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전생보고서-7화 (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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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시 만난 세계.

“내가 미쳤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쥔 윤이 소리 질렀다. 무릎을 털썩 꿇은 윤은 마지막 희망을 짜내 문스톤을 쳐다보았다. 이미 시공간을 넘는데 모든 마력을 소진하여 흐린 잿빛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문스톤이 우우웅, 하고 힘없는 소리로 공명음을 토해냈다.

문스톤의 마력이 충전되려면 최소 서너 달은 걸렸다. 완벽한 충전엔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니 최소 그 시간만큼 이곳에 머물러야한단 뜻이었다. 그나마 현실의 좌표를 입력해놓은 게 천만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윤은 끔찍한 가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했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던 윤은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냉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명료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건 꼭 좋은 뜻이 아닌 것 같았다. 가지고 있는 건 입고 있던 술에 전 옷과 휴대폰이 전부였다.

충동에 몸을 내맡긴 결과는 뼈아팠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못한 맨발로, 무기도 없이 다른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통화권인 걸 바라면 너무 큰 소망이었던 걸까.”

스마트폰은 통화권 이탈이라며 화면 가득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윤은 자리에 털썩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가볍게 몸속의 마력을 운용해서 남은 술기운을 털어내며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력이 가득한 그란디아의 공기는 물속에 들어갔을 때처럼 부드럽고 묵직하게 그를 감쌌다.

한국에선 마력이 무척 희박했고 오염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그란디아의 공기엔 깨끗한 마력이 충만했다. 빠르게 소드 마스터의 위치에 오른 건 그 차이 덕분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마나를 깨닫는 데만 몇 년에 가까운 시간을 소비한다. 그러나 윤은 단번에 마력을 깨닫고 운용할 수 있었다. 물속에 들어왔을 때처럼 답답한 마력이 항시 그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면, 마법을 배웠어도 매직 마스터의 지위에 빨리 올랐을 것이다.

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북극성이라고 추측되는 별이 반짝이는 걸 보니 세상의 북쪽 같았다. 이곳이 차 대륙(茶 大陸)인지 아니면 그란디아 제국이 위치한 아벨라르 대륙인지도 중요했다.

‘여기가 차 대륙이면 우선 아벨라르 대륙으로 건너 가야해…….’

머릿속으로 냉정하게 우선순위를 세웠다. 아벨라르 대륙에서 좋은 기억은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곳과 익숙한 곳의 차이는 컸다. 차 대륙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언어, 문화, 생활 습관 등 전반적인 것을 익히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후엔 돈을 벌어야지. 일 년은 여기서 보내야하니까.’

이전처럼 신분패를 내밀면 돈이 펑펑 솟아오르던 좋은 시절은 다 갔다. 그와 동시에 레나드의 대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윤의 낯빛이 잠시 흐려졌다.

차분하게 마나를 운용하며 몸 상태를 끌어올린 윤의 기감에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싸움인가? 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위장엔 용병이 최고지. …이 모습으론 정신병자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근처의 나무로 다가가서 가지를 꺾어들었다. 나뭇잎과 잔가지를 손날로 훑어낸 후 대강 몽둥이의 형상으로 만들어낸 윤은 사뿐사뿐 걸어 격전지로 향했다.

유모 라야는 이레인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이레인 역시 유모의 허리를 붙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이레인은 입술을 꾹 사려 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마차 밖의 상황을 주시했다.

상황은 이레인에게 무척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분을 숨기듯 흑의에 복면을 두른 기사들이 총 열 명이지만 이레인의 기사들은 넷에 불과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그들은 이레인을 보호하며 싸워야한다. 형제에게도 뻗쳤던 죽음의 칼날이 이레인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어찌 아비가 되어 자식을 해한단 말입니까.”

유모 라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탄했다.

‘……왜 아버지는 우리를. 우리를 죽이려하는 것일까.’

제도를 빠져나온 이후 노스트라드로 향하는 내내 고민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이레인은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황자로서 용맹하게 죽을 것인가. 소인배로서 보호받다 죽을 것인가.

이레인은 어리고 약했지만 전자를 선택했다. 유모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고 몸을 바로 세운 이레인이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구겨진 상의를 탁탁 펼쳤다. 라야가 고개를 들었다.

“라야, 문을 열어주어.”

“황자님!”

라야가 비명처럼 외쳤다.

“밖으로 나가겠어.”

“아, 안됩니다!”

“내 이름은 이레인 크라이슬러. 비록 반쪽이나마 고귀한 황룡의 피를 이은 자.”

이레인이 웃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당당하게 가겠어, 유모.”

이레인은 마차의 문을 열어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내렸다. 라야 또한 허둥지둥 마차에서 따라 내렸다.

그 사이 이레인의 기사 넷 중 둘은 복면인의 검에 절명했다. 늘 겁이 많던 겁쟁이 막내기사 로릭도 분전하며 싸웠지만, 왼쪽 어깨에 깊은 검상을 입은 상태였다. 호위단장 에단의 상태도 좋지 못했다. 몸 여기저기에 검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복면인들 또한 겨우 둘이 쓰러진 상태였다.

“그만!”

소년의 낭랑한 외침에 복면인의 대장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공격이 멈추었다.

“내 이름은 이레인 크라이슬러. 대제 월스턴의 이름을 이은 자. 무도한 그대들은 누구인가.”

“우리들이 누구인지는 그대가 가장 잘 알 것이오.”

복면인들의 대장은 쇠가 긁는 듯 기분 나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란 찾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이레인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황자님.’하고 이레인을 부르던 애꾸눈의 기사, 척 베스파뇰이다.

척안(隻眼)의 척이라는 재미있는 호칭으로도 유명한 척 베스파뇰은 황제의 호위 기사였다. 암살자로 가장한 이들은 모두 황제의 기사들이며, 아버지는 자신을 죽이려함을 다시금 깨달은 이레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도하다! 황자 저하께 이 무슨 말버릇이란 말인가.”

라야의 호통에 복면인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을 뿐이다.

“내 주군은 그대를 버렸으니, 어찌 황자라 할 수 있겠는가.”

당금의 황제 팔라티온은 미쳤다. 아니 현 황제만 미친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황가에는 광증이 깃들기 시작했다. 불면증과 우울증 같은 가벼운 정신증에서부터, 주색잡기와 색욕에 미치는 자도 있었다.

현 황제는 사람의 피에 굶주렸다.

제 아비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황제는 자신의 충신에게 말했다.

“쓸 데 없는 잉여 인간들이 너무 많구나. 황가에는 나와 후계자만 있으면 되는 일 아닌가.”

이후 황제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차례차례 후계자가 아닌 이들을 ‘정리’해나갔다.

가장 처음 목숨을 잃은 건 황태자 알렉시온이었다. 온화한 성정의 황태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망을 샀지만, 지배자로서 적당하지 못하단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황태자가 된 2황자 아스타시온은 열다섯의 나이에 야만인들이 기승을 부리는 노스트라드로 유배당했다. 그 외에도 황자와 황녀들이 차례차례 아비의 손에 죽어나갔다.

며칠 전 이레인의 바로 손위 형이 되는 6황자 제닌이 살해당했다. 제닌 황자는 유력한 명문 거족인 서튜러 후작의 딸, 샤리크 백작 부인의 외동아들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시녀의 몸에서 태어나 미들네임도 받지 못한 이레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제닌이 죽은 건, 오랜만에 황가의 일원들이 모여 만찬을 즐기던 날이었다. 그러나 황가의 자녀들 중 자리에 참석한 것은 황제와 황제의 후궁들, 그리고 6황자 제닌과 7황자 이레인 뿐. 하가한 황녀들은 참석치 않았다.

그 자리에서 웃고 있는 것은 황제 밖에 없었다. 황제의 후궁과 자식들은 불쌍하리만큼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레인의 형들은 총 여섯 명이었지만, 그중 셋이 살해당했다. 황녀들 또한 황제의 마수를 피해가진 못해서 다섯 명의 누나들 중 둘이 죽었다.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제 자식을 죽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황제는 지독히도 멀쩡했다. 정무를 처리함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게다가 황룡이 내린 축복의 인장은 여전히 그의 왼쪽 손등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챙!

스테이크를 썰던 제닌이 공포로 인한 수전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죄, 죄송합니다!”

황제의 적안이 제닌을 향했다. 마치 말라붙은 핏자국과도 같은 빛깔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부, 부디 용서해주세요! 폐하! 어, 어마마마! 저를! 저를 도와주세요!”

손의 떨림은 온몸으로 번져서 제닌은 가여울 만큼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며 제닌이 보내는 구원의 눈길을 피했다. 심지어 친모인 샤리크 백작 부인조차도 시선을 외면하며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예절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황제는 흠, 하고 짧게 탄식했다. 그와 동시에 제닌의 목덜미에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제닌의 녹색 눈이 허공을 향했다. 천천히 그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비록 네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겠지만 말이다.”

제닌의 피가 묻은 나이프를 핥아 올리며 황제가 속삭였다. 그 모습에 이레인은 전신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꺄아아아악!”

샤리크 백작 부인이 아들의 죽음에 비명을 지르며 졸도했다.

광기를 가라앉힌 황제의 무심한 시선이 이번엔 이레인을 향했다. 이레인은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이레인은 라야와 호위기사 넷과 함께 궁성을 빠져나와 노스트라드로 향했다. 황제의 정적, 아스타시온 황태자가 있는 그곳이라면 황제에게서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노스트라드가 코앞이었는데, 내 운도 여기까지인가 보군.’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황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비록 시녀의 몸에서 났다고 천것이라 무시당했지만, 마지막까지 하찮게 여겨지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이레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내가 여기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이들은 살려주길 바라네. 이들은 죄가 없으니.”

“황자 저하의 귀한 피를 흘리고 살아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오.”

“그대의 용기와 위엄은 황가의 일원답소. 그러니 곱게 보내 주리다.”

“고맙네, 척 경.”

“내가 원한 바는 아니었소. 나를 원망치 않길 바라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척 베스파뇰이 검을 높게 들었다. 그의 용기를 높게 사서 단숨에, 고통 없이 보내줄 생각이었다.

호위단장 에단의 경악한 낯빛과 로릭의 겁먹은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이레인은 최대한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잠깐.”

낭랑한 음성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리 크지 않은 청년의 목소리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레인을 향해 검을 내려치려던 척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의 몸은 실에 칭칭 감긴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죽이려 들다니, 무척 나쁜 사람들이잖아?”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술은 무척 위험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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