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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19화 (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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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곳.

윤이 의아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한참동안 자신의 책 더미를 뒤적거리던 그가 종이뭉치를 꺼내더니 윤의 낙서와 비교하듯 번갈아보았다. 이내 고개를 든 노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흡사한 형태입니다! 일치하는 것도 있군요. 윤, 이 문자를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레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스승님, 그 종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1차 원탁회의에 참가했던 검공이 남긴 서류입니다.”

1차 원탁 회의. 기억을 더듬던 윤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란디아가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회의였다.

왕이 된 월스턴은 원대한 꿈을 품었다. 바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바로잡는 꿈, 대륙일통이다. 월스턴과 윤 그리고 안즈마네는 말을 달려 수많은 땅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곳이 바로 사우스클라인 지역으로 이전엔 클라인 왕국이라 불리던 곳이다.

대륙 남쪽에 위치하여 비옥한 대지를 가진 클라인 왕국은 마지막까지 저항을 했는데, 월스턴은 그들을 정복하기 위해 갖은 묘책을 짜내었다. 마녀들을 동원해 가뭄을 불러오고, 무역 봉쇄를 시행하였다.

제 아무리 곡창 지대라 하나 사람들은 식량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법이었다. 그 식량조차도 잇단 가뭄에 바닥을 드러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병마에 손톱이 부러지도록 바닥을 긁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결국 클라인 왕국의 피셔 10세는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그란디아에 복속되길 자처한다. 클라인 왕국이 사우스클라인이 되어 제국에 복속되며 제국을 지탱하는 4대 영지인 노스트라드, 웨스트올로, 이스트민스트, 사우스클라인이 완성되었다.

제국의 운영을 위하여 시황제 월스턴을 비롯해 4대 공가(公家)의 지배자들이 모여 최초의 회의를 열었다. 이를 1차 원탁 회의라 칭한다.

이때 검공, 즉 노스트라드 공작이 남긴 말은 유명하다.

“그대는 나의 주공이자 나의 친우, 그리고 영혼의 동반자입니다. 내 검은 그대의 적을 위해 싸울 것이고, 나의 방패는 그대의 적을 막습니다. 나의 뜻은 그대의 뜻과 함께합니다. 그대는 왕관의 무게를 아는 자, 나는 기사의 도리로서 그대의 뒤를 따르며 같은 길을 걷겠습니다. 그대의 광영이 영원하기를.”

이것이 바로 이후 수많은 기사의 맹세에 인용된 검공의 맹세다. 노인은 벅찬 표정으로 검공의 맹세를 읊었다. 이레인의 표정이 흥분으로 반짝거렸고, 라야의 눈이 감동으로 촉촉해졌다. 윤은 자신의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짐을 느꼈다. 자신은 결코 그런 말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저 긴장한 친우에게 “월스턴,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라고 했을 뿐이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역사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1차 원탁회의에서 검공이 남겼던 글입니다. 비록 사본이라 흐리긴 하나, 해석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이 문자를 아시겠습니까?”

노교수에게서 종이 뭉치를 넘겨받은 윤은 자신의 글씨가 맞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노교수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뜻도 알고 있습니다.”

“검공과 같은 곳에서 오신 겁니까?”

“…예.”

윤은 머뭇거리다 답했다. 노교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은 무척 환했다. 빛이 바랜 회색 눈동자는 젊었을 때의 것처럼 열기로 반짝거렸다.

“그 분의 출신지가 어디입니까? 제국에 방문한 차 대륙 사람들 중 아무도 이 문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일 겁니다. 검공과 제가 살던 한국은 차 대륙에서도 동쪽 끝에 위치한 곳, 아벨라르 대륙에 오려면 서쪽으로 육지를 가로질러 두 달을 배로 이동해야하니 쉽지 않은 일이지요.”

윤은 준비해두었던 거짓말을 매끄럽게 풀어냈다. 설령 차 대륙의 사람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소규모 왕국이라고 우긴다면 그들이 어찌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겠는가. 제법 설득력 있는 거짓말이었다.

“……한국! 그렇군요. 검공은 차 대륙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군요!”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입니다.”

“이것을 학계에 발표한다면, 제국이 놀랄 겁니다. 검공의 출신은 이제껏 베일에 쌓여있었지요. 차 대륙 사람이라는 것도 그저 추측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7황자 저하의 스승을 맡기로 한 것은 제 생에 가장 큰 행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 불가해로 남았으나 오늘 그 수수께끼가 풀릴 듯합니다. 오, 벨라드시여.”

노교수는 경건한 표정으로 성호를 그었다. 이레인과 라야도 눈을 감고 기도에 동참했다.

“……망했어.”

윤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은 채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낙서의 내용은 결코 그들이 예측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루해 뒤지겠다. 여기 음식 개맛없음. 김치 먹고 싶다. 아저씨들 재수 왕 ㅗ]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글씨를 읊조렸다. 노교수는 눈물까지 글썽글썽해하며 감동에 벅찬 목소리로 자신의 감상을 표현했다.

“이렇게 읽는 것이군요. 한 번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지루해 뒤지겠다. 여기 음식 개맛없음. 김치 먹고 싶다. 아저씨들 재수 왕 ㅗ]이라 합니다.”

“한국이라는 곳의 언어는 다소 딱딱한 발음을 가지고 있군요.”

“아무래도 대륙 공용어와 비교하면 그렇지요.”

대륙 공용어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발음을 가지고 있다. 대륙 공용어에 익숙한 그들에게 한글은 다소 각진 발음으로 들릴 것이다.

“이 뜻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그리 중요하진 않은 내용입니다. 그저 이 회의에 대한 검공의 느낌을 적어두었을 뿐입니다.”

“아! 아닙니다. 가르쳐주지 마십시오. 윤님, 부탁이 있습니다. 이 문자를 어떻게 읽는지.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도와주십시오. 스스로 해낼 생각입니다. 이 늙은이 일생의 부탁입니다.”

노교수가 촉촉한 눈으로 윤을 보며 부탁해왔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체면 불구하고 울음을 터뜨릴 기세여서 결국 윤은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한글을 써댄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저걸 어떻게 꾸며낸다.’

노인이 아니라 자신이 울고 싶었다. 윤은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수업이 끝난 후엔 윤과 이레인이 정원으로 나와서 휴식 시간을 즐겼다. 정확히 말하면 윤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자 이레인이 따라 붙은 것이다. 라야와 에단 역시 오랜만에 쐬는 바깥 공기가 나쁘지 않은 듯 밝은 표정으로 그들을 수행했다.

공작성이 자랑하는 장미 정원엔 그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책을 하거나 햇빛을 쐬며 모처럼 맑은 겨울날 날을 즐기고 있었다. 귀족들은 이레인을 알아보고 살짝 무릎을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묘하게 깔아보는 느낌에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방금 지나간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여귀족을 보며 윤이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족에게 하는 인사는 남녀를 불문 오른손을 자신의 심장 위에 얹은 채 허리를 숙임이 옳은 예법이다. 고대로부터 심장은 생명과 신실의 상징. 심장에 손을 얹고 인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당신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극상의 예였다. 그러나 여인은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붙잡은 채 살짝 무릎만 숙였다. 무례하기 그지 없는 행동에 이레인은 익숙한 듯 덤덤하게 넘겼고, 때문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전 괜찮아요. 윤.”

이레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윤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윤의 표정이 돌연 엄하게 변했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레인 크라이슬러.”

“예, 예?”

“정말 괜찮은 거냐?”

“…….”

“아니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냐.”

이레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내색치 않았으나 이레인 역시 마음이 몹시 상했던 듯 그렁그렁한 푸른 눈동자가 윤의 모습을 담았다.

“……괜찮지 않아요. 분해요. 하지만 저는 힘이 없는 황자인걸요.”

“힘이 없다는 핑계로 무시당해도 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살 거라면 가만히 있어도 좋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소중히 여기지 않아. 네 자리는 스스로 네가 쟁취해야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싸워야지. 어떻게든.”

윤이 이레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곳의 아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아이가 아니다. 현실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아이 어른이다. 몸은 어린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후계자 싸움, 가문 간의 알력 다툼. 그 모든 것이 치열한 경쟁이다.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겨서 네 것을 쟁취해내. 가령 네게 힘이 없다면, 힘이 있는 사람을 등에 업어.”

“……힘이 있는 사람이요?”

“나 같은 사람 말이야.”

이레인의 어깨를 가볍게 틀어쥔 윤이 걸음을 옮겼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뻗어 나와 그들을 압박했다. 헉-. 숨이 멎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을 멸시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던 이들이 창백하게 질려 어찌할 줄 모른다. 윤의 눈이 그들을 쳐다보자 어찌할 줄 모르고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다. 이레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나정도 되는 사람을 등에 업었으면 좀 더 자신감 있게 굴어. 이렇게 보여도 나 꽤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윤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까처럼 주눅 든 모습 보이면, 나 화낼 거야. 알겠지?”

“네!”

이레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이 소설을 읽고 추천과 코멘트를 남겨주신 모든 독자분들, 그리고 평량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월스턴이 생각보다 인기가 좋네요. 저도 좋아해요 월스턴~!

후삼국의 후예가 어느분인지는 비밀입니다 핫핫핫 ^0^

오늘로 연재 10일째인데 벌써 18편이 되었네요. 한글로는 10만자. 모두 독자님들의 성원 덕분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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