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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25화 (2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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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곳.

수신 호위들을 모두 물린 채 아스탄은 윤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에게 위해를 가한 윤과 단둘이 남겨놓는 일이 불만스러운 듯 했지만 아스탄의 명령은 강경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윤이 아스탄을 쏘아보며 말했다. 팔짱을 낀 채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아스탄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꾸했다. 평소와도 같은 악몽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남자, 그것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자신. 하지만 마지막은 조금 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희열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비록 마지막엔 강제로 깨워진 탓에 꿈이 어떻게 끝나는 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네가, 그…… 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까지 했다. 자신에게 했던 파렴치한 행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아스탄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며 가슴을 쾅쾅 치기까지 했으나 별 수 없었다. 윤은 털썩 소리가 날만큼 의자에 세게 앉았다. 윤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됐어.”

윤의 모습에서 아스탄은 대충 짐작 가는 것이 있단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본 것이 나의 잠든 모습이었나?”

“……응.”

윤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나의 광증이다.”

“광증?”

아스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황가의 광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잘은 몰라. ……넌 가끔 내가 다른 세상 사람인 걸 잊어버리는 것 같아.”

윤의 궁금증에 대해서 해결할 생각을 해주지 않은 채 아스탄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검공에 대해서는 넌 얼마나 알고 있나?”

“나와 같은 곳에서 왔다는 것. 이곳에서 검공으로 불리며 큰 활약을 했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대자에게 버림받았다는 것.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목 안쪽이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불덩이를 삼킨 양 뜨겁고 괴롭다. 눈가가 홧홧해져서 괜히 윤은 자신의 눈을 문지르는 척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스탄이 무슨 의도로 검공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추측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검공임을 모른다. 그저 같은 세상에서 왔다고만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몰랐고, 모르는 것을 꾸며내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진실 또한 전부 말하지 않았다.

“황가의 광증은 저주에 가까운 형태지.”

“그건 마녀들이 내리는 거잖아. 여기 황가엔 대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을 텐데?”

“허나 반쪽에 불과하고, 대를 내려오며 피는 많이 옅어졌지. 내 부친을 보더라도 점점 심해짐을 알 수 있다.”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이 저주의 주체가 검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탄이 확신어린 눈길로 윤을 응시하며 말했다. 윤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스탄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현제 레나디온은 소드 마스터란 초월자의 위치에 올랐으며, 각종 마법과 주술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잠들 듯 사망한 때가 향년 43세. 초월자들의 수명이 평균 100세 이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상할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레나디온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광제(廣帝) 페트루시온은 18세란 어린 나이였다. 그는 평생을 의심을 받았는데, 바로 아비를 살해한 패륜아라는 의혹이다. 지긋지긋하리만큼 의심받은 탓일까. 페트루시온의 결벽적인 강박증은 유명했다. 제 아들조차 믿지 못하고 경계하여 내치는 모습을 보였고, 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법에 조금만 어긋난 모습을 보여도 미친 듯이 화를 냈다고 한다.

“페트루시온까지는 모두들 광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비록 예민한 성격이었다 하나 그는 제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황제였다. 내치에 힘써 법전 렉스 그랑드를 완성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광제(廣帝)라 불렸지.”

아스탄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윤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경청했다. 어렵기만 한 책보다 그의 설명이 훨씬 귀에 박히고, 이해하기 쉬웠다.

“페트루시온은 48세의 젊은 나이로 결국 자살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된다. 세 번째로 제위에 오른 것은 무제(武帝) 아우렐리온. 그는 색에 미쳐서 수많은 사람들을 겁간했다. 그의 엽색행각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지. 불만이 극에 달했을 무렵 하지만 야만족 로아크가 왜란을 일으키고, 노스트라드를 비롯하여 제국의 북부 지방이 큰 타격을 입는다. 아우렐리온은 전술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고, 순식간에 로아크를 정복함으로써 내분을 잠재웠지. 그리고 정복 전쟁을 일으켜 그란디아의 현 국경선을 완성하였다.”

아스탄은 냉정하게 황가의 광증에 대해 읊어 나갔다. 황태자인 그가 늘어놓는 진실은 거짓부렁의 역사서와 전혀 달랐기에 더욱 잔인하고 잔혹했다. 윤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네 번째 황제인 내 아버지 팔라티온은 광증으로 미쳐버린 무제를 죽이고 자리에 올랐다. 황제뿐만 아니야. 황자녀와 방계의 황족들 또한 광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조차도.”

“……그럼 너는?”

“나는 악몽을 꾼다. 누군가를 죽이는 악몽을. 그 꿈을 꾸고 나면 한동안 여운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스탄은 말끝을 흐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스스로의 자아를 깨달은 순간부터 함께한 악몽은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계속해서 같은 사람을 죽인다. 그 사람이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기분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자신의 선조들이 미친 건가 생각될 만큼.

아스탄을 제외하고도 악몽을 꾸는 사례는 더러 있었다. 고모되는 미리엄 황녀 또한 몽유병에 시달렸다.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전에 네게도 말했었지? 내가 꿈속에서 죽이는 사람이 검공 같다고. 이것이 현제(賢帝)의 기억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시황제 월스턴과 현제 레나디온을 제외하면 멀쩡한 사람은 없었다는 거다. 황제가 아닌 이들에게도 광증은 찾아왔다. 황가(皇家)라 하나 피가 이어진 사람들은 극히 적다. 대부분 자살을 하거나 미친 상태로 생을 마감하였지. 적어도 현제의 대에서 저주가 시작되었다고 봄이 옳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야기를 풀어놓던 아스탄은 돌연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목을 답답하게 죈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도 갑갑함은 변치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창문을 활짝 열자 거센 겨울바람이 몰려들어왔다. 그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촛불을 흔들어놓았다. 한기가 돋을 만큼 서늘한 바람이 반갑기까지 했다. 차가운 바람이 등줄기를 때리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검공은 평범한 검사 아니었어?”

“맞다. 황가의 기록을 읊어도 그는 다른 세상 사람에 검을 특출하게 잘 쓰는 청년이었을 뿐이지.”

“왜 검공을 의심하는 거야?”

“검공이 정말 평화롭게 그란디아를 떠났을까?”

“……내가 어떻게 알아.”

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자신은 평화롭게 떠나려고 했다. 모두가 레나디온, 대자를 위해서 떠나라 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검공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은 이쪽에 있지. 현제가 검공을 버렸다.”

아스탄은 확신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을 테니까.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겨우 그것 때문에?”

“그래, 그런 하찮은 권력 때문에.”

“……권력이라.”

간신히 읊조린 윤은 손을 들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어 넘겼다. 머리를 여러 대 얻어맞은 듯 아찔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떠난다고 했고, 권력을 내려놓는다 했잖아.”

“권력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니까.”

권력이란 그러한 것이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나누지 아니한다. 권좌는 피로 물들어있으며 피를 먹고 자란다. 아스탄이 쓸쓸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 복수를 한 것이 아닐까. 검공이 직접 저주를 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검공의 주변인이 복수를 결심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그렇다면 이른 나이에 현제가 세상을 뜬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고.”

“……그런가.”

“이 모든 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야. 정설도 아니고.”

대자의 후손에게 자신을 죽인 이유를 듣는 기분은 무척 끔찍했다. 윤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간 몰랐던 지독한 피로가 자신을 덮쳐오는 기분이다. 외로움, 실망, 고통. 이 기분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할지 윤은 알 수 없어졌다.

월스턴과 안즈마네, 자신은 이런 것을 보자고 수많은 피를 흘린 것이 아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폐허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던가. 어느 나라의 여왕이 피를 쏟는 고통으로 외친 저주가 귓가에 선연한 듯했다.

뒤를 돌아본 아스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이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배신을 당한 것도 검공이고 죽은 것도 검공이다.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본인이 살아 돌아온 검공일리는 없을 텐데.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아스탄은 어깨를 쓸어주고 싶은 충동에 손을 움찔거렸다. 시선을 느낀 윤이 고개를 보자, 아스탄은 못 본 척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하… 하…….”

앉아 있는 데도 머리가 빙글 돌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하늘이 빙빙 도는 듯 충격이 전해진다. 이 기분을 어떻게 해소해야할까. 미친 듯이 욕을 하면 괜찮아질까, 검을 휘두르면, 대자의 무덤에 가서 마구 화풀이를 하면….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아서 윤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쳤다. 그리고 힘없이 그 위로 머리를 늘어트렸다. 정수리 위로 자늑자늑한 온기가 전해진다. 어느새 다가온 아스탄이 머쓱한 표정으로 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아스탄?”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 말이다.”

위로에 서툰 남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배신당한 것도 아니지 않나. …겁먹지 마라.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겠다. 그런 건 졸자들이나 하는 짓이야.”

“…너는 위로에 참 서투르구나.”

윤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자그마한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들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래도 고마워.”

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상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이니 영영 진실을 듣지 못할 것이고, 사과를 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자신은 살아 있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고, 그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상처에 새살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밤은 깊었고 저 멀리서 이국의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등잔의 촛불이 흔들리며 깜빡깜빡 사위가 어두워졌다 밝아지길 반복하였다. 친우와 대자의 후예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은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어쩐지 부끄러워진 윤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자신이 아스탄을 만나겠다고 결심했을 때, 솔라는 윗선에 보고도 하지 않고 아스탄의 사실로 데려왔다. 그리고 아스탄은 잠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위해를 가했어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아스탄, 이런 사실에 허락도 받지 않고 사람을 함부로 들여도 되는 거야?”

윤의 지적에 아스탄이 의아한 얼굴로 물음을 되돌렸다.

“그것이 어째서? 네가 친구가 되자고 하지 않았나.”

“친구에게도 이런 파격 대우를 하는 일은 잘 없어. 네 목이 뎅겅할 뻔 했다고?”

“…시황제께선 검공에게 특별한 권리를 내렸다고 하지. 언제 어느 때던 허락받지 않고 독대를 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다.”

아스탄은 제가 말하고서도 머쓱한 듯 윤의 시선을 피했다. 옅은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귓불이 붉은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이소설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과 참새꽃님, 짱좋아님, 평량님께 감사드립니다 8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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