민스트의 재력이다. 돔형의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애비가일이 직접 가져온 것으로 남쪽 사나 군도에서만 생산되는 크리스털로 만들었다. 샹들리에는 오색빛깔로 다채롭게 빛나며 방안을 환하게 밝히며, 섬세한 아름다움에 사람들의 경탄을 샀다.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수를 놓은 비단 또한 벽을 장식하기에 아까울 정도였다. 방안을 장식한 것 중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윤이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살롱의 안에는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북부의 사교계에서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다. 그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후 윤은 곧장 살롱의 가장 안쪽에 앉아있는 호스트 애비가일에게 향했다. 살롱의 호스트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옳은 예법인 탓이다.

팔걸이의 세공이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의자보다 더욱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녀는 시집을 낭송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꽃이 질 때 나의 이름을 불러주오.”

옥이 굴러가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자 북부 귀족의 영식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공녀, 애비가일은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화사한 밀짚 빛깔이었고, 눈동자는 적갈색이다. 어쩐지 색소가 빠진 안즈마네를 떠올리게 했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윤을 보았다. 말라붙은 피처럼 적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훑어보자 어쩐지 오싹해졌다. 무척 위험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아름다움 속에 치명적인 독을 감춘 독초다. 마치 마녀들을 상대할 때 윤은 이와 비슷한 공포를 느낀 적 있었다.

‘설마 마녀는 아니겠지.’

윤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무서울 것 없는 검공이지만 마녀들은 좀 무서웠다.

마녀(魔女).

마법사와는 조금 다른 존재로 초능력자와 비슷한 존재다. 미래 예지, 염동력, 저주 등 불가해한 힘을 가진 이들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수련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마법과 달리, 혈통으로 승계되는 능력인 탓에 타고난 힘이 가장 중요했다. 공녀 역시 황제의 질녀, 안즈마네의 피를 이었다면 마녀라 해도 이상치 않았다.

“검은 늑대들의 주인, 하이어드 경. 처음 뵙겠어요. 저는 애비가일 미리엄 이스트민스트입니다. 애비가일이라 불러주세요.”

애비가일이 왼손을 내밀었다. 윤은 그녀의 손을 살짝 붙잡은 후 손등이 닿지 않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반갑습니다, 공녀. 저는 윤 하이어드.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윤의 인사에 애비가일이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좋은 이름이에요. 하이어드라…. 그대는 정녕 높이 뛰는 자이죠. 아니, 날아오른다 해야 할까요.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 이스트민스트 공녀.”

“아이, 그렇게 선을 긋는 호칭은 싫답니다. 하이어드경.”

친근한 대응에 귀족 영식들이 질시의 표정으로 윤을 쳐다본다. 대뜸 거리를 좁혀오는 태도에 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익숙하게 숨겼다.

“그럼 공녀의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바라고 있었답니다.”

“다음부턴 그리하지요.”

윤은 공녀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과 별개로 매끄럽게 답했다. 애비가일은 그가 마음에 든 듯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공기가 답답하네요, 산책을 하고 싶어요. 하이어드 경. 에스코트를 해주지 않으시겠어요?”

“그리하겠습니다.”

애비가일이 손을 뻗자 시녀들이 재빨리 그녀의 손에 장갑을 끼웠다. 윤이 오른팔을 내밀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애비가일이 그의 팔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공기 같은 무게감처럼 얹은 듯 얹지 않은 듯 완벽한 예법이었다.

“친애하는 벗들이여, 잠시 바람을 쐬고 올 터이니 부디 이 자리를 즐기고 계셔 주시어요.”

애비가일은 살롱의 참석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리를 비우는 행동은 살롱의 호스트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다. 제멋대로 굴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무어라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살롱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마치 산들바람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애비가일이 걸었고, 윤은 단정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선남선녀의 모습이다. 보기만 해도 훈훈한 광경이었으나 두 사람의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살롱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스트민스트는 대표적인 친황제파 가문이다. 황태자의 사람으로 알려진 윤에게 접근하는 행동은 유혹하려는 수작으로도 여겨졌다. 그들은 경계의 시선을 나누었다.

윤은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공작성의 정원은 산책을 나누기 적당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나 미로의 정원은 여인의 어깨 길이로 정원수를 단장하여, 멀리서도 멀리서도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지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애비가일의 머리카락을 흔들어놓았다.

“제가 부담스러우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말이 없으신 걸요.”

“죄송합니다. 공녀의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제 서투름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윤은 적당히 포장하는 말로 사과를 건넸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이 어찌 싫으랴. 하지만 그것이 정녕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바보는 아니다.

귀족 영애들이 중심이 되는 살롱에 참석하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였지만 늦었다. 차라리 남자 귀족들의 클럽하우스에 적당히 얼굴을 비출 것을. 예법에는 통달하였으나 사교계에는 익숙지 않은 윤이다. 음모와 흉계, 가식은 그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뒤에서 수작질을 하느니 앞에서 호쾌하게 검을 휘두르는 게 좋았다.

애비가일이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예법은 훌륭하나 사교적인 대화에 능숙치 못한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수집가로서의 욕구를 자극해대었다. 원석이 이정도로 빛난다면, 가공을 끝낸 후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아스탄 오라버니의 친구시라면, 제게도 오라버니가 되시지요.”

“…그렇습니까?”

“예에, 그렇지요. 저 역시 언젠가는 아스탄 오라버니의 곁에서 황가의 일원이 될 터이니 부디 여동생처럼 저를 친근하게 생각해주시어요.”

애비가일이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약혼녀인가?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

윤은 배신감을 느꼈다. 친구라고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야한단 건 아니다. 그러나 타인의 입에서 듣는 건 다르다. 더 이상 캐묻는 것도 결례라 윤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정원을 한 바퀴 돌아 동쪽 날개로 돌아왔다.

살롱을 떠날 때와 달리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애비가일은 서둘러 살롱 안으로 들어섰다.

술렁거림의 정체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 때문이다. 드넓은 살롱의 안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오의 태양을 그대로 옮긴 듯 화사한 금발의 남자, 아스탄이다. 카드 게임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입구를 보았다.

‘살롱에 참가한단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데.’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애비가일이 미묘하게 눈가를 굳혔다. 이내 표정을 수습한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아스탄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녀, 애비가일. 제국의 검,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황가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스탄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들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불꽃이 튀는 것 같다. 약혼자라 하기엔 지나치게 건조하고 사이가 나빠 보였다. 윤이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라버니께서 참석하신단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찾아와주시다니요. 소녀 참으로 놀랍고도 기쁘기 한량없답니다.”

애비가일이 생글생글 웃으며 초대장도 없이 왜 왔냐고 돌려서 하는 공격을 시도했다.

아스탄 역시 당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촌 오라비가 되어서 네가 처음으로 여는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도 못한다면 세인들이 무어라 하겠느냐. 내 뒤늦게 알고 다급하게나마 참석하여 네 모임을 빛낼 수 있으니 기쁘게 생각한단다.”

감히 날 초대하지 않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는 뜻이다. 애비가일의 그림처럼 미소 짓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는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파르르 경련까지 일었다.

“……소녀, 오늘은 참으로 즐거운 날이라 두고두고 생각될 것 같군요.”

“네가 그리 받아들여준다니 나 역시 기쁘구나.”

두 사람은 혀 속에 날카로운 칼을 감추고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애써 고개를 돌려 자신이 하던 일에 열중하는 체 했다. 괜히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탓이다.

본의 아니게 사이에 낀 윤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해석하느라 현기증까지 일었다. 정말 이런 건 맞지 않다.

애비가일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자는 사랑스럽고 귀엽다하지만, 제 사촌 오라비에게는 얼마나 가증스럽고 밉살맞게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참, 오라버니. 하이어드 경께서 제가 동행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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