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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곳.
만찬이 끝나자마자 윤은 장미 정원 뒤편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윤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그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죄책감도 잠시, 윤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은 곧 떠날 사람이 아닌가. 이전이었다면 레나드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눴을 테지만 지금은 의미 없다고 제 행동에 합리성을 부여했다.
남작의 작위도 내려질 수 있는 20대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다. 게다가 검공과 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었지만, 황제를 대자로 삼고 본인은 공작이었던 터라 현재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지 못했다.
한동안 검을 휘두르던 윤은 연무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련을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서 환하게 밝혀져 있던 궁의 불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윤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었다. 사위가 어두워졌다. 시종이 목이 빠져라 자신을 찾을 걸 알고 있을 테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스탄이라.”
북극성(北極星)의 고어가 아스타였다. 그에서 따온 이름인 것 같았다. 별이라기 보단 태양에 더 가까운 느낌을 주는 청년이다. 어린 나이지만, 사람들을 휘어잡는 위엄과 기세가 대단했다.
“윤 하이어드.”
윤은 자신의 이름을 입안에 굴려보았다.
“하필이면 하이어드가 또 뭐야? 고용된 윤?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망할 놈!”
꼼짝없이 묶이게 생겼다고 불평하며 바닥을 탕탕 내려쳤다. 하지만 무를 순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공작이 자신의 신분 증명을 해준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아버지와 권력투쟁을 하고 있다는 공작. 그를 도와서 승리하게 되면 황가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목걸이를 꺼내서 문스톤을 확인한 윤은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1/10도 충전되지 않았다. 간신히 파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는 펜던트를 다시 품안에 집어넣었다.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 자제하라 했을 텐데. 그리고 그 망할 놈은 혹 나를 뜻하는 건가?”
뒤쪽에서 곧장 잔소리가 들려왔다. 윤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스탄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는지 얇은 튜닉 위에 가운을 걸쳐 입었고, 늘 단정하게 쓸어 넘긴 머리카락도 편하게 늘어트렸다. 덕분에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앳된 느낌을 주었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무장에서 자주 만나긴 했지만, 지금 눈 앞에 나타날거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스탄?”
“잔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군.”
“하하, 안녕. 좋은 밤이야.”
윤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스탄은 윤의 곁으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망설이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거침없었다.
“네 덕분에 별 걸 다 해보는 군. 이렇게 더러운 바닥에 앉는 건 너와 함께 있을 때 밖에 없다.”
“앉으라는 말 한 적 없어.”
“……친우의 다리를 아프게 할 속셈이었나.”
아스탄이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이 대꾸했다.
“아참! 이게 아니지.”
문득 만찬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멱살을 쥘 듯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만났다. 네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이미 거절했잖아? 그런데 뭐? 공작의 기사? 밑장 빼기 있냐?”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믿을 텐가?”
윤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을 가만히 들어주던 아스탄은 질문을 되돌렸다.
“날 보호한다니?”
“황제가 네 존재를 눈치 챘다.”
“……황제가?”
“그래. 이 그란디아를 지배하는 위대한 황제, 팔라티온. 나를 죽이려는 나의 아버지께서 말이야.”
아스탄의 미소는 음울했다.
“생각보다 시기가 빨랐다. 네가 좀처럼 튀었어야 말이지.”
“음….”
“널 탓하는 건 아니다. 그런 탓에 척 베스파뇰이 이레인의 호위로 온다더군.”
“척 베스파뇰?”
“너도 보았을 텐데, 이레인을 습격한 척안의 기사 말이다.”
“그 놈이 이레인의 호위가 된 단 말이야? 뻔뻔하군.”
습격 당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던 외눈의 기사를 떠올린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갈취한 검의 주인이기도 했다. 돌려줘야하나? 상황에 맞지 않게 잠시 잡생각에 빠졌다.
“외유를 나가던 중 습격을 받은 아들을 가련하게 생각한 황제께서 무려 자신의 수신호위를 보낸다고 하셨다.”
아스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말 속엔 뼈가 들어 있었고, 조롱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널 초대했다. 검공과 같은 나라에서 온, 소드 익스퍼트 경지의 검사가 무척 궁금하다고 하시더군. 그자도 눈치 챘을 거다. 네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걸.”
“그런가.”
“적어도 널 지킬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내 휘하에 있는 자라면 황제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해.”
“아스탄. 난 말이야.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알고 있다. 넌 충분히 강한 검사지.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는 꼭 칼과 창만이 전부인 건 아니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널 지키기 위해서고, 오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직나직하게 전해지는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다. 윤이 검공이 된 이후, 그를 지켜주겠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그가 보살피고 돌봐야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면서. 그런데 마음이 술렁거렸다.
“내 휘하에 있다 하나 너를 결코 얽매거나 강제로 겁박하지 않겠다. 연회의 밤, 네게 검은 늑대 기사단장의 지위를 내리겠다. 노스트라드 공작이 겸임하는 자리이나 내 호위를 핑계로 편법을 쓰면 가능할 것이다.”
검은 늑대 기사단. 윤이 초대 단장으로 활약한 그란디아 최고의 무력 집단이다. 노스트라드 공작의 휘하에 소속된 소수 정예 집단으로, 단장에 한하여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면책권이 주어졌다. 검공이라 불리던 윤조차 창설할 때 잡음이 일었던 위치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란 뜻이다.”
“…내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윤은 혼란스러워졌다. 아스탄의 어깨를 붙잡았던 손에 힘이 빠진다. 그러자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강한 시선으로 윤을 얽매어 왔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친우가 되자고. 나는 친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네가 곁에서 내게 가르쳐라.”
“…….”
“그리고 네가 갖고 싶다는 건 사실이야.”
아스탄이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습하고 질척한, 남자만이 품을 수 있는 열기를 가진 눈빛이, 손목을 붙잡은 뜨거운 열기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불길에 델 것만 같았다.
윤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검사’인 자신이 탐난다는 소리일 텐데 다른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도끼병도 말기다. 게다가 아스탄과 자신은 같은 성별 아닌가. 내가 외로움에 미쳤나보다. 쿵쿵 뛰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런 대사는 여자에게 써먹는 거야. 난 남자라고?”
장난스러운 대꾸에 아스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신비로운 내력을 지닌 이세계인, 윤. 그의 자유로운 모습은 마치 바람과 같다. 새라면 새장에 가둬놓으련만, 바람을 잡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잡아둘 수 없기에 갖고 싶어졌다. 아니 갖고 싶다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끓어오르는 마음은 마치 불덩어리 같이 뜨거웠으나 무어라 표현해야할지 그 이름을 찾지 못했다. 그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이 화제는 그만하는 게 좋겠군. 이 늦은 시간에 너는 무얼 하고 있었지? 귀족들이 한참이고 널 찾다가 실망한 채 돌아가더군.”
“무의미한 친교를 나누는 덴 관심이 없어서…. 그냥 도망쳤어.”
“그런가.”
“바람이 시원하네, 하늘도 맑고. 북쪽답지 않은 날씨야.”
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그의 머리카락과도 같은 검은 색이다. 푸르게 빛나는 보름달이 하늘의 중심에 떠올라 있었다. 윤을 따라 고개를 들어 시야에 하늘을 담은 아스탄이 긍정했다.
“그런데 아스탄 너는 이 시간까지 깨어있었던 거야?”
“나도 잠이 오질 않아서.”
아스탄은 호칭이 바뀌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어느새 본공을 나로, 그대를 너로 칭하고 있었음을, 권위를 보이기 위해 쓰던 궁정식 말투 역시 자연스러워짐을 알지 못하였다.
“밤에 더 자주 보는 것 같네. 잠을 못자는 건가?”
“비슷하다. ……늘 꿈을 꾸거든.”
“어떤 꿈을 꾸기에 그러는 거야?””
“누군가를 죽이는 꿈.”
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스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쉽게도 부친은 아니야.”
“정말 사이가 나쁘구나.”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좋아하는 멍청이는 없겠지. ……나의 어리석은 동생은 아직 포기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말이야.”
북쪽의 한기를 몰고 온 바람은 위로하듯 아스탄의 뺨과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한숨이 나올 만큼 잘생긴 남자는 아프고 외로워보였다. 자세하게는 알지 못했으나 누군가를 죽인다는 꿈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모른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저 추측만 할 뿐.”
문득 생각이 닿는 곳이 있었다. 이전 밀실에서 술을 마실 당시, 그가 읊조렸던 이름. 흐트러진 목소리라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존칭을 붙여 불렀다. 그 사람인 것일까.
“꿈 내용이 정확하게 뭔데?”
“꿈속의 나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죽이지. 그의 망연한 표정이 가슴을 찔러드는데, 나는…….”
아스탄의 목소리가 괴롭게 흐트러졌다.
“그 사람이 죽어서 슬퍼?”
“모르겠군. 기쁜지, 슬픈지. 꿈속의 나에게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나’는 고통스럽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아스탄이 가만가만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잘생긴 미간은 일그러져 있었다.
윤은 처음으로 태산같이 차갑고 오만한 남자가 약하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싶었다.
레나드야.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거냐.
윤은 신음했다. 친우와 대자의 피를 이은 후손들을 미워해야했다. 아니 밉다. 허나 동시에 가엽고 마음이 쓰인다. 차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양가감정이 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너는 믿어도 될까.
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스탄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예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도 그는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친구가 되자고 하는 헛소리를 받아들였다. 술을 마시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대신 술을 마셨다.
아스탄의 행동에 점점 마음속에 얼어붙은 응어리를 녹아내리고 있었다. 얼음이 모두 녹고 나면 무엇이 남아있을까.
“그래, 너이니 솔직하게 말하겠다. 그 꿈과 네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내가?”
“그래. 검공과 같은 곳에서 온 네가…. 이 끝없는 악몽의 실마리를 쥐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스탄의 붉은 눈이 가라앉았다.
“꿈속의 내가 살해하는 자는 아무래도 검공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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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몇 편을 생각하고 계신건가요?
A. 제 희망 사항은 약 100편의 초장편 대하호모치정서사극입니다...^_ㅠ
하지만 제 능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추천과 코멘트는 제가 글쓰는 원동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