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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시 만난 세계.
샤워를 하고 나온 윤은 현일과 나란히 학교로 향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의 체교과로 진학했다. 집도 근처, 부모님도 친구,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같은 학교. 덕분에 둘은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게 되었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매서운 현일은 남자답게 잘생긴 청년으로 성격도 시원시원해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윤의 앞에선 그런 내숭 따윈 벗어던지고 저질 만화책을 보며 낄낄거리며 제 성격을 드러냈고 윤 역시 현일에겐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검도를 시작하게 해준 은인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다. 성격은 달랐지만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다. 윤이 차원이동을 하기 전까진.
장비 가방을 어깨에 걸친 현일이 윤을 돌아보았다.
“자꾸 거절하지 말고 현오 형 말 진지하게 생각해봐. 네 실력 진짜 아까워.”
“복귀하면, 네 자리부터 먼저 뺏길 텐데?”
“내가 쉽게 질 거 같아? 짜샤, 몸이나 먼저 만들어. 이 형님이 진심이 되면 넌 쨉도 안 돼.”
현일은 거칠게 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제 딴에는 쓰다듬는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결이 가는 머리카락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윤이 현일의 손을 밀어내자, 이번엔 거칠게 목에 헤드락을 걸어왔다.
“복귀 건에 해서는 대답 안 해? 이 형님이 질 거 같냐?”
거칠게 윽박질렀지만 그 속엔 진심이 선연하게 묻어났다. 윤은 시선을 내리깔아 바닥을 보았다.
가끔, 그는 모두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3년 전 다른 세상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오십 년의 시간을 살아왔다고. 그동안 너무 힘겨웠노라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비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정해윤.”
“왜.”
“요즘 너 이상한 거 같다. 비밀도 많아졌어. …요즘이 아니지, 한 3년 됐지?”
정곡을 찌르는 현일의 말에 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때까지 말은 안했는데, 좀 섭섭하다. 정해윤.”
내색을 않았지만 현일은 윤의 태도가 서운했다. 본디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란 없었다. 윤은 현일의 첫사랑이 누구인지, 비상금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 지 모두 알고 있었고, 현일 또한 윤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윤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이제 현일은 친구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현일아, 미안.”
현일은 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섬세하니 예쁘장한 얼굴엔 슬픈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추궁할 수 없잖아. 마음이 약해진 현일이 찌푸려진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얘기해. 이 형님이 다 들어줄게.”
“…고마워.”
“나중에 술이나 한 잔 거하게 사.”
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의 곤란한 사정을 깨닫고 더 이상 캐묻지 않는 친구가 너무도 고마웠다.
월스턴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없을 친구고 친형제와 같다 여기던 이인데 이제는 마음의 벽을 느꼈다.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세운 벽이다.
‘레나드.’
윤은 신음하듯 속으로 그 원인인 대자(代子)의 이름을 불렀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아끼던 대자의 배신은 너무도 뼈아팠다. 레나드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어차피 윤은 떠날 사람이었다. 자신이 욕심 없다는 건 대자인 그가 가장 잘 알았을 텐데. 윤이 원했다면 노스트라드는 제국령이 아니라 또 다른 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은 월스턴의 든든한 맹우가 되었고, 레나드의 적을 향해 겨누는 검이 되었다. 그런 시간을 보낸 후에 돌아온 건, 독이 든 술잔이다. 레나드를 떠올리자 마음속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 현일 선배! 해윤 선배! 안녕하세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후배가 알은 체 해왔다. 짧은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이지만 싱그러운 매력을 풍겨왔다.
“…안녕.”
이름이 민영이던가…. 윤은 잠시 후배의 이름을 떠올리다가 얼버무리며 인사했다. 볼을 발그레하게 붉힌 후배, 민영이 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김현일과 정해윤은 한성대 체교과의 명물 콤비로 유명했는데, 두 사람은 다른 타입의 미남이었다. 키가 크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현일과 아이돌 마냥 섬세한 생김새의 윤이다. 성격도 달라서 현일이 장난스럽고 사교적이라면, 윤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로 함께 다니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지만 민영을 비롯한 여자 후배들은 마냥 좋았다. 좋은 거에 좋은 거가 합쳐지자 매우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해윤 선배, 혹시 오늘 오후에 시간 되세요?”
“어? 별일 없는데 왜?”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영이 활짝 웃었다.
“오늘 요 앞에서 학과 모임 있는데 참석하실 거죠?”
“그게 오늘이었냐? 윤이 너 갈 거지?”
민영의 질문에 대신 대답한건 현일이었다.
“나야 뭐… 현일이, 너는?”
“네가 가면 나도 가고.”
“그럼 같이 가자.”
윤이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이 반색했다.
“헤헤, 그럼 두 분 다 오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이따 뵈어요, 선배!”
민영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한 후 가던 길을 뛰어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화장을 다시 해야 했다. 땅을 내딛는 걸음이 경쾌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윤은 현일과 함께 학교 앞 호프로 향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그들을 반겼다. 아직 오후 여섯시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술판이 한창이었다.
“선배 이쪽으로 오세요!”
“아냐, 여기가 더 좋아요 선배!”
두 사람을 발견한 후배들이 이쪽으로 오라며 서로 아우성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가장 중심 자리로 안내된 두 사람 덕분에 밀려난 남자 후배나 복학생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은 없었다.
“선배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머리카락을 곱게 말아 세팅하고 속눈썹을 날개처럼 팔랑거리는 후배 민영이 밉지 않은 어조로 타박했다. 낮에 보았던 화장기 없는 얼굴과 전혀 달리,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이다. 열심히 화장을 한 건 민영뿐만이 아니었다. 체교과 최고의 인기남이 참석한다는 소식에 후배들의 얼굴에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수업이 늦게 끝나서.”
윤이 머쓱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김 교수님 너무 나빠요! 학점도 엉망으로 주고!”
“맞아요, 김교수님 진짜 별로지 않아요?”
여기저기서 원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지나친 호응에 윤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지만, 현일이 씩 웃어주며 적당히 장단을 맞추었다.
“일단 선배 한잔 말아드릴게요.”
민영은 윤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순간 그녀의 모습에서 레나드가 겹쳐져서 윤이 떨리는 입술을 눌러 웃었지만, 제대로 된 표정을 지은 건지 알 수 없다. 이정도면 트라우마다.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은 채 술잔을 받아들었다.
“적당하게 해줘.”
“에이 약한 척.”
민영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현일도 물론 잘생기고 괜찮은 남자였지만, 그녀의 목표는 윤이다. 이제껏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는 윤의 모습에 승부욕이 끓어올랐다.
여자에게 무심한 성격 탓에 철벽왕 정해윤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는데, 그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닌자 전술’이다. 술에 취한 척 후배 하나가 해윤에게 안기려 들었고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육탄 돌격을 피했다.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쓰러져버린 불쌍한 후배는 그 다음날 휴학했고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선배. 웬 일이예요? 술도 잘 안 마시는 분이.”
윤은 거절하지 않고 적당히 술잔을 주는 족족 받아 들었다. 단숨에 손목을 꺾어 술을 들이키는 윤을 보며 민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달려볼까 싶어서.”
윤이 빙긋 웃었다. 술자리는 즐겁다. 적당하게 웃고 떠들 수 있다. 진심이 될 필요도 없다. 사람들에게 파묻혀 의미 없이 흥청망청 분위기를 즐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해서 폭탄주를 들이키는 윤의 손목을 현일이 붙잡았다.
“정해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내가 술에 취하는 거 봤냐.”
말리는 현일의 손을 떼어놓으며 윤이 말했다. 목소리는 조금 고부라졌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마셨다간 취할 거라고 이십 년 친구의 내공으로 알아차린 현일은 윤의 손에서 잔을 뺏어들었다.
“너 얼마나 마신거야?”
현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빈 소주병이 다섯 병은 되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심란해 보인다 싶더니 어마어마하게 마셨네. 현일이 혀를 쯧 찼다. 혼자 놔둬선 안 되는 거였다. 망할 계집애. 현일은 민영을 가볍게 흘기곤 윤의 손목을 잡았다. 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더 마실 수 있어.”
“가다가 토하면 집어 던져 버릴 거야.”
“넌 더 놀아, 난 이제 집에 갈래.”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을 보며 민영은 머리를 굴렸다. 더 붙잡아 볼까. 아니야, 괜히 부담스럽게 달라붙었다간 말짱 도루묵이야. 그녀는 웃는 낯으로 선선히 “조심히 가세요, 선배.”하고 인사했다.
“그럼 나도 갈래.”
현일도 따라 일어서려하자 후배들이 현일을 붙잡았다.
“선배 더 놀다가요.”
“아직 열두시도 안 되었어요.”
“오늘 재밌는데, 선배 가지 마요.”
“현일 선배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부름에 현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과 달리 자신을 붙잡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윤이 비식 웃었다. 원래 잡을 수 있는 것에 사람들은 더 큰 노력을 쏟는다. 바람을 잡으려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지만, 사냥에는 큰 공을 들이는 법이다. 이 자리에서 현일은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냥감이다. 데리고 갔다간 후배들의 원한을 크게 사리라. 여자의 원한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마녀의 저주를 떠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떤 윤이 현일의 어깨를 밀어서 자리에 앉혔다.
“넌 더 놀다와. 난 바람 좀 쐬다 들어갈 거야.”
“알았어, 혼자 괜찮겠어?”
“내가 어린앤 줄 아냐.”
윤의 대꾸에도 현일의 불퉁한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현일 형,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넌 걱정을 해줘도.”
현일의 툴툴거림을 뒤로한 채 윤은 혼자 가게를 나섰다.
여름밤은 늦은 시간이 되어도 밝았다. 흐릿한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걸음을 재촉했다. 기분 좋은 취기에 부러 걸음을 흩트렸다. 비틀비틀. 걸음도, 시야도, 마음도 흔들렸다.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술에 취하지 않는 건 아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주량이 셀 뿐 과하게 마시면 술에 취하는 건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마나를 응용해 술기운을 몰아내면 지금도 술에서 깰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취기를 좀 더 즐기고 싶었다.
“다녀왔습니다.”
윤은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집은 서늘했다. 사람이 빈 집 특유의 냉기에 어깨를 떨었다.
“저 왔어요. 엄마, 아빠.”
현관 앞에 놓인 작은 액자를 향해 속삭였다. 사진 속엔 해맑게 웃는 윤과 부모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씻지도 않고 소파위에 벌러덩 누은 윤이 손을 들어올렸다. 파지법으로 인해 손가락 안쪽에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여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끄러운 피부였다. 손목 안쪽으로 칼에 그인 자국을 제외하면 흉터를 찾을 수 없었다.
들었던 손을 이마에 얹었다. 문득 그란디아가 그리웠다. 그곳에서 윤은 진심으로 웃고, 떠들고,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했다. 마지막은 좀 외롭고 슬픈 기억밖에 없지만 대체로 행복했다.
“……레나드.”
그란디아로 가서 레나드를 만나고 싶었다. 왜 자신을 죽였는지. 하지만 만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5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는데, 여기선 겨우 3일이 지났다. 윤이 현실로 돌아온 지 삼년이 지났다. 단순 계산을 하자면 수천 년이 흘렀을 것이다.
‘정말 보고 싶었나?
윤은 자조했다.
“거짓말쟁이.”
정말 배신의 이유가 궁금했다면 이곳에 돌아온 순간 게이트를 열어야했다. 그러나 윤은 그리하지 못했다.
“겁쟁이.”
윤은 피식 웃었다. 응어리진 감정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젠가 그곳으로 가야하긴 했다.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실행에 닿지 못했다. 계속해서 핑계를 댔다. 좀 더 마음의 준비가 되면 갈 거야. 지금은 레나드를 만날 용기가 없어. 학교생활이 바빠. 이게 정리되면. 하고 계속 미루기만 했다. 언젠가는 용을 만나서 늙지 않는 자신의 비밀을 밝혀내야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갈까.”
뜨거운 가슴께를 식혀주는 문스톤을 만지작거리며 윤이 혼잣말 했다.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지 오래였다.
“가자.”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픈 게이트, 그란디아.”
문이 열렸다.
윤은 웃었다.
***
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닿고 싶은 듯 팔을 길게 뻗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솟아올라서 하늘을 가린다. 밤하늘은 맑았다. 서울의 흐린 밤하늘과 다른 짙푸른 하늘의 빛깔이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후려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