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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토사구팽
중년의 시종장은 윤을 이끌고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대는 불꽃과도 같은 금빛이다. 윤은 길게 뻗은 복도의 어둠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황제의 침전.
그곳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 화려한 장소였다. 유색 대리석 바닥과 그보다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린 벽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새겨진 창문까지. 대륙의 모든 재화가 모인다는 센트리움의 황궁답게 단지 복도일 뿐임에도 제국이 축적한 화려한 부를 드러낸다. 심지어 추운 겨울임에도 훈기가 흘렀다. 그들은 더는 추위에 떨지 않고, 불씨 하나에 안절부절못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수많은 추억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윤은 황제의 침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빨리 가고 싶은 것처럼, 혹은 빨리 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묘한 속도였다.
“각하?”
점점 걸음이 느려지자 브릭이 의아한 눈빛으로 윤을 돌아보았다. 이내 한 태피스트리 앞에 서서 윤이 멈춰 섰다. 사총사의 모험이 담긴 태피스트리였다. 그들이 황룡을 만났을 때를 그리고 있었는데, 지금도 가장 신기하면서도 유쾌한 추억 중 하나였다. 가장 앞에 선 금발의 사내는 월스턴, 그리고 자신, 안즈마네, 율리히. 그리운 시절의 친우들. 윤의 눈동자가 먼 옛날을 더듬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가자.”
그리 말하고 있지만, 윤은 태피스트리 앞에서 못 박힌 채 걸음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시종장 브릭은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곁눈질하여 윤의 모습을 살핀다.
윤은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쭉 뻗은 팔다리는 길었으나 근육이 많이 붙어있진 않다. 그러나 검 하나로 사람을 양단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했다. 제국의 북방을 지키는 노스트라드 공작으로서 야만족 로아크를 벌벌 떨게 하는 전쟁의 흑색 악마까지 붙을 정도지만, 그저 앳된 청년으로 보일 뿐이다.
브릭은 그를 처음 보았던 열다섯 때부터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모습을 반추했다. 두려우리만치 늙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곳입니다.”
시종장 브릭은 거대한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문이 천천히 열렸고 윤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고할 필요도 없었다. 노스트라드 공작이 가진 권리 중 하나였다. 언제, 어느 때고 황제를 독대할 수 있는 권리. 윤의 친우이자 형제이자 주공이던 월스턴이 그 권리를 부여하였고, 월스턴의 아들이자 윤의 대자인 레나디온의 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서 윤은 이곳이 황제의 내밀한 서재임을 짐작했다. 벽난로가 불타오르며 온기를 전했고, 진주빛 실크를 붙인 벽에는 보석을 갈아 발라서 화사함을 더했다. 방안은 낮처럼 환했다. 방을 밝히는 것은 촛불이 아닌, 귀하디귀한 마정석을 연료로 사용하는 샹들리에다. 마정석 하나에 작은 영지 일 년분의 예산이 들어가지만 황궁에선 그것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하나, 둘, 셋, 넷. 총 다섯이군.
사람의 기척을 세던 윤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기는 없었다. 윤은 황제의 대부였으며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황제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를 적대시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 화려한 서재의 주인 황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황성 센트리움의 불야성이 아름답게 반짝였고, 청년의 건장한 체구는 역광에 빛났다. 녹아내릴 듯 화려한 금발의 청년은 인기척이 느껴짐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고집스러운 뒷모습을 응시하던 윤이 그에게 다가갔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황제, 레나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지금 시위를 하고 있었다.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 몇 달 동안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탓하는 시위를.
“레나드. 얼굴을 보고 싶구나.”
“싫습니다.”
“끝까지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테냐.”
황제에게 공작이, 청년이 남자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 어디에 간다고 말씀도 해주시지 않는 분께 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렌. 반년만이지 않으냐. 난 네가 보고 싶었는데, 넌 그렇지 않은 모양이구나.”
오랜만에 부르는 아명에 레나드가 반응했다. 결국 레나드는 고개를 돌려 윤을 마주보았다.
윤이 팔을 벌리자 청년이 천천히 걸어와 아이처럼 윤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체격 차이 때문에 윤이 안긴 모양새였지만 개의치 않았다다. 청년의 품에 폭 쌓인 윤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 등을 토닥였다. 포옹을 풀고 레나드를 마주 본 윤은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한때는 한 팔에 들어 올릴 만큼 작았는데.
이제는 윤보다 키가 훨씬 컸다. 월스턴의 금발과 안즈마네의 붉은 눈동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레나드는 섬세한 외모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다. 안즈마네의 흔적을 발견하고 윤은 쓰게 웃었다.
서로를 친구이자 쌍둥이 형제처럼 여기던 두 친구는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다. 여자가 선택한 것은 왕이 된 친우였다.
‘당신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난 혼자 남겨지기 싫어요.’
윤의 고백에 장밋빛 뺨을 한 소녀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말했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혼자 남겨진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일년이 지나도, 십년이 지나도, …오십년이 지나도. 그는 이곳에 남아있다. 한국의 고등학생 정해윤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그란디아의 윤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욱 길었다.
오히려 이곳의 사람인 월스턴과 안즈마네가 쉰살이 되기도 전,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탓에 사총사 중 인간은 윤만이 살아있다. 율리히도 요정의 숲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홀로 남은 윤은 쭉 레나드를 돌보며 지내왔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구나. 네가 벌써 어른이 되다니.”
“그런 얼굴로 말씀하시면 굉장히 기분이 이상해집니다만?”
“어쩔 수가 없는걸. 나도 이런 모습은 사양이야. 너무 만만해 보이잖아.”
레나드의 말에 윤이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며 투덜거렸다.
“대부는 그런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내가 만만하다는 거야?”
레나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녹아내릴 듯 사르르 눈웃음을 짓는다. 레나드의 눈동자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자리 잡고 있다. 수려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윤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여인이 그의 사랑을 바라며 발치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결코 황제라는 신분 때문만은 아니다. 조각처럼 섬세하고 수려한 외양을 가진 그가 짓는 미소는 황홀하리만치 달콤하다. 두꺼운 옷 아래로도 추측 가능한 젊은 육체는 그와 보내는 밤이 기대케 하여 여인의 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화사한 금발과 홍옥같이 붉은 눈 덕분에 태양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남자가 바로 자신의 대자이자, 그란디아 제국의 두 번째 황제인 레나디온 발로르 크라이슬러 그란디아다.
윤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 옷차림이 간편하십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셨다고 또 여행이라도 떠나시는 겁니까?”
“여행은 아닙니다. 잠시 돌아볼 곳이 있습니다. 노스트라드 공작의 지위를 반납하러 왔습니다.”
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레나드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대부.”
“폐하,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길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힌트를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