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제 4연무장으로 향했다.
시간표를 정하면서 사용인을 시켜 미리 약속해 둔 그대로였다.
그간 마엘로 샌슨과 오후 시간을 보낼 때에는 보통 대연무장을 사용해왔다. 샌슨은 화경의 무인답게 보는 시야가 무척 넓기 때문에, 내가 검식을 갈고 닦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연무장을 오가는 아이들을 상대해 주고는 했다. 한 번에 여러 학생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위인이기에 그랬다.
그러나 제 4연무장은 저 멀리 탁 트인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주변에 수목이 적고 건물들과 거리가 멀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오롯이 내게만 집중하여 가르치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가 이번 학기의 오후 시간을 내게 내어주면서 어떤 것을 가르치려 하는지 몰라 어쩐지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약속 시간보다 삼십여 분 먼저 도착하여 스승을 기다렸다.
곧게 난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는 마엘로 샌슨의 머리꼭지가 보이자마자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자세로 서서 그를 기다렸다.
연무장에 들어서면서 그런 내 모습을 본 샌슨이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아는 체해 주었다.
“볼 때마다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 미카엘.”
“특별히 신경 써 주시는 것이 감사하여, 예의를 차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가 교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이 마음밖에 없어 죄스럽습니다.”
“어어⋯. 죄스러울 것까지야 있나⋯. 오늘도 아주 각이 잘 잡혀 있구나, 미카엘⋯.”
“예?”
“그래, 나도 반갑다.”
“예.”
일단은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마엘로 샌슨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4연무장을 수업 장소로 고른 두 번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무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벤치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대연무장 어귀에는 이렇게 쉬이 날아갈 수 있는 기물을 두지 않았다. 학생들이 수업 중에 저들끼리 장난을 치다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허나 수업 때마다 맨바닥에 앉아 샌슨의 강의를 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와 샌슨은 벤치 하나의 끝과 끝에 앉았다. 샌슨의 시선은 먼 하늘에 닿아 있었고, 나는 몸을 반쯤 비틀어 샌슨의 각진 옆얼굴을 곧게 응시했다. 그가 하는 말을 한 톨도 허투로 흘려내지 않으리란 다짐으로 시선을 가다듬었다.
샌슨은 여전히 나를 돌아보지 않고,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네게 뭘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을 좀 해 봤다.”
“⋯.”
“네겐 이미 완성된 단계의 검법이 있지. 물론 살기를 좀 더 지웠으면 좋겠지만, 살기 그 자체도 잘 쓰면 꽤 매력 있는 소재거든. 제국검법과 세이렌검법도 진의를 잘 파악해 두어서 홀로 익혀도 문제가 없고.”
“⋯그렇지 않습니다.”
“겸양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그게 맞아. 하지만 네게 아직 내가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더라고.”
샌슨이 큼직한 손으로 제 목 뒤를 문지르며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간간이 보이는 새치로 겨우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만치 젊고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전에 네가 검식 하나를 새로 만든다고 했었지. 그걸 손보는 걸 도와주마.”
“⋯아.”
“네 뱃속에 들어있는 건 머스탱 교수님이 손 봐 주시겠다고 했으니, 검의 형식과 형태를 다듬어주는 것은 내가 해야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긴장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기쁜 탄성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용을 썼다.
정검.
그에게 사사하며 차근히 키워 온 꿈이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식을 자아낸 검법은 여전히 불안한 구석이 많았다. 보는 눈이 날카롭고 꼼꼼한 마엘로 샌슨이 보아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늘상 배움에 고팠다. 크게 기뻐 감사 인사도 못 하고 넋을 뺀 나를 보고 낄낄 웃은 샌슨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럼 그동안 얼마나 만들었나 한 번 볼까. 제대로 펼쳐 봐.”
“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직후부터 샌슨과 벤자민의 도움을 받아 이런저런 시어런의 검법을 배워 익히고, 그중에 제일 내게 알맞고 남궁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모아두었다.
그대로 누덕누덕 기워 붙일 수는 없으니 내게 깨달음을 안긴 순간순간을 몇십 몇백 번을 마음으로 그리며 가장 어울리는 것을 찾아 뽑은 것이 열일곱이었다.
순서에 맞추어 검을 그었다. 이 땅에 내려온 순간, 크고 맑은 호수, 내가 지키고 싶은 가여운 것들을 떠올렸다. 창천의 검보다 묵직하고, 남궁의 검보다 다정한 검식이었다.
한참 허공을 그으며 노닐던 것을 멈추고 긴장하여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마엘로 샌슨은 하관을 쓸어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짧게 혀를 찼다.
“이전보다 몸에 무리 주는 동작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네.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한 검인 것은 좋게 보이고⋯.”
“⋯.”
“뒤로 갈수록 다인전을 상정한 것인지, 검역을 앞으로 두고 공격을 뒤로 넘기지 않으려는 모습도⋯. 그래, 하나의 검법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
“스읍, 역시 경험만 좀 더 있으면 훌쩍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야.”
“⋯경험, ⋯말씀이십니까?”
나는 내 유일한 강점을, 전생에 수없이 사선을 넘은 경험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샌슨은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그래. 아직 몬스터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게 좀 아쉽네.”
아. 그 경험.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를 베어 본 경험은 당연히 없었다.
이곳 시어런의 검법은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히 사람을 대할 때보다 더 먼 거리를 벌리고, 상대를 고요히 살피는 시간을 길게 가졌다.
내 검은 그렇지 못했다. 조급함이 실린 검이 가진 위력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다시 생각하니 빤히 보였다. 내 눈으로 바로 찾아내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절로 겸손한 자세를 하고 섰다. 마엘로 샌슨은 몇 가지 고쳐야 할 점과, 개선할 방향을 일러주고 직접 그 몸으로 시연하여 자세를 잡아 주었다.
초절정 위의 단계는 깨달음의 경지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구름의 긴 꼬리에서, 바닥을 두드리는 빗물에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마엘로 샌슨은 그 깨달음을 받아낼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차근차근 손짓 하나 발짓 하나 고심해서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달게 받았다.
저 멀리 아카데미 담장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시간을 확인한 마엘로 샌슨이 땀에 젖은 내 등을 팡팡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그래, 검형이나 검법 자체는 좋아.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으니 좀 더 천천히 가자고.”
이미 들어 본 소리였다. 나는 크게 웃었다.
“예, 교수님. 천천히 멀리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 내내, 나는 꾸준히 내 실력을 닦아 길을 냈다. 곁가지 수업을 충분히 들을 만큼 여유로웠다.
갑자기 조급해진 이유는 분명했다. 데뷔탕트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흘린 살기가 마음에 거스러미로 남아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조급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 * *
화요일 오전. 고급 검술 수업의 첫날이었다.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비었다. 지난 두 해 내내 이 시간마다 시선으로 나를 찾던 아이가 없는 것을 새삼 깨달은 탓이었다.
없는 것이 루베르뿐만은 아니었다. 지난 학기 동안 줄곧 좋다고 실실대던 발터 오르겐도, 짜랑짜랑 웃는 목소리로 아이들을 휘어잡던 루실라 안티 시어런도 없었다.
지난해에는 졸업하지 않고 버티던 많은 아해들이 루베르가 졸업하자마자 재깍 졸업한 것을 이제 알았다.
올해의 고급 검술 수업을 듣는 인원은 총 서른둘이었다. 아래 학년에서 올라온 아해들이 빈자리를 채워 인원수가 늘었는데도, 연무장이 허전한 것처럼 여겨졌다.
잠시 멀거니 서 있자니 쉐이든이 내 등을 툭 두드렸다.
“정신 차려, 미카.”
“⋯아. 그래.”
“어디 아파? 좀 피곤해?”
“아니, 아니다. 그냥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흐으음.”
쉐이든은 졸업하는 해가 되어서야 고급 검술 수업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내 뒤를 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더니, 차근차근 경지를 올려가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백작가 후계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산맥에는 오를 수 없지만, 수업 내용으로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쉐이든의 선언을 다시 듣게 되었다.
벤자민도 여전히 이 자리에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두 동무가 곁에 있어 그래도 외로울 일을 덜었다.
⋯외롭다니.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에 놀라고 있는데, 냉큼 내 옆에 따라붙는 놈이 둘이나 더 있었다.
빌 브라운은 내 눈에도 싹이 보인 놈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으나, 다른 한 명은 무척 의외였다.
“⋯니코 선배? 졸업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한 1, 2년쯤 더 다녀볼까 하고. 졸업하고 바로 할 일도 없고 말이야.”
맷 니코는 루실라와 함께 어울려 다니던 꼬질꼬질한 소년이었다. 나보다 한 학년이 높았고, 그림스베인 공작가 출생의 어미와 니코 자작 사이에서 태어난 놈이었다. 지난 두 해 내내 바쁜 일이 있다며 함께 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은 일이 많았다.
그러나 고급 검술 수업에서는 늘 나와 벤자민, 루베르와 루실라와 함께 어울렸으니 내 곁에 서는 것이 어색한 일도 아니었다.
“1, 2년쯤이라면.”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 너희에게만 알려주는 거야. 내가 돌봐야 할 아이가 있거든.”
무슨 비밀을 이렇게 옆집 강아지 이름 짓듯 툭 내던진다는 말인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일이다. 잠시 고민하다 마엘로 샌슨이 곧 연무장에 들어서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제 머리를 들이대는 빌 녀석의 머리를 꾹꾹 눌러 밀어두었다.
늘 첫 번째 순서로 나서던 발터 오르겐 대신에, 지난해에도 본 기억이 있는 선배 하나와 맷 니코가 대련을 했다.
검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한데도, 어쩐지 내 뺨에 닿아오는 시선이 없는 것이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
나쁜 버릇이 들었다.
루베르가 죽은 것도 아니고, 어디 먼 길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자라면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인 것을.
이렇게 오래 곱씹고 그리워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루베르 그 아해가 찬찬히, 참 오래 보았던 바닥 판석 위로 대련 중인 아이들의 검 끝이 향했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튀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 살면서 변하는 것이 어디 판석에 남은 흔적뿐일까.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라, 스스로를 참 오래 타일렀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참 애를 썼다.
오후 나절 내내 마엘로 샌슨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해이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평소보다 더욱 집중하고 몰두하여 수업을 들었다.
그 탓인지 잠자리에 들 적에는 기운이 쪽 빠져서 삿된 꿈 없이 평온히 잠들었다. 그나마 마음을 털어낼 방법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