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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27화 (2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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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제도에서 온 불청객.

“아이고 삭신이야.”

윤이 바닥에 주저앉은 후 뒤로 벌러덩 누웠다. 아스탄은 이마에 가볍게 맺힌 땀을 제외하면 숨결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스탄과 대련을 하는 것은 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싫지 않은, 오히려 기다려지기까지 하는 즐거운 일이다. 자신과 검을 맞댈 수 있는 실력자는 거의 없는데, 그가 현재진행형으로 성장하고 있기까지 하다면 더욱 유쾌해진다.

“바닥이 더럽다 하지 않았나.”

“이 형님은 힘들어, 힘들다구우. 일어날 힘도 없어.”

윤이 투덜거리자 아스탄이 손을 뻗어왔다. 냉큼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강한 힘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무서운 녀석. 그렇게 죽자 사자 달려들기 있어?”

“오늘도 네가 다섯 번 중 세 번을 이기지 않았나.”

“……거야, 뭐.”

대련의 승률은 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아스탄 역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오르고 있었다. 기술 같은 부분에선 아스탄이 쫓아올 수 없는 50년의 경험치 덕분에 문제없었다. 그러나 체력과 지구력이 걸림돌이 되었다.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되면 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체격 차에서 오는 페널티가 어마어마했다. 윤은 심한 불합리함을 느꼈다.

윤이 예상하기에 아스탄의 경지는 최소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다. 초월자의 벽에 부딪혔을 수도 있고 극복했을 수도 있다. 소드 오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탓에 어림짐작할 뿐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검사라는 걸 깨달았다.

다만 아스탄에게선 이질적인 부분이 종종 눈에 밟혔다. 자신의 앳된 외모와 실력에서 오는 괴리감과 비슷한 것이다. 나이에 비하면 실전에서 겪어야만 축적할 수 있는 경험치가 지나치게 많았다.

“아스. 네 방에서 신세 좀 질게.”

“……마음대로. 그나저나 근본없는 이름은 무어냐.”

“아스탄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아? 아니면 시온이라거나.”

“그만 두어라.”

“쳇.”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사실로 돌아왔다. 대련 후 몸단장은 아스탄이 먼저 했고, 윤은 역사책을 뒤적이며 그가 욕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도 될 텐데.

한국에선 남자들끼리 목욕탕에 같이 가서 발가벗고 번갈아가며 등을 밀어주어야 진정한 우정을 쌓는 느낌이었는데, 아벨라르 인들에게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월스턴은 질색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으나 아스탄에게는 언젠가 시도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스탄은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맞은편에 앉았다.

“맥카터 교수에게 네가 살던 세상의 문자를 가르치는 일은 잘 되어가고 있나?”

“으응, 그럭저럭. 괜히 교수님이 아니더라고.”

윤은 우울해졌다. 그는 매일 밤 고통 받고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지루해 뒤지겠다. 여기 음식 개맛없음. 김치 먹고 싶다. 아저씨들 재수 왕 ㅗ]의 적절한 해석법에 골몰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맥카터 교수에게 거짓으로 일러주어 다른 뜻으로 만들어도 되지만, 혹여 다른 메모가 발견될 가능성도 고려하여 거짓말을 짜내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해석이 기대되는 군.”

“왜 지금이라도 가르쳐줘?”

“그리 궁금한 것은 아니니 맥카터 교수를 기다려보지. 그가 잔뜩 기대했는데 실망시켜주고 싶진 않아. 다만 한 가지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아스탄이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종이의 정 가운데 ‘ㅗ’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ㅗ]은 뭐지? 이건 일반적인 문자의 체계가 아닌데?”

윤은 식은땀을 흘렸다.

‘시발!’

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즈마네는 발명을 잘못한 게 틀림없다. 공간 이동이 아닌, 과거로 가는 마도구를 만들었어야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해 과거로 돌아간 후 자신을 없애고 싶었다. …아니 이미 죽었지. 윤은 침울해졌다.

“문득 검공이 남겼다던 메모를 보고 의문이 들더군. 네 설명에 따르면 한글이란 문자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지. 허나 이건 결합이 아니지 않나.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

스승보다 훨씬 뛰어난 제자, 아스탄의 추측은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 없는 상징인 것은 맞다. 별로 좋은 뜻은 아니었지만.

윤은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아스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종이를 뺏어들어 하하하, 하고 누가 보아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벼, 별거 아니네! 그냥 모음을 잘못 적은 것 같아!”

“내 생각엔 필경 뜻이 있으리라 짐작되는데.”

“진짜 별 거 아니야….”

예리한 놈. 윤은 이마에 괸 식은땀을 훔쳐내며 웅얼거렸다. 그러곤 속으로 평생 하지 않던 기도를 했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님, 벨라드님. 제게 제발 지혜를 주세요. 앞의 세분은 여기에 안 계신다는 걸 알지만요.’

기도엔 답변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진다거나, 갑자기 또 다른 차원으로 날려간다거나, 시간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은 좌절했다.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아스탄은 계속해서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노교수가 해석하길 기다리지 않겠다. 전부 네가 가르쳐다오.”

“……이, 이건! 산을 뜻하는 문자야!”

윤은 되는대로 말을 내뱉은 뒤 후회했다. 그리고 형편없는 자신의 임기응변과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산? 문자에는 뜻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윤의 대답에 아스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다. 윤은 황급히 변명을 주섬주섬 주워섬겼다.

“그냥. 이, 이게 산과 모양이 비슷하잖아! 그래서…….”

“그건 그렇군.”

아스탄이 그제야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건 괜찮았으나 친우가 문제다. 100년 후 이곳에서 검공 윤과 시황제 월스턴은 신적 존재였다. 그런 검공이 지루해 죽겠다고 징징거렸다거나 아저씨들이 재수 없단 낙서를 했다고 밝혔다간, 그 파장이 어마어마할 거다. 신성모독을 하지 말라며 칼을 들고 쫓아올 광신도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져서 윤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산이라.”

아스탄은 문자를 되뇌었다.

“그것을 왜 여기에 적은 거지? 뜬금없지 않나. 1차 원탁회의 때는 우버 산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스탄의 예리한 지적에 윤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우버 산맥은 그란디아와 보카로 왕국을 가로지르는 국경선이다.

시황제 월스턴의 시기만 해도 우버 산맥은 보카로 왕국에 속해있었고, 월스턴이 두 번째 전쟁을 일으킨 후 2차 원탁 화의에서 국경선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이 시기에 산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나, 나도 모르지. 내 생각인데, 그건 말이야. 마치….”

“마치?”

“우리 제국이 마치 산처럼 높고 푸르게 푸르게. …제국의 영광이 영원하라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

하하하, 윤이 억지로 입술 끝을 들어 올려 웃었다. 입 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거, 검공이라면 그렇게 기원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동향 사람 생각엔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그제야 납득한 얼굴이다. f**k you의 뜻이 이렇게 돌변하다니. 윤은 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스탄이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죄책감은 더해졌다. 설마 너도 월스턴처럼 ‘ㅗ’에 꽂혀서 망토에 수놓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자 좀 두려워졌다.

“쓰기도 간편하고, 뜻도 나쁘지 않아.”

아스탄이 ‘ㅗ’를 써보였다. 윤은 혀를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이상한 일이군.”

“뭐가?”

“그런데 내 부친에게 이것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게 왜?”

그 사이 자신이 한 거짓말을 까맣게 잊은 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스탄과 이레인의 아버지, 황제는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월스턴과 레나드의 후손이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비호감이기 때문에 가운뎃손가락 정도는 날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아비의 영광이 영원하다면… 내가 죽어야한다는 뜻이니까.”

아스탄은 평온한 어조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황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윤은 말문이 막혔다. 자식이 아비를, 아비가 자식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니. 자신과 월스턴은 이런 것을 생각하며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큰 뜻을 품었건만 세상사는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월스턴의 후손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패륜을 범한다. 윤은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은 윤은 결국 자신의 거짓말을 실토하고 말았다.

“……아스탄. 그거 다 거짓말이야.”

“무엇이?”

“[ㅗ]의 뜻은 말이지. 엿 먹으라는 뜻이야. 이렇게도 쓰여.”

윤은 가운뎃손가락만 남기고 나머지 손가락을 접어보였다. 아스탄은 본능적인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어냐, 굉장히 기분 나쁘군.”

“넌 본능적으로 알았을 지도 몰라. 이건 손가락으로 하는 [ㅗ]거든.”

월스턴과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 중신에게 종종 써먹던 암호였으니까. 그 뜻을 이해한 아스탄이 눈을 크게 뜨더니 피식피식 웃었다.

“어쩐지 의아했다. 그리 좋은 뜻이었다면 네가 당황했을 리 없지.”

“검공께서 그런 말을 썼다면 어쩐지 체면이 손상되는 느낌이기도 해서….”

아스탄의 손에서 펜을 빼앗아든 윤이 종이에 한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치곤 제법 괜찮은 서체를 가지고 있었다. 아스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문장에 방점을 찍은 뒤 종이를 들어올렸다.

[팔라티온 ㅗ.]

“이게 무슨 뜻이냐.”

“너희 아버지 엿드시라고.”

윤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아스탄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한참을, 눈에 눈물이 괼 만큼 웃던 아스탄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그래도 맥카터 교수에겐 네가 지어낸 좋은 뜻으로 이야기 해줘. ‘엿 먹어라’는 너무하니까.”

============================ 작품 후기 ============================

이 소설을 읽어주시고 선작과 추천, 코멘트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평량님과 moni114님 감사합니다 8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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