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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곳.
월스턴은 안절부절 못하며 거대한 나무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문 사이로 안즈마네의 울음 섞인 신음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올 때마다 월스턴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안절부절 못했다. 윤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때는 제국력 10년. 혼란스럽던 세상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으며 안정된 통치 위에서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하는 때, 월스턴과 안즈마네의 첫 번째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각자의 일로 바쁘던 사총사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오찬을 가지던 중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후식을 먹던 도중 안즈마네가 심한 진통을 호소했다. 그녀는 곧장 산실로 옮겨졌고, 그들은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했다.
기도하듯 맞잡은 손 위로 이마를 가져다댄 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을 찾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님. 벨라드님. 우리 앤지가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앞의 세 분은 여기 계시는지 모르겠지만요.
“새꺄, 정신 사나워! 좀 가만히 있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선 율리히가 월스턴을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율리히 역시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다리를 달달 떨었다.
“흐으윽! 악!”
“마마, 좀만 더 힘을 내시옵소서!”
안즈마네의 고통에 찬 비명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율리히는 “내가 진통 마법이라도 써줄게!” 하며 난입하려다가 신녀에게 호되게 혼난 후 쫓겨나야했다. 시커먼 사내 셋은 결국 나란히 앉아서 아기가 태어나길 속절없이 기다렸다.
“망할, 내 생에 아이는 저녀석 하나 뿐이야.”
월스턴이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190cm에 달하는 커다란 덩치의 미청년이 안달복달하는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어서 윤은 조금 웃고 말았다. 그러나 걱정되는 건 윤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이 발달한 한국에서도 아기를 낳다가 죽는 산모들이 많았다. 현대와 비교하면 그란디아의 의술은 열악하기까지 하다. 대마녀라하지만 안즈마네 역시 평범한 사람이다. 잘못될까 겁이 났다.
“아- 아악!”
안즈마네의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동시에 흐애앵- 하고 아기 우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태어났구나!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요정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안도와 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월스턴의 표정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나이 오십을 훌쩍 넘겨 얻게 된 첫 아이. 어떤 기분일까. 윤은 궁금해졌다.
거대한 나무문이 열리고 조산을 담당하는 신녀가 조심스럽게 금줄을 끊고 밖으로 나왔다. 월스턴을 향해 기쁜 목소리로 소리로 고했다.
“아기씨께서 무사히 태어나셨습니다! 황자님이십니다!”
“안즈마네는 무사한가?”
월스턴이 신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검의 끝을 본 초월자. 쉰이 다된 나이임에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외모에 신녀의 뺨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예, 마마 역시 건강하십니다.”
신녀가 고개를 숙였다.
윤이 월스턴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른 들어가 봐.”
“그, 그래야지.”
월스턴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으나 한줄기 슬픔이 깃들어 있어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율리히와 윤은 출산을 끝낸 안즈마네가 몸을 단장하고 손님을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그들에게도 산실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본디 산실은 외간 남자에게 공개하지 않는 금역이나 그들은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허락되었다. 무려 삼십 년을 알아온 또 다른 남매고 친우였다.
안즈마네의 품에 안긴 아기는 무척 작았다.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솜털처럼 보송보송했고, 아직 얼굴이 붉었다. 눈을 꼭 감고 양 주먹을 뺨에 가져다댄 채 잠이 들어 있다.
“못생겼어. 원숭이 같아.”
율리히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인정사정없는 감상을 내뱉었다.
“이 새끼가?”
월스턴은 가차 없는 응징을 시도했다. 퍽-. 커다란 주먹에 뒤통수를 맞은 율리히의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악! 왜 때려!”
뒤통수를 붙잡은 율리히는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가도, 아이가 흐애앵- 하고 콧잔등을 찌푸리며 울 기세를 보이자 제 입을 틀어막으며 눈치를 본다.
“잘했어, 여보.”
안즈마네가 엄지를 치켜든다. 우스운 일련의 희극에 자그맣게 웃던 윤은 안즈마네의 품에 안긴 아기에게 집중했다. 아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너무도 신기했다.
“윤, 만진다고 큰일 나는 거 아냐. 한번 안아봐.”
안즈마네가 후후 웃으며 아이를 내밀었다. 윤은 엉겁결에 아기를 받아들었다. 놀라우리만치 가벼운 무게. 마치 깃털 같다. 어설프게 안은 터라 몹시 불편할 텐데도 아기는 울지 않았다. 하품을 크게 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즈마네와 같이 맑은 사과빛깔의 눈동자가 윤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쌔액, 웃었다.
“어머, 네가 마음에 들었나봐.”
“역시 제 대부를 알아보는 건가?”
안즈마네가 웃으며 말했다. 월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스턴이 대뜸 제의했다.
“윤, 네가 대부가 되어줘.”
“내가?”
“그럼 저놈한테 맡기겠냐?”
월스턴은 ‘역시 원숭이 같아.’하고 매를 부르는 감상을 내뱉는 율리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엔 안즈마네가 사정없이 율리히의 등짝을 때렸다. 아야야야, 하며 율리히가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봤지, 너라면 저놈에게 대부를 맡기고 싶겠냐?”
“아니.”
윤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네가 지어줘. 앤지도 동의 한 거야.”
“아냐, 너희들의 아이인걸. 무려 첫 번째 아이인데 직접 이름을 지어줘야지.”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려던 윤은 자신의 품에 아이가 있음을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월스턴이 하하 웃었다.
“대부가 우리 아기의 이름을 지어준다면 더 뜻 깊을 것 같은데? 넌 무려 검공이라고.”
“어서, 윤! 우리 아기를 그저 아기라고 부르게 할 거야? 네가 한동안 고대어 사전을 열심히 본 걸 알고 있어!”
안즈마네도 웃으며 재촉하자 윤의 뺨이 붉어졌다.
“……레나드.”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대어로 레나드는 용맹하고 씩씩함을 뜻한다. 대제국의 후예가 될 아이가 무사히 자라 용맹함을 뽐낼 수 있기를. 아이가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럼 레나디온이네. 좋은 이름이야.”
황가의 후계자에게 황룡 가리온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에서 고대어 이온을 붙이게 된다. 레나드는 시황제 월스턴의 유일한 아들이니 레나디온이 되는 셈이다. 월스턴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이는 작은 입을 벌려서 하품을 했다.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품에 안긴 무게는 무척 가벼워서 깃털 같았다. 이대로 날아가 버릴까 무서울 정도다. 마치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가 어미를 따르듯, 윤은 레나디온에게 각인 된 것처럼 그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녕? 레나디온. ……네 대부야. 널 지켜줄게.”
**
공작의 만찬은 단순히 식사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귀족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권세를 선보이고 교류를 하는 정치의 장이다.
금일 만찬장에 정식으로 초대된 사람은 떠오르는 혜성처럼 나타난 소드 익스퍼트급의 검사 윤, 황태자를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황자 이레인과 은퇴했다고 하나 아직 제국 아카데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맥카터 교수였다.
드넓은 만찬장 중심에 긴 테이블 탁자가 놓였고, 가장 상석에 아스탄이 앉았다. 그리고 아스탄의 왼쪽 대각선에는 이레인이, 오른쪽 대각선에는 맥카터 교수가 앉았다. 마지막으로 윤은 아스탄의 맞은편, 두 번째 상석에 앉았다.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은 벽면에 둘러서서 와인을 홀짝이며 조그마한 대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르센과 에단 역시 만찬장 한쪽 벽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인들의 시선은 모두 이레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형님을 오래 보지 못해 외유를 청해서 노스트라드를 방문했다하나 그가 도망친 걸 모르는 이는 제국에 없었다. 앞으로 황자의 거취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그마한 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르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동생을 불렀다.
“에단 아이그너.”
“부르셨습니까, 형님.”
에단이 마지못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시종장으로 유명한 아이그너 가문의 삼남이나, 기사가 되겠다며 가출한 가문의 이단아였다. 불퉁한 목소리에 제르센의 미간이 꿈틀했다. 평소 제르센은 제 아우와 간단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으나, 오늘은 그가 긴히 필요했다. 윤이라는 자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저자의 정체를 아느냐?”
“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단의 존칭에 제르센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짐작만 할 뿐입니다. 다만 그의 행동이 범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살던 곳에서 평범한 지위를 가진 분은 아닌 듯합니다.”
외알 안경 너머로 제 동생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부정하고 있지만, 에단 역시 아이그너 가문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 무척 뛰어났다.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평범한 내력을 가진 이는 아닐 것이다.
만찬이 시작되었다.
“이레인 크라이슬러, 그대가 왔음에도 우형이 미흡하여 이런 자리를 자주 갖지 못했구나.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길 바란다.”
“예, 형님.”
아스탄이 와인 잔을 들어 올리며 하는 말에 이레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빛에 따라 오색으로 빛나는 크리스털 잔속에서 일렁이는 와인은 피처럼 붉은 빛깔이었다.
“맥카터 교수, 그대가 노스트라드에 와줌을 기쁘게 생각하오. 아우를 잘 부탁하겠소.”
“영광입니다. 전하.”
노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윤. 내 아우를 구해주어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오. 나 아스타시온은 그대를 언제나 반가운 손님으로 생각하리라.”
“전하께 새벽별의 광영이 함께하기를.”
심장 위에 손을 얹은 윤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교수의 눈빛에서 이채가 지나갔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그란디아 왕국 시절 왕위 계승자를 일컬어 ‘새벽별의 광영이 함께하는 자’라 칭했다. 왕이 한낮의 태양이라면, 왕태자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태양. 지금은 사장된 예법까지 통달하다니, 참으로 신비로운 자라고 생각하였다.
황가의 만찬답게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날라져왔다. 입맛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는 가리비를잘게 썰어 크림으로 만든 후 소스로 얹은 샐러드였다. 윤은 정확한 식기를 사용해 한입 먹은 후 손을 떼었다. 그리고 와인을 마셔 입을 헹궜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갈 만큼 고운 빛깔에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옥수수 크림 스프 역시 정확히 두 입을 먹고 내려놓았고, 태어난 지 이개월 된 새끼 염소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를 썰 때는 우아한 팔각도를 유지하며 식기에 나이프가 스치지 않고 정확하게 고기만 자르는 모습을 보였다.
윤은 자신이 선보인 완벽한 예법에 사람들이 아니꼽게 보던 시선이 바뀜을 깨달았다.
'고맙다. 아론. 네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구나.'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보좌관 아론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는 겁이 없기로 유명해서, 다들 무서워하던 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윤에게 “당신이 제 아무리 검공이라 할지라도 그건 칼질을 하는 전쟁터에서나 통하는 이름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전쟁터는 대화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품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는 존중을 보내지 않습니다! 다시! 팔이 쳐졌습니다! 다시! 식기에 칼이 스쳤지 않습니까! 다시! 다시! 다시!” 하고 다그치길 주저하지 않았다.
아론의 혹독한 교육은 무식하다 무시 받던 윤을 귀족적인 사내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주었다. 그 훈련은 지금도 톡톡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마지막 디저트는 육류로 묵직해진 입을 가볍게 만드는 상큼한 과일 소르베였다.
공작은 소르베에 손을 대지 않고 와인을 마신 후 윤에게 눈길을 주었다.
“윤.”
“예, 전하.”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보고 있는 탓인지 윤은 공손하게 존댓말을 썼다.
“나의 제안은 생각해보았는가.”
“……?”
“그대의 신분을 보증하겠다. 그러니 자유 기사가 아닌 본공의 기사로서 그 검을 바치지 않겠는가.”
손에 와인 잔을 쥔 아스탄은 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제안을 했을 때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검을 바치라 요구한다. 심지어 조건 없이 돕겠다고 말했고, 그 역시 동의하지 않았던가.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당장은 이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우선은 아스탄의 말을 따르기로 결론을 내렸다. 생각을 정리한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후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극상의 예를 갖추었다. 아스탄의 이채로운 눈빛이 윤에게 꽂혔다.
“그래, 그대의 성은 하이어드, 하이어드가 좋겠군. 단승에 한하나 그대의 노력여하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겠지.”
귀족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어드. 높이 뛰는 자라는 뜻의 고대어였다. 단승 귀족의 성씨라 하나, 공작이 그를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윤 하이어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다. 기념의 연회를 열지.”
공작이 와인 잔을 높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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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