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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시 만난 세계.
공적인 대화를 끝으로 이레인은 공작성 우측 날개에 위치한 공작의 사실(私室)로 이동했다. 시황제 월스턴의 시기에 축조를 시작해, 현제 레나디온의 대에서 개조가 끝난 공작성은 유백색 대리석과 나무로 구성되어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희게 빛났다.
노스트라드의 부유함을 나타내듯 바깥으로 난 창문은 유리가 아닌 크리스털로 만들어졌으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장미 정원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붉게 만개해 보는 이의 감탄을 살만큼 호사스러웠다.
백 년 전의 공작성과 비교하면 골조는 비슷했지만 많은 부분에 변화가 있었다. 우선 눈에 띄게 화려해졌다. 윤이 통치하던 당시에는 검박하다 싶을 만큼 꾸미지 않았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좌관 아론이 「검공의 성이 초라한 이유는 검만 사느라 돈이 없다, 는 비아냥거림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정녕 좋으신 겁니까?」 하고 구박하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건만. 이제는 그 검박한 흔적도 윤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였다.
‘아론, 네가 봤으면 무척 좋아했겠구나.’
성을 둘러보는 윤의 눈길에 감회가 서렸다.
“천하의 윤 님도 라덴 성의 아름다움이 각별하게 다가오시나 봅니다.”
에단이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윤이 에단을 돌아보자, 그는 짧게 헛기침을 한 후 부연 설명을 보탰다.
“제가 느끼기에 윤 님은 센트리움을 보더라도 큰 감흥 없이 무덤덤하실 것 같았거든요.”
“맞습니다.”
로릭도 고개를 끄덕이며 에단의 말에 동조했다. 이레인이나 라야도 이견이 없는 듯 보여서 윤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너희들 나를 너무 높게 치는 거 아냐? 나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런 걸 보면 당연히 신기한 거야.”
“네, 그렇겠지요.”
“들은 척도 않는 군.”
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너무 실력을 드러낸 탓일까. 저들은 자신을 너무 높이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을 조금 잘 휘두른다는 것을 제외하면 윤도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 주제로 더 이상 이야기했다간 부끄러움에 질식사할 것 같아서 윤은 화제를 돌렸다.
“확실히 아름다운 성이네. 마치 눈으로 지은 것만 같아.”
“노스트라드는 부유한 영지니까요.”
“이곳이 부유하다고? 예전엔 춥고 척박한 도시였는데 말이야.”
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에단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대답했다.
“지금 노스트라드는 제국에서 가장 발달한 영지 중 하나입니다.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대대로 황태자들이 노스트라드의 영주를 겸임했으니까요.”
“황태자들이? 어째서?”
“어째서라뇨? 백년은 된 이야기입니다만…….”
노스트라드로 오는 동안 에단은 윤의 정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세상사에 무지한, 천재적인 검술을 지닌 청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은 차대륙에서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라는 것이다. 아벨라르 대륙에 대해 배우고 익히긴 하였으나 백년 전의 지식에서 멈춰있는 모습을 보건데 교류가 잘 되지 않았던 곳에서 온 게 틀림 없다.
그리하여 에단은 자신의 안에 있는 친절함을 십분 발휘해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선 무엇이든지 윤에게 대답해주려 애썼다. 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도 그의 자존심은 충분히 채워졌기 때문이다.
“노스트라드의 주인이 검공이었던 건 아시죠? 그분이 물러난 이후, 검공을 따르던 검은 늑대 기사단이 자신들보다 약한 자를 공작으로 모시지 않겠다며 항거했습니다. 제국의 북벽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땅이 사분오열되기 직전, 현제 레나디온께서 직접 중재하여 자신의 기사로 삼았지요. 이후 그분의 아들이자 세 번째 황제인 페트루시온이 장성하자 그를 노스트라드 공작으로 명해 제국의 북쪽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지요.”
“그래?”
“노스트라드를 발전시킨 것도 레나디온 황제의 치세에서 이루어졌으니 노스트라드의 영지민들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에단의 부연 설명에 윤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그럼 물러났다는 검공은 어떻게 되었지?”
“모릅니다.”
“……모른다니?”
“검공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제국이 위험에 처하면 반드시 구하러 오겠다는 작별의 인사를 남기고요. 아마 검술의 신이 되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에단이 하하 웃으며하는 실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였다. 윤은 침묵했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이레인이 의아한 표정에 윤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흩트렸다.
“나쁜 녀석.”
윤은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괴롭고 아파야 그에 대한 배신감을 떨쳐낼 수 있을까. 증오는 참으로 이상했다. 잊고 지내려면 잊고 지낼 수 있었지만, 가끔씩 불꽃처럼 살아나 마음을 좀먹었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니까. 윤은 마음을 다잡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공작의 사실은 생각보다 아늑한 분위기였다. 두꺼운 커튼으로 바깥의 햇빛을 가렸고 방의 왼편에 위치한 서가엔 자주 읽는 책들이 읽은 흔적을 남긴 채 꽂혀있고, 물푸레나무로 만든 책상은 고아한 맛을 더했다. 오른편엔 암소의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은 침대보다도 편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타시온 전하께선 알현을 마치고 곧장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그동안 편히 쉬소서. 차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혀, 형님께서 자주 드시는 것으로.”
“커피를 준비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시종은 등을 돌리지 않고 뒷걸음질 쳐 방을 나섰다. 소파의 푹신한 감촉도 즐기지 못한 채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은 이레인은 초조하게 공작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시중인들이 준비한 찻물이 식고 그것을 두 번 쯤 갈았을 때가 되어야 공작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방안에 들어선 공작은 망토를 풀어냈다. 공작이 벗은 망토는 외알 안경의 사내가 받아들어 시중인에게 넘겼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형님.”
“그래, 너도 무탈하였느냐. 이레인.”
이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듯 공작에게 다가갔다. 공작이 힐끔 이레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복동생이라지만 몇 년 만에 만나는 동기간의 분위기는 무척 삭막했다.
“저, 저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제닌 형님께서….”
이레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 소식을 들었다. 안된 일이지. 이제 형제는 너와 나밖에 남지 않았구나.”
“흑, 형님….”
공작이 이레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더 이상 걱정 말거라. 내 이름하에 너를 보호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누구지? 네 기사들 중에는 저런 자가 없을 텐데.”
공작이 윤을 쳐다보며 말했다. 레나드와 똑같이 붉은 눈동자가 응시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 분은.”
이레인이 어찌 대답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 역시 윤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차 대륙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방인. 목숨을 구해주었으며, 스물두 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검사라는 것 밖에 없었다.
윤은 고개를 들어 공작과 마주보았다. 공작은 레나드라고 착각할만큼 닮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달랐다. 레나드의 금발은 황금을 녹인 듯 눈부셨으나 공작의 머리칼은 색소가 옅어 백금색 에 가깝다. 레나드가 소탈하고 상냥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공작은 지배자 특유의 차갑고 우아한 인상을 주었다.
차이점을 찾아낼수록 윤의 머리는 냉정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같은 핏줄이니 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나드 역시 월스턴을 쏙 빼다 박은 외모였지 않은가.
“놀랍군.”
공작이 윤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그에 맞서 윤도 기운을 일으켰다. 마음속에 꾹 눌러두었던 검이 울었다. 제 멋대로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켜 저자와 싸우게 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줄곧 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공작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그 역시 윤에게 맞서 기세를 끌어올렸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검사들이 자신의 기세로 싸우자,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주변 사람들을 짓눌렀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사실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검은 머리의 낯선 청년과 공작이 기세 대결을 지켜보아야 했다.
“제법이로구나.”
정적을 깬 것은 공작이었다. 온몸을 옥죄고 있던 살기가 풀어지자 그제야 숨통이 트여서 에단은 헐떡이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것이 바로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오른 검사들의 기세 싸움이구나!'
일생일대의 대결을 눈앞에서 본 기분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자신은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좌절감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좌절하는 에단과 달리 눈치 없는 로릭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후와, 죽는 줄 알았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형님. 저 사람은 제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입니다.”
“……은인이라. 그가 널 구했나?”
“예, 윤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곳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윤?”
공작이 처음으로 흥미를 드러냈다. 고개만 움직여 윤을 쳐다보던 공작이 몸을 돌려 윤의 앞에 섰다.
“묻겠다.”
“예, 전하.”
놀라우리만큼 우아한 태도로 윤이 고개를 숙인 채 오른 손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귀족적 인사에 구석에서 부복하고 있던 라야는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정해윤이라 합니다.”
“……특이한 이름이군.”
현명한 공작은 윤의 이름을 엉망으로 발음해 자신의 체면을 구기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너를 무어라 부르지?”
“윤, 윤이라 불렀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공작은 윤을 샅샅이 뜯어보듯 살폈다. 이제 십대 후반 쯤 되었을 까. 소년이라 하기엔 원숙하고, 청년이라 하기엔 앳된 남자였다. 밤하늘과도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과 눈은 마치 이세계의 사람이 아닌 양 신비로웠으며, 평민들이나 입는 거친 옷을 입었으나 그에게선 노동이나 가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건장한 아벨라르인들에게 비교하면 남자의 체구는 가냘프게 보였다.
‘헌데 소드 익스퍼트라. 놀랍군.’
공작은 센트리움에 거할 당시 만났던 차 대륙 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눈앞의 청년은 그들과 다른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차대륙인이 아닌 건가? 이국적인 생김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에 대해 강한 흥미가 일었다.
공작은 외알 안경의 사내, 제르센을 향해 작게 눈짓했다. 이자의 정체를 알아보아라. 제르센은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윤이라고 하였나. 동생의 은인은 본공의 은인. 그대를 공작가의 손님으로 대하겠다. 떠나고 싶을 때까지 편히 쉬도록 해.”
공작이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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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여러분과 moni114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