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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제도에서 온 불청객.
“어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연회 홀에서 멀리 떨어지지 인공 정원으로 도망쳐 나온 윤은 자신의 목을 죄는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냈다. 그리고 목 부분의 단추를 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늑대에 임명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왔고, 조금이라도 많은 대화를 나누며 얼굴 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질려 결국 도망 나오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건 딱 질색이다. 그 위치에 맞는 행동을 보이라며 아론은 매일 구박했지만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도망치면서도 검은 빠트리지 않고 챙긴 윤은 자신의 버릇에 쓰게 웃었다.
‘결국 내 손으로 돌아왔구나.’
이 검을 쥐었던 주인들의 비참한 말로 때문인지, 트리기토스는 주인을 잡아먹는 검으로 악명이 높았다. 미쳐버린 대장장이가 자신의 아이를 용광로에 녹여 만들었다는 오싹한 헛소문이 돌 정도다. 윤은 그 소문에 코웃음 치며 보란 듯이 트리기토스를 들고 다녔다.
“……결국 나도 죽었네.”
우웅-.
검이 불만스러운 듯 울었다. 가끔 자아가 있는 듯 검이 공명할 때, 헛소문은 진실로 느껴졌다. 윤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뭐, 인마. 꼬우면 쓰지 말던가. 하고 면박을 주는 듯 트리기토스가 계속해서 웅웅 울었다.
“뭘 하고 있지? 연회의 주인공이 도망치다니,”
“난 이런 쪽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크라바트를 아무데나 던져버린 윤이 해실 웃었다. 아스탄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기껏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도 네 복을 스스로 차는 구나.”
“난 만들어 달라한 적 없거든.”
“어찌되었든 그대는 이방인. 계속 살아갈 거라면 이곳에 익숙해져야하지 않겠나.”
공작의 대꾸에 윤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계획했던 일이 끝나고 나면 도망칠거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넌 참 비밀이 많아.”
“그런가?”
“그러나 거짓을 말하지도 않지. 그저 이야기 하지 않을 뿐.”
아스탄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서늘하면서도 올곧은 눈이 자신의 영혼을 꿰뚫을 것처럼 직시해온다.
윤은 아직 두려웠다. 그리도 경외해 마지않던 검공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주변 사람들은 필경 달라질 것이다. 괴물로 볼 게 분명했다. 검공은 백 년 전의 사람이다. 검술의 신이 되었다고 돌려 말하고 있지만, 죽었을 거라 여기고 있다. 그런 검공이 자신이라 말하면 믿을까? 괴물로 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아스탄에게조차 솔직하게 말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망가져있음을 깨닫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언젠가는 말 할게.”
“…네 말을 믿겠다. 기다리지.”
아스탄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약한 표정에 마음이 약해진 탓도 있을뿐더러, 그에게는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는 악취미는 없었다. 아니 윤이기 때문에 이렇게 무르게 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영혼이 산산조각 나도록 파헤쳤으리라.
“나야 도망쳤다고 쳐도, 아스탄 너는 왜 나왔어?”
“…널 찾으러 나왔다.”
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분명 그도 도망친 게 분명했다.
파티의 주연이 둘이나 도망쳤음에도 악공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정원까지 퍼져 나온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꽃향기를 싣고 왔다. 만월의 푸른 달이 환하게 빛난다.
“레이디 아스탄!”
돌연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선 개구지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곡 추시겠습니까?”
“나도 남자다만.”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걸.”
윤이 우아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며 레이디 아스탄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스탄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피식 웃으며 결국 윤의 손을 맞잡았다.
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왈츠였다. 키가 크고 건장한 아스탄과 그보다 머리가 하나 작고, 가느다란 체구의 윤은 겉보기엔 무척 제법 잘 어울렸다. 그러나 춤은 엉망이었다. 서로 남자역할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발을 밟기도 하고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바람에 부딪히기도 했다.
맞잡은 손이 크고 따뜻했다. 윤은 아스탄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의 차갑고 무심한 가면은 어딘가 던져버린 듯 달빛에 화사한 얼굴이 웃고 있다.
음악의 선율에 따라 웃음이 울려 퍼졌다.
**
제도 센트리움, 귀족들이 사는 남부 지구에는 거대한 클럽하우스가 하나 있다. 귀족 남성들의 사교장으로 쓰이는 이곳은 다양한 유희거리를 가지고 있다. 차 대륙식 증기 목욕탕인 사사부터 시작하여, 카드게임을 즐기기도 하고, 때론 코르티잔을 불러서 은밀하게 놀아나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유쾌한 파티를 즐길 수 있는 클럽하우스도 새벽녘이 다가올 때쯤엔 문을 닫고 파장을 한다. 얼굴에 입술 자국을 찍은 중년 백작을 마지막으로 클럽하우스엔 불이 꺼졌다.
새벽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한 시각, 야음을 틈타 가문의 문장을 가린 검은 마차들이 속속 클럽하우스로 들어섰다. 도룬 남작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살롱 안의 카드게임장으로 향했다. 이미 몇 사람이 도착해있었다. 은밀하게 시선을 나누며 아는 체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셰즈 롱그에 기대어 누운 남성, 팔라티온이다. 그는 황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금빛 머리카락을 감출 생각도 않았다. 황제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오십이 다되어가는 나이건만 시간을 거스르는 듯 젊은 외양은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도룬 남작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심장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그란디아의 지배자이시며, 렉스 그랑드의 수호자이신 황제…….”
“그만.”
황제는 귀찮은 듯 손을 흔들어 인사를 잘랐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도룬 남작은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테이블에선 이미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게임을 지켜보았다.
“곤란하군요.”
반 무어 백작이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검공과 같은 곳에서 온 이라니요.”
“……황태자는 그를 검은 늑대 기사단장으로 삼았다고 하더군.”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반 무어 백작의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도룬 남작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요?”
“면책까지 주어지는 별동대라니….”
그들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노스트라드 공작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이렇게 이용할거라 생각지 못했던 터다. 황제가 황태자를 확실히 처리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남은 건 열두 살의 어리고 비천한 신분의 황자, 이레인 뿐이다. 귀족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허수아비 황제의 탄생이다.
“그나저나 이레인은 잘 지내고 있다던가?”
“…예. 아스타시온 황자가 학장까지 지낸 맥카터 교수를 스승으로 붙였다 합니다.”
“아비보다 낫군.”
황제가 킬킬 웃었다. 순간 그의 눈에 살심이 스치는 것을 방안에 모인 이들은 놓치지 않았다.
‘설마 황가의 핏줄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리는 건 아니겠지.’
망상이 아니라 충분히 실현가능성 있는 상상에 도룬 남작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황룡 가리온의 축복을 받은 루 로열(황족)들이 미쳤다고 하나, 그 신성은 감히 침범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족의 핏줄이 끊어지게 되면 그란디아는 어떻게 되는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체스말을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킹과 퀸의 체스말이다. 팔라티온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에게 제도의 귀환을 명해야겠어.”
“어쩌실 셈입니까.”
“사랑하는 아드님을 아주 오랫동안 못 보았지. 5년인가? 이대로 얼굴도 못본 채 끝내긴 아쉽군.”
황제가 서늘하게 웃으며 바닥에 킹을 떨어트렸다. 붉은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체스말은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황제파의 모든 귀족들은 고개를 돌려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밤은 모든 것을 덮었다. 추잡스러운 음모까지.
**
새로이 기사단장의 지위에 오른 윤에게 오는 귀족들의 초대 편지는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매일같이 트레이를 끌고 들어오는 시종의 얼굴은 지쳐있었다. 언제 답변을 받을 수 있냐고 닦달당한 탓이다.
시종에게서 초대장을 받아든 솔라는 분리 작업에 착수했다. 계급 순으로 나누고, 가야할 곳을 골라내어 윤에게 보고한다. 가야할 곳으로 판명된 초대장이 무려 스무 개다. 하나같이 정성껏 종이 공예로 초대장을 꾸몄고, 향수를 입혀서 우아한 필체로 적어내려서 보낸 ‘여인’들의 초대다.
윤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꼭 가야하는 건가?”
솔라는 윤을 모시기로 한 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흐뭇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브릭이 절로 떠오를 만큼 칼 같은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좀 능글능글했다. 하긴, 사람은 외양만 봐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겪어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다. 윤은 친근하게 대해오는 솔라의 태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꼭 가야한다는 건 아닙니다. 가면 좋은 거죠.”
“……왜?”
“힘을 키우실 수 있으니까요.”
무얼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어조로 답한다. 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세력을 만들고, 그것을 키워나가면 좋은 것 일까. 권력은 허망하다. 권좌로 가는 길은 반드시 피와 투쟁을 동반한다. 그 투쟁의 끝에 또 다시 배신이 있는 건 아닐까, 여전히 두렵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떠날 사람. 적당한 지위와 신분을 얻었으니 나대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글쎄. 그런 건 딱히 관심이 없는데.”
생각을 정리한 윤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솔라는 긴 설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윤을 설득할 수 있는 단 한사람을 언급하였다.
“……이레인 황자님께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경께선 자칭 7황자의 보호자가 아닙니까. 그분을 황제로 만들 작정은 아니시겠지만, 적어도 황자로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려면 적당히 힘을 실어 주셔야지요.”
“그런가?”
“예.”
“그럼 갈게.”
윤이 냉큼 대꾸하는 모습에 솔라는 숨죽여 웃었다.
“모두 방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분의 초대에는 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애비가일 미리엄 이스트민스트?”
============================ 작품 후기 ============================
어제 밤부터 계속 조아라 연재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대로 연재 펑을 하고 사라지게 된다면 제가 태린 작가라 인정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ㅉㅉ 자숙한다더니 세컨닉 파고 또 펑?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겠지요? 연재를 하더라도 저 뻔뻔한 사람. 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제가 이대로 사라진다고 해서 제 결백함이 드러나진 않겠지요.
어떠한 프레임이 씌워지면 그것을 피해자가 벗기는 굉장히 힘들단 생각이 듭니다. 자꾸 지엽적인 부분에서 지적이 들어와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을 해명하면 왜 그걸 진작 말하지 않았어! 이 부분이 이상해! 라고 하실 뿐, 다른 사람임을 계속해서 말하는 증거들은 외면당하네요.
결론이 뭐냐면, 저는 저의 무고함과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동일인이 아니라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낼 거고요.
뻔뻔하다고요? 멘탈갑이라고요? 아뇨, 눈물이 날만큼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연재를 하는 겁니다. 저 역시 사람입니다. 태린 작가가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도 상처받을 만큼 저를 손가락질하는 댓글에 놀랐습니다. 제가 경솔한 부분이 많았던 걸 인정합니다. 연재 시작당시에는 이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랬다면 지금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의미 없는 가정이니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계속해서 태린 작가라고 생각하신다면 손가락질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도를 넘은 발언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셔야겠지요. 선삭을 하셔도 괜찮고요. 하지만 저는 정말 억울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