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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곳.
방으로 돌아온 윤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앉았다.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했다. 황가의 광증과 자신이 연관이 있다는 폭탄 발언을 던지고 나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건지, 도무지 그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않는다. 그러면서 이레인은 만났다고? 윤은 순간 짜증이 울컥 하고 치솟았다.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만나러 간다.
생각을 마친 윤은 거칠게 종을 울렸다. 시종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섰다. 이전과 다른 사람이라 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뀐 시종은 이전 레나드의 시종장이었던 브릭을 떠올리게 하는 남자였다. 손을 대면 칼로 베일 것처럼 빳빳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사내. 결코 평범한 시종이 아니었다.
“이전에 있던 시종은 어디로 갔지?”
“그는 보직이 변경되었습니다. 하이어드 경을 담당하는 건 앞으로 제가 될 것입니다.”
“보통 시종으론 보이지 않는데….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지?”
윤의 예리한 지적에 사내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다.
“제 이름은 솔라 아이그너. 현재 노스트라드에 머무는 아이그너가 셋이나 되니 솔라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이그너? 브릭 아이그너가 자네들의 선조가 맞는 가?”
“예. 공부를 열심히 하셨군요.”
“뭐 이정도 쯤이야. …이게 아니지, 이곳에 있는 아이그너가 셋이라고?”
“공작 전하의 보좌관인 제르센 아이그너가 형, 이레인 저하의 기사인 에단 아이그너가 제 동생이 됩니다.”
제르센과 솔라는 서로 닮았다. 어쩐지 칼 같은 분위기도 브릭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에단은 영 따로 노는 사내였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브릭과 전혀 닮지 않았다. 본인은 냉철하게 군다고 생각하는데 제법 허술한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에단 아이그너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도 브릭을 전혀 연상치 못했다.
“에단은 전혀 닮지 않았는걸.”
“집안의 이단아지요. 기사가 되고 싶어서 가출한 귀여운 동생이니까요.”
산만한 덩치의 기사가 ‘귀여운 동생’이라고? 윤의 뜨악한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솔라는 가벼운 웃음을 입가에 떠올린 상태였다. 솔라가 미소 짓자 송곳처럼 날카로운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만만치 못하게 볼만한 예리함을 갖추고 있었다. 역시 브릭의 후손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녀석도 언젠가는 포기를 하고 가업을 잇게 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사족이 길었군요. 하이어드 경,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스탄, 아니 공작 전하를 만나고 싶어.”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솔라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솔라를 따라 구불구불 복잡한 길을 걸었다. 공작성의 비밀 통로 중 하나인데 이렇게 외인에게 함부로 공개해도 되는 건가? 이미 백 년 전부터 알고 있던 통로긴 했지만, 윤은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뒤따랐다. 게다가 알현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데려다주다니. 도대체 아스탄은 무슨 생각인거지? 의문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내가 왔음을 고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전하께서 명하셨나이다.”
솔라는 그 이상 답해줄 용의가 없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망설이던 윤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전에 방문했던 공작의 사실이 아닌, 좀 더 내밀한 느낌의 서재였다. 베일이 내려진 침대와 책상으로 보아 침실로도 사용하는 듯 했다.
아스탄은 셰즈 롱그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꽤나 깊은 잠에 들었는지 윤의 인기척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고 잠든 모습이 그답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장난기가 솟아난 윤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었다. 수신호위 넷이 잔뜩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지마. 공작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윤은 빈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어이, 아스…….”
깜짝 놀라게 만들려던 윤은 멈칫했다. 아스탄의 얼굴은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저 성격이 고약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잠든 게 아니었다. 악몽이라지만 그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합니다.”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아스탄이 속삭였다. 이마에 얹은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얼마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마디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져 있었다. 이미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되었음에도 감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비는 멈추지 않았다. 수신 호위들에게선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단 뜻이다.
남자가 조용히 우는 모습은 메말랐다 생각한 윤의 마음을 건드렸다. 가여울 정도로 안타깝고 약한 모습은 마치 잠잠한 호숫가에 돌을 던진 것과도 같았다. 얼음이 언 것처럼 고요한 수면이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아이들은 대개 크게 소리 내어 운다. 자신이 서럽게 울면 누군가 봐줄 거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누군가 보아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은 저처럼 조용히 운다. 제 아무리 큰 소리로 울어봤자 안아주고 달래주는 사람이 없을 때, 속으로 삭히고 삭히다가 그 응어리가 끝까지 차서 흘러넘치면 조용히 흘려보내는 것이다.
윤은 저렇게 우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울었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윤이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아스탄은 그란디아라는 대제국의 후계자였으며, 본인 역시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남자다.
궁금증도 잠시,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악취미는 없었다. 게다가 우는 남자를 두고 생각에 골몰하기도 민망해서 그를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아스탄, 일어나.”
손을 뻗어 가볍게 아스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스탄이 눈을 번쩍 떴다. 습기에 젖은 눈동자는 마치 보석 같아서 순간 넋을 잃었다. 그가 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야!”
억센 손길로 잡아당기자 시야가 급변한다. 푹신한 소파의 감촉이 등으로 느껴진다. 윤은 한 바퀴 빙글 돌아 소파에 눕게 되었다. 윤의 위로 아스탄이 올라탔다.
“아스탄?”
“드디어…….”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윤은 아스탄을 올려 보았다. 자신의 품에 가두듯 그는 윤의 머리 옆으로 양팔을 짚었다. 배와 배가 맞닿았고, 다리가 얽혔다. 민망하기 그지없는 자세에 윤은 남자를 밀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야, 무거워.”
제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압도적인 체격 차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다치게 할 각오로 밀쳐낸다면 밀어낼 수 있으나 그리하고 싶진 않았다. 이전부터 건장한 체격이라 여겨왔지만, 올라탄 그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거웠다. 윤은 끙, 소리를 내며 어깨를 마구 때렸다. 아스탄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뭘 기다리는데?”
“그대가, 당신이 오기를.”
윤을 응시하는 아스탄의 붉은 눈은 무척 사랑스럽고 다정한 빛깔을 띠었다. 차갑고 냉정한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는 피어나는 꽃과도 같다. 남자의 웃는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거라 생각지 못했다. 멍하니 쳐다본 것도 잠시, 윤은 그의 뺨을 쿡쿡 찔렀다. 가만히 웃기만 하는 모습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았다.
“이봐, 아스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의 ……이여.”
아스탄은 살포시 미소 짓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내려 윤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물기로 젖은 입술은 무척 뜨거워서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마치 신을 숭배하는 신관의 행위처럼 신성하다. 동시에 신을 더럽히고 타락하게 만들고픈 욕구가 담겨 있었다.
“하….”
윤은 아연한 눈으로 아스탄과 그의 하체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닿는 이 단단하고 뜨거운 감촉은 무언가. 묵직하게 윤을 짓누르는 것은 남자라면 모를 리 없는 부위다.
“정신 차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윤은 반사적으로 그를 걷어차고 말았다. 덕분이 셰즈 롱그 밖으로 밀려 떨어진 아스탄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며 눈을 깜빡였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낙법을 사용해 크게 다치진 않았다. 졸지에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그는 범인을 바라보았다.
“친구, 나 좀 구해주지 않을래?”
그림자속에서 튀어 오른 수신 호위들이 윤을 감싼 채, 검 날을 목에 드리우고 있었다.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어 올린 윤이 아스탄을 향해 뻣뻣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아스탄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