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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토사구팽
그란디아 제국의 황성, 센트리움.
황제가 기거하는 침전으로 향하는 길 앞에 한 남자가 섰다. 그리 크지 않은 키의 남자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썼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모습에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경계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올린 그가 후드를 벗었다.
“내 이름은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황제 폐하를 만나 뵈러 왔다.”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은 밤하늘과도 같은 검은 색이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 하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은 청년이 투덜거렸다. 제롬을 포함한 근위기사들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스트라드 공작의 사칭범의 등장은 신입 기사들이 맞이하기에 난이도 상의 이벤트다. 그들은 이런 때 내 파트너가 어째서 네 놈이냐는 원망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제롬이 한숨을 삼키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황궁 기사단에 입단한 지 삼 개월. 열심히 노력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침전의 호위기사로 배치받았다. 그러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입단 동기인 대니얼이 파트너가 될 때부터 제롬의 불행은 시작된 거였다.
제롬은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검은 머리의 이방인 청년은 자신이 노스트라드 공작이라 주장하며 황제와의 알현을 요구했다. 당연한 알현 절차를 위해 신분패를 요청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분패는 시황제 월스턴이 도입한 후 레나디온 1세가 확립한 제도로, 제국의 16세 이상 남녀라면 누구나 들고 다녀야 하는 물건이다. 관청에서 관인을 찍어서 위조할 수 없게 만들었기에 신분 증명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정녕 그가 노스트라드 공작이라면 응당 신분패를 보이기만 하여도 이런 번거로운 일을 겪을 필요 없었다.
“……망할. 그거 놔두고 왔는데. 내 얼굴 몰라? 그렇다면 브릭을 불러줘.”
뻔뻔하게 시종장을 오라 가라 명령한 청년은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다며 침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원의 의자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브릭 아이그너.
그는 황제의 일등 시종, 그 중에서도 시종장이었다. 평민 고아 출신임에도 불구 걸출한 능력을 선보여 황제의 최측근이 될 정도였다. 제롬이 불러낼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보고를 했으니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어.’
제롬은 그리 생각하며 불안감을 떨치려 했지만 입천장이 바짝 마르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긴장을 지우기 위해 눈동자만 굴려서 청년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몹시 수상쩍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일단 온통 검었다. 피풍을 위해 걸친 조악한 재질의 망토는 어깨를 감싼 후 길게 늘어져 발치에 대롱거렸고, 튜닉 또한 평민들이나 입는 질기고 거친 천으로 만들었다. 늘씬한 다리를 감싸고 있는 부츠는 오크의 가죽으로 만들어 단단하고 편해 보였으나 결코 고급스러운 소재는 아니었다.
청년이 뚫어져라 주시한 결과 제롬이 판단하기에 청년과 노스트라드 공작의 공통점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다는 것뿐이다.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한 자루의 검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초월자.
차 대륙(茶大陸)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방인은 그란디아의 입지적 존재다. 시황제(始皇帝) 월스턴의 친우였으며, 당금의 황제 레나디온 1세의 대부(代父)였다. 기사들은 윤의 이름을 들으며 컸고 검사의 꿈을 키웠다.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시황제 월스턴의 또래라 하였으니 최소 일흔 살은 되었을 검공이다. 초월자의 노화가 늦다하여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검공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브릭,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시종장 브릭이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가만히 선 그는 자신의 넥타이와 커프스가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차분한 태도로 점검하고 나서야 기사들은 무시한 채 청년에게 정중한 태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브릭은 유쾌한 목소리로 뼈있는 말을 던졌다.
“무려 육개월만이군요. 하마터면 당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줄 알았답니다.”
“하하. 브릭 벌써 늙은 거야?”
“저도 이제 손자가 태어날 날이 멀지 않았답니다.”
청년의 버릇없는 말에도 브릭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브릭이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이분은 노스트라드 공작 각하가 맞으십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하오나 시종장님.”
대니얼은 납득하지 못하겠단 목소리로 대꾸했다. 일흔의 할아버지 공작이 어찌 저 청년이란 말인가. 제롬 역시 대니얼과 같은 생각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외모는 무척 앳되었다. 이국적으로 보이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쇠지 않아서 세월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옅은 상아빛의 하얀 뺨은 보드라워 보였고, 검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라 하기엔 침착하고 노회한 눈빛이 인상적인 느낌을 준다.
공작의 옆에서 잔소리를 던지고 있던 시종장 브릭 아이그너가 올해 마흔다섯으로 그의 갈색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직 신입이셔서 각하의 얼굴을 모르시나 봅니다. 이분은 노스트라드 공작 각하이십니다. 아직 얼굴을 모두 외지 못하셨다니, 다시 교육을 받으셔야겠습니다.”
브릭이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채찍을 휘두르듯 차가웠다.
“뭐 사람 얼굴 모를 수도 있는 거지. 육 개월 만에 사람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는 걸.”
“사실 그런 수상한 복장으로 오신다면 누구도 밤손님이라 생각하지, 공작이라 여기진 않을 겁니다. 어찌 황제의 대부(代父)께서 평민이나 입고 다닐 옷을….”
“잔소리는 그만둬, 브릭!”
기사들의 편을 들어주던 윤이 진저리치는 모습에 브릭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들을 질책할 때와 다른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신분패라도 들고 오셨더라면 제가 밤중에 이리 나오는 일은 없었겠지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오늘 한 번만 봐줘. 급한 일이니까.”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으실 거지요?”
“아마도….”
검공은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브릭도 나이가 들더니 잔소리만 늘었어.”
“각하께선 여전히 나이를 드시지 않으셨군요.”
시종장 브릭과 윤이 유쾌한 목소리로 주거니 받거나 말을 건네자 근위기사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눈앞의 청년은 정말 노스트라드 공작이 맞았다! 그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수호검, 노스트라드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부디 이 무례를 죽음으로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탓할 생각은 없다. 내 잘못이 크니. 황제 폐하를 이리도 최선을 다해 지키는 이들을 벌한다면, 누구에게 상을 준단 말인가.”
근위기사들은 표정이 밝아질 줄 몰랐다. 그저 고개를 숙여 읍했다. 마치 검으로 자신의 목을 베길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은 모양새였다.
“이래서 센트리움에 오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데 말이야.”
“아닙니다. 속하가 생각이 짧아 무례한 탓입니다. 무디 치죄하여 주십시오.”
제롬의 떨리는 목소리에 윤은 쓴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오밤중에 공작을 사칭한 자가 나타났고, 신분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가 그의 말을 믿으랴. 당장 감옥에 처넣지 않은 것도 감사한 일이다.
“결코 자네들의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폐하께서 기다리고 있나이다. 안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얼른 가도록 하지. 아참, 결코 이들을 혼내지 말아줘. 브릭. 그리고 자네들도 수고하게.”
어린 청년과도 같은 얼굴의 공작은 기사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후 브릭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신발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가죽으로 밑창을 댄 시종장의 신발에서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복도는 소름 끼칠 만큼 조용했다. 문득 기사들은 발걸음 소리가 하나만 들림을 깨달았다. 황궁에 깔린 대리석은 침입자를 알아차리기 위해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제롬과 대니얼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바닥이 딱딱한 부츠를 신은 검공은 걷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헉…….”
순간 등줄기로 차가운 물을 퍼붓는 듯 아찔한 소름에 제롬이 짧게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