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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4화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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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토사구팽

이제 윤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니 혼자였다. 윤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그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다. 레나드는 그의 대자이기에 당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저를 두고요?”

레나드는 찬찬히 윤의 모습을 살폈다. 평소에 입던 예장 대신 간편한 검은 튜닉과 망토를 걸친 상태였다. 허리춤엔 그의 애병, 마검 트리기토스가 자리 잡고 있다.

“미안하다.”

“제게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이 제게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레나드가 중얼거렸다.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레나드야.”

“어린 저는 종종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저를 두고 당신이 영영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당신의 침대로 파고들면, 다음부터는 혼자서 자야 한다고 당부하며 저를 꼭 끌어안아 주었죠.”

“……렌.”

“그때 당신에게선 바람의 냄새가 났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의 냄새를요. 어째서 바람은 가둬둘 수 없는 걸까요.”

레나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윤을 쳐다보는 눈빛은 애달팠다.

누가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주랴.

렌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자신이 떠나는 게 옳았다.

“레나디온님. 내가 살던 곳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야 한다고요. 당신도 언젠가는 제 선택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윤은 초월자다. 초월자는 노화의 속도가 무척 느리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유한한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윤은 그 법칙에서 빗겨났다. 상처를 입어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며 늙지 않는다.

나이가 비슷한 웨스트올로 공작을 생각한다면 윤의 존재는 더욱 이질적이다. 웨스트올로 공작은 마법사로서 초월자가 되었다. 일흔의 나이인 그는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으로 보인다. 윤이 공작을 마지막으로 본 건 신년 연회, 그때 공작의 머리에서 흰머리가 조금씩 나고 있었다. 노화가 조금씩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월스턴 역시 죽기 직전엔 또래 친구가 아닌 열 살 정도 터울이 있는 형으로 보일 정도였다. 지금이야 어린 나이에 초월자가 되었으니 앳된 외모라 생각하겠지만, 몇 십 년이 더 지나면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다. 늙지 않는 자신을 괴물로 볼 게 뻔했다.

지신이 괴물이고, 이방인임을 깨닫게 되자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돌아가면 정상적으로 늙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른 사람과 같은 평범한 삶을 갈구하게 되었고, 외로움이 사무쳐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 고독감은 누구도 채워주지 못했다. 대자인 레나드조차도.

“게다가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남아달라고 한다면 가지 않으실 겁니까?”

“미안합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미인과 보화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으십니까?”

“…미안합니다.”

레나드는 깨달았다. 그 무엇으로 자신의 대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모두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검박한 남자였다. 레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계시지 않으면 전 자신이 없습니다.”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당신은 잘해내고 있지 않습니까.”

월스턴과 자신은 장군이다. 싸우고 정복하는 데는 위대한 재능이 있지만, 다스리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그러나 레나드는 달랐다. 그는 타고난 통치자였고 황제였다. 월스턴과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대륙을 차근차근 복구해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폐하.”

“렌이라고 불러주세요.”

“레나드님. 당신은 제 소중한 대자입니다.”

“…대자일 뿐입니까?”

“제 자식도 당신보다 사랑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윤은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윤에게 의미 있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친우 월스턴과 안즈마네는 우연한 사고로 죽었으며, 요정인 율리히는 엘븐 포레스트에서 어린 요정들을 수호하고 있다. 한순간에 친우들을 잃고 홀로 남은 윤을 월스턴과 안즈마네의 유일한 자식인 레나드가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레나드도 떠나보낼 때라 생각했다.

열 살에 부모님을 잃은 레나드는 훌륭하게 장성해 황제로서 훌륭하게 그란디아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윤에게는 아직도 부모님을 잃고 울던 어린아이로 보였다. 자꾸 보호하고 자신의 품에 안으려 애썼다. 만약 그녀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레나드의 죽음까지는 지켜본 후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으려 했을지도 몰랐다.

‘검공은 더 이상 폐하의 검이 아닙니다. 오히려 황권을 견제하는 세력이 되어버리셨지요.’

레나드의 약혼녀가 찾아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을 또렷하게 응시하던 여인의 눈빛은 미약한 경고를 품고 있었다. 윤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대부일 뿐이며 그의 검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대척자가 되어 있었다. 윤이 품고 있는 이름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시황제의 친우이자, 현 황제의 대부, 검의 끝을 본 초월자, 그란디아의 북쪽 방벽인 노스트라드의 주인.

어느새 수많은 이름이 윤을 짓누르고 있었다. 황제를 흔들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하루라도 빨리 그란디아를 떠남이 옳았다.

공간을 관장하는 흑룡이 몇 달 후면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흑룡이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황룡이 준 유일한 힌트였다. 어떻게해서든 용의 계곡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죽더라도… 그건 자신의 운명이다.

“어쩔 수 없지요.”

레나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오랜 고뇌 끝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넘겼다. 이내 괴로운 빛은 사라지고, 명료한 의지의 빛이 떠올랐다.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애초, 제 허락 따윈 중요하지 않았음을 압니다. 제가 반대했더라도 떠나셨을 테지요.”

“미안합니다.”

윤은 부정하지 않았다. 레나드가 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오늘은 대부의 말대로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내일 떠나시는 겁니다.”

“좋습니다.”

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떠날 거라면 빨리 떠남이 맞지만, 마지막 욕심이다. 레나드가 서재의 한편에 위치한 테이블로 윤을 이끌었다. 언제 시종들이 준비했는지 몰라도 테이블 위엔 윤이 즐겨 마시는 화주(火酒)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도 한잔 들이키면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이 독하기로 유명한 보카로 왕국산 화주였다.

“대부를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보카로산 화주 아닙니까? 이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데 어찌 구한겁니까?”

윤은 반색을 하며 기뻐하는 모습에 레나드가 하하 웃었다.

“우연히 구한 것입니다. 보카로 왕국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21년산입니다. 대부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마실 예정이긴 했는데, 이별주가 될 줄은 몰랐군요.”

“……미안.”

웃으면서 날리는 말이 무척 뼈아팠다. 윤은 금세 침울해졌다. 레나드가 쿡쿡 웃었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투명한 크리스털 잔 위로 호박색 액체가 흘러내린다.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게 유려한 솜씨로 화주를 따라낸 레나드가 윤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레나드는 제 잔에 스스로 따랐다. 술잔을 가볍게 마주친 뒤 윤은 단숨에 털어 넣었다.

혀에 달라붙는 화주 특유의 농후한 맛과 함께 위에서부터 홧홧한 기운이 뒤늦게 올라왔다. 머리가 핑 돌았지만, 맛있는 술을 마시자 기분이 유쾌해졌다.

레나드가 과일 안주를 집어 윤에게 내밀었다, 윤은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어딜 돌아보셨습니까?”

“그란디아를 돌았지. 용의 계곡을 제외하면, 우리의 발길이 닿았던 모든 곳을 보았어.”

“혼자서요?”

“그래, …혼자서. 잠깐 율리히를 만나긴 했지만.”

레나드는 윤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윤이 술을 들이켰다.

“율리히는 하나도 늙지 않았―. ……큿!”

이상 징후를 깨달은 건 그때였다. 뱃속이 뜨거웠다. 독주의 열기와 다른 불덩어리가 내장을 불태웠다. 윤의 몸이 휘청거리며 앞으로 기울었다. 참기 힘든 고통에 열기를 토해냈다. 윤의 손으로, 옷자락으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독이다!

윤은 반사적으로 레나드를 쳐다보았다. 독이 쉬이 통하지 않는 자신이 당할 정도면 레나드 역시 위험했다. 그러나 자신의 대자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레나드는 가만히 윤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네가?”

온몸을 활활 태우는 통증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윤이 다시금 왈칵 피를 토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있는 힘을 짜내 윤은 레나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윤의 손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가 웃고 있었나?

윤의 시야가 끊겼다.

============================ 작품 후기 ============================

프롤로그가 길었네요.

다음화부터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선작추천코멘트는 많은 힘이 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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