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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26화 (2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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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제도에서 온 불청객.

거친 관도를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날개 달린 백마를 형상화한 커다란 문양은 제국의 4대 공가 중 하나인 이스트민스트 공작의 문양이다. 그들의 주변을 황제의 기사들이 둘러쌌다. 황제만을 수호하는 이가 공작의 마차를 지키다니! 관도를 지나다니던 여행객은 이례적인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이스트민스트 공작의 무남독녀, 애비가일 미리엄 이스트민스트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커튼을 걷으며 척 베스파뇰에게 손짓했다. 마차는 지독하게 흔들렸고 백부의 기사들은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애비가일은 분노로 인한 편두통에 오는 내도록 시달렸더니 착한 공녀인 체 할 생각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무례함을 숨길 생각이 없는 애비가일의 태도에 척은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삭이며 말을 마차에 가져다댔다.

“노스트라드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두 시간 정도만 더 말을 달리면 됩니다. 공녀.”

“아직도?”

“예.”

짜증 섞인 물음에 척은 눈을 내리 깔며 욕설을 속으로 삼켜냈다. 애비가일의 붉은 기 섞인 갈색 눈동자가 네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을 향하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비록 피가 옅어졌다하나, 피처럼 끈적끈적한 빛깔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빌어먹을 크라이슬러.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황제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팔라티온의 여동생 미리엄 황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황녀는 제정신을 가진 때가 더 적은 여자였다. 밤마다 복도를 돌아다니며 “잘못했어. 용서해줘.”하고 흐느끼며, 누군가에게 비는 지 알 수 없는 용서를 구했다.

혼인 후 공작저로 옮기고 나서도 그녀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도 눈밭을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폐렴에 걸리고 말 정도였다. 결국 공녀를 낳은 후 산욕열이 겹쳐 사망하고 만다.

이른 나이에 혼자가 된 공작은 재혼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었는지, 아니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부유한 마상(馬商)인 이스트민스트 공가의 무남독녀로서 애비가일은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현 황제의 질녀인 그녀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녀의 적 또한 존재치 않는다. 황족이 드문 탓에 권력의 정점에 군림하는 여자였다. 그런 공녀가 제 사촌 오라비를 보겠다는 핑계로 척과 함께 노스트라드로 향하고 있었다.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황태자와 혼인 동맹을 맺기라도 할 것인가.’

척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대표적인 친황제파 귀족으로 황태자의 적이다. 황제의 나이가 이제 마흔을 앞두고 있으니, 황가의 명줄이 짧은 탓에 황혼이나 다름없었다. 젊은 황태자로 갈아탈 계책인 건지도 몰랐다.

“아스타시온 오라버니는 얼마나 훌륭히 장성하셨을까?”

애비가일이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갖고 싶은 것. 애비가일은 공가의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며 자라났다. 보석, 유물, 마도구 그녀가 원한다면 갖지 못할 것이 없었다. 허나 그녀에게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저의 사촌 오라비. 아스타시온 황태자.

당시엔 아스탄 황자였으나 거상의 피를 이은 그녀는 단번에 알았다. 평범한 황자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고, 남아있지도 아니할 것이다! 애비가일은 자신의 생각을 주저 없이 부친에게 전했다. 공작은 아스탄을 경계했으나 그녀는 상관치 않았다. 어차피 공작의 견제에 주저앉고 말 사람이라면 필요 없었다.

“……나의 보석.”

애비가일은 자신의 사촌 오라비를 생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제국의 검,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황가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폐하를 척 베스파뇰이 뵙습니다.”

거대한 알현실 안, 척 베스파뇰은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의 나른하면서도 차가운 시선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자 등골이 오싹해져오는 공포에 그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소녀, 애비가일 미리엄 이스트민스트. 황가의 수호자이신 아스타시온 전하를 뵙나이다.”

새하얀 베일을 쓴 소녀는 우아한 자태로 자신의 가슴 위에 한쪽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금발과도 같은 옅은 밀짚 빛깔의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흘러내렸다. 잘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순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소녀였다.

베일이 움직이며 얼굴이 드러날 때마다 세인들 사이에서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애비가일은 곧잘 짓는 냉소를 숨기며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는 사랑스럽고도 상냥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다. 쉬도록.”

턱에 손을 괸 아스탄의 음성이 무심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애비가일은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외모에 혹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되레 실망하였으리라.

샴페인을 손에 든 윤은 알현실의 상석에서 사신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친우’라는 이름으로 조언자 역할을 한다면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이 따를 테지만 그런 것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이 지루한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척에게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알현에 참석하겠다던 자신을 경계의 시선으로 노려보던 제르센이 떠올라서, 윤은 혼자 킥킥 웃었다. 검은 늑대들이 알았더라면 채신없이 바닥을 구르며 웃었을 것이다. 노스트라드 공작일 때도 매일 도망쳤는데, 고작 조언자라는 역할을 탐낼 리 없지 않은가.

황제가 보냈기 때문인지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그들이 일 순위였다. 이전, 복면을 쓰고 보았을 때는 졸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는데 제대로 의장을 갖추니 제법 멀끔한 태가 났다. 그래봤자 어린아이를 죽이려한 치졸한 인간이지만. 윤은 냉소적인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안녕.”

시선을 느꼈는지 뒤로 물러나던 척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윤이 생글 웃으며 손을 흔든 후 자신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손짓해 보였다. 척에게서 강탈한 검이다. 척의 외안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시선에 힘이 있다면 조각조각 난도질당했을 만큼 매섭고 강렬한 시선에 만족했다.

윤은 좀 더 복장을 뒤집어놓을 요령이었다. 알현을 끝내고 나가는 사신의 일행을 따라갔다. 그러곤 척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베스파뇰 경. 우리 구면이죠?”

“……처음 보는 것 같은 데,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이레인을 습격했다는 걸 공개적으로 언급해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에 척은 일단 발뺌을 했다. 윤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글쎄, 난 구면이 아닌 거 같은데?”

검대에서 검을 풀어낸 후 그것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에, 척은 분노로 순간 눈앞이 허옇게 변함을 느꼈다. 윤이 얄밉게 이죽거렸다.

“이 검은 그럼 누구의 것일까?”

“…네 놈.”

척은 눈앞의 청년을 당장 베어버리고 싶은 살기를 억눌렀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바닥에 반달모양의 손톱무늬가 새겨지다 못해 살이 찢어져 피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주웠으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지. …와아! 역시 돌려주기 아까울 만큼 좋은 검이야.”

검을 뽑아낸 윤이 감탄했다. 얄밉게 웃으며 햇빛에 검을 투과시키고 손가락을 튕기며 검날의 탄성을 시험했다. 그리곤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내 검 날 위에 올려선 검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거짓말처럼 반쪽으로 잘려나가는 모습까지.

어렵지 않게 검기를 일으키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기사들과 상종하기 싫다는 듯 멀찍이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던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까지 노골적인 흥미를 드러냈다.

“역시 좋은 검이야. …무기엔 죄가 없지만.”

윤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돌연 진지하게 변한다. 앳되고 해사한 얼굴 위로 얼음 같은 살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럴 땐 이야기가 좀 달라서 말이야.”

검병을 세게 움켜진 뒤 힘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윤의 검은 눈이 마치 푸른 불꽃을 일으키듯 빛났다. 그와 동시에 검이 타올랐다. 압도적인 기세가 윤에게서 터져나왔다. 깜짝 놀란 기사들이 제 무기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과도한 검기를 밀어 넣은 척의 검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가보로 물려주어도 좋을 만큼 훌륭한 검이 망가지고 말았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바스러져서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윤은 그런 검을 척의 손에 친절하게 쥐어주었다.

“돌려준다고는 했지만, 제 상태로 돌려준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네 놈.”

살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이를 가는 모습에 윤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척 베스파뇰 경.”

마지막 인사는 우아하게. 윤은 빙글 돌아선 후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회랑을 빠져나갔으나 윤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소드 익스퍼트 경지의 검사, 그가 발휘하는 검기는 놀라울 정도다. 술렁거림이 원을 그리며 점점 커져간다.

“……척 베스파뇰 경.”

“예, 공녀.”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이 척에게 손짓해보였다.

“저 자는 누구죠?”

“……윤 하이어드라는 자입니다. 얼마 전 기사 서임을 받은 하찮고 수상한 자이니 공녀께서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척이 이를 아득아득 갈며 대꾸했다. 악감정이 다분 섞인 설명이었다.

“…그렇군요. 척안의 척 베스파뇰 경. 그대의 하나 남은 눈도 쓸모없어졌군요. 뽑아 버리는 것이 어떤가요?”

애비가일이 환하게 웃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외모의 소녀가 내뱉는 폭언은 지독했다. 자식뻘의 어린 소녀에게 모욕당했다는 수치심에 척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애비가일은 윤이 떠난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희열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맞잡은 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찾았다.

그녀의 오라비보다 더욱 아름다운 보석, 그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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