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75)화 (175/176)

175.

남은 방학은 기껏 수도까지 찾아 왔건만 보름이나 자리를 비운 몹쓸 손위 형제에게 화가 난 두 꼬마를 달래는 데 썼다.

저들끼리 한 데뷔탕트를 보아주지 않았다고 심술이 잔뜩 난 동생들을 위해 다시 한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했다.

함께 타운하우스의 연회장을 빙빙 돌기도 하고, 노래를 틀어두고 춤을 추기도 했다. 처음에야 손을 잡고 춤을 추었으나, 나중에는 아예 어깨에 얹어두고 들썩거렸다.

아이들이 잔뜩 지쳐 숨을 색색거릴 때까지 함께 뛰어놀아 겨우 용서를 받았다.

드레스를 돌려주겠다고 찾아 온 마리앤의 손에 아티팩트 몇 개를 쥐여 보내기도 했다. 일전에 생일선물로 받았던 반지와 목걸이 중 보온이나 방한의 술식이 적힌 것 몇 개를 양친의 허락하에 내어놓은 것이었다.

마리앤은 몇 번이나 이 은혜는 꼭 갚겠다고 야무지게 다짐을 보여서 모친의 호감을 샀다. 나는 아이가 다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으나, 굳이 미리 사양하지 않았다.

금방 1월이 지나, 새 학기가 되었다.

이미 지난 학기에 시간표를 미리 정해 둔 덕분에 이전의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시작이었다. 내 시간표에 참견하겠다고 찾아 오는 루베르가 없어 허전했다.

아이들이 시간표를 정하는 자리에 끼어 앉아 강의계획서를 함께 구경했다.

이미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은 고급 검술을 듣고, 월요일 화요일은 마엘로 샌슨과, 목요일 금요일은 더글라스 머스탱과 개인 수업을 하기로 정해진 나였다.

수요일 오후에 언제나처럼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제국의 계보 수업을 끼워 넣고, 그 뒤에 윌턴 로버츠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는 것까지 들은 아이들은 크게 아쉬워했다.

“오전에는 같이 들을만한 수업이 없습니까? 월수금이 비기는 하는데.”

“보통 오전에는 전공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비전공 수업을 듣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고 미카엘에게 학술부 수업을 들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월요일에 시문학 강의가 있기는 한데⋯.”

“음.”

시문학이라니, 나는 시조를 외우는 데 재능이 없었다. 말도 되지 않는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이반이 냉큼 제니의 말을 받았다.

“괜찮을 것도 같은데⋯. 경영부 수업은 어떻습니까? 수금 오전에는 상점 경영 수업이 있어요. 여러 상점을 경영할 때 필요한 장부 계산법이랑, 인재 고용법을 배워요.”

“됐습니다.”

“법학부 수업은 어때요, 미카엘. 시어런 형법 수업이 월요일, 수요일⋯.”

“제가 그걸 배워서 어디에 씁니까?”

“알고 있으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텐데도요. 만약 갑자기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어쩌려고요.”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이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을 거는 아해들을 죽 둘러보았다.

다들 그냥 해 본 말인지 짓궂게 웃었다. 그런 아해들 사이로 마리앤이 종이 한 장을 내 코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신난 눈이 첫눈 본 강아지마냥 반짝반짝 빛났다.

“서클의 이해! 이거 들을래요? 1학년 때 빙결 마법식 전개하는 법 배웠잖아요, 미카엘. 이거 괜찮을 거 같은데?”

“⋯예?”

영 엉뚱한 소리는 아니었다.

일단 건네어 주는 것을 받아 읽었다. 앤젤라 스팅 교수의 수업이었다. 월수금 오전. 시간도 딱 알맞다.

그녀의 인도를 따라 배우게 된 빙결 마법식은 이제 5초 안에 전개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솔깃한 것을 눈치챈 마리앤이 방긋방긋 웃으며 귀염을 떨었다.

“기초 수업이긴 하지만, 앤젤라 스팅 교수님 수업이라서 전 들을 거예요. 마법부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하긴 하는데, 오후 수업이 개인 교습이면 점심시간 정도는 빼 둘 수 있을 거잖아요. 설마 샌슨 교수님이랑 머스탱 교수님이 밥 시간도 안 주시겠어요?”

“⋯음. 뭘 배우는 수업입니까?”

“서클을 회전시키는 이유와 원리, 그리고 각 서클의 단계에 따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수식의 종류 같은 거요. 이론만 배우는 거고, 실기까지는 안 해요.”

“⋯.”

“하고 싶죠? 막 끌리죠? 궁금하죠?”

“⋯으음.”

“시어런 아카데미에서만 배울 수 있는 거잖아요. 언제 또 이런 걸 들어보겠어요? 마법사랑 대련할 때 완전 유용할 것 같지 않아요? 제가 대마법사 되면 저랑도 붙어야 하잖아요.”

쫑알쫑알 말이 많기도 했다. 결국 헛웃음을 내어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반이 허어, 하고 혀를 차더니 물었다.

“정말 마검사가 꿈입니까?”

“그건 아닌데⋯. 마나와 오러의 성질이 비슷한 듯 다른 게 신경 쓰입니다. 다음 경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제니가 아쉬운 듯 칭얼거리고, 데미안이 장난스러운 야유를 곁들였다.

“아아~! 너무해요! 우리는 못 듣잖아요!”

“이건 폭거입니다, 폭거. 진지하게 항의하겠어요.”

“그러게 미리미리 마법 좀 배워두지 그랬어요.”

“뭐요?”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나도 웃었다. 역시 마법사를 가까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시간표를 함께 살펴보면서,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자 과제는 언제 모여 하자 하는 이야기에 이리저리 참견을 했다.

* * *

2월 첫 주 월요일.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사 한마디 하기도 전에 한참을 나를 응시하던 앤젤라 스팅 교수가 들고 온 유인물로 얼굴 표정을 가렸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스며있었다. 괜히 멋쩍고 민망하여 나 또한 가만히 웃었다.

강의실에 들어찬 아해들 중 몇몇이 콜록 기침 소리로 웃음소리를 가렸다.

“⋯아아. 정말⋯ 오랜만이에요⋯. 에른하르트 영식⋯.”

“예, 교수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으응⋯.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반갑네요⋯. 검술부 학생이 이렇게까지 제 수업에 열의를 보이는 건 정말⋯. 기쁜 일이죠⋯.”

“감사합니다.”

“⋯.”

⋯내가 들어도 되는 수업이 맞나?

교수의 반응이 무척 수상하여 옆자리의 마리앤을 돌아보았으나, 아이는 연신 방긋방긋 웃었다. 그 입 모양이 괜찮아요, 괜찮아. 하고 말하는 것을 믿기로 했다.

잠시 칠판과 유인물을 번갈아 보던 앤젤라 스팅이 차분하게 교탁 앞에 자리했다.

앤젤라 스팅이 엄지와 검지를 부딪치자 책상 위에 유인물이 생겨났다. 오랜만에 겪는 신묘한 기술에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럼 먼저⋯. 서클의 개념에 대해서 배워볼게요⋯?”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서클이란 중단전, 즉 심장을 중심으로 그리는 동심원이었다.

모든 마법은 먼 곳의 마나를 끌어 심장을 축으로 삼아 동그랗게 동심원을 그리고, 손끝으로 그린 수식에 마나를 불어넣은 뒤에, 다시 서클을 통해 몸 바깥으로 배출하는 방식으로 발동했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기에 생각 없이 따라 하기만 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제대로 알았다.

“⋯이렇게 한 번 사용한 마나는 순수한 마나와 달리, 성질이 변환되어 반발력을 갖게 되어요⋯. 이렇게 성질이 변환된 마나를 오염된 마나라고 부르지요⋯.”

앤젤라 스팅 교수가 푸르스름한 사람 모형을 띄웠다. 녹색 연기가 사람의 가슴팍에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양팔로 향했다가 붉은색이 되어 다시 가슴팍으로 돌아와 빙글빙글 돌았다.

“⋯이렇게 오염된 마나는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역변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잘못 처리하게 되면 마나 역류가 일어나지요⋯. 역변환 과정을 몸 밖에서 진행하기 위하여 마나를 멀리 보내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물을 끌어다 빨래를 했으면, 더러워진 양잿물을 품고 있지 않고 제때 버려야 한단 말이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설명이 상세하고 다정하여 뜻을 알기 쉬웠다.

그 외에도 서클의 구조 원리와 각 서클의 단계가 검술의 어느 경지와 대등한지에 대해 학습했다.

마법이란 충분한 학습과 단련으로 비물질계를 볼 수 있게 된 다음 사용이 가능한 학문이었다. 시작 즉시 1서클이 되고, 이는 삼류 무인의 단계와 같다.

2서클은 이류무사의 수준이고, 3서클과 4서클이 일류무사와 같았다. 5서클이면 나와 대련했던 때의 에드윈 키아드리스와 같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즉 절정의 경지이고, 6서클은 소드마스터와 동급이니 초절정으로 쳤다.

1학년 내내 마리앤이 1서클 마스터, 2서클 초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문득 궁금하여 지금 경지는 어찌 되느냐 필담으로 물었더니, 아이가 씩 웃고 숫자 3을 적었다.

3서클이라니. 그 사이 일류 무사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요사이 4서클 마법수식을 암기하고 있다고 뽐내는 녀석이 어여뻐 고개를 주억였다. 마리앤이 내 생각보다 성실하고 꾸준히 마법을 가꿔 온 것을 알게 되어 무척 흐뭇했다.

각 서클의 단계에 대해 상세히 배우고 서클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알듯 말듯 아리송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몸으로 겪어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수업 내내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첫 번째 수업을 마친 앤젤라 스팅이 내게 프린트물을 따로 챙겨 줄 적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것은⋯.”

“이번에는 졸업 학년이니까요⋯. 전처럼 봐 줄 수가 없어 가지고⋯. 미리 이 정도 수식은 외워왔으면 좋겠어요, 에른하르트 영식⋯.”

“⋯예. 감사합니다.”

침착하게 프린트물을 받았다.

예전에 잠시 잠깐 보았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옵자이논 어쩌구 하는 것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은은하게 웃으며 자리를 뜨는 앤젤라 교수의 뒷모습을 어쩐지 한참 보게 되었다.

천 개의 단어를 외우라는 말인가?

옆에서 내가 손에 쥔 프린트물을 넘겨다본 마리앤이 방긋 웃었다.

“아, 진짜 완전 기초단어만 있네요. 2서클 이하 수준의 단어들은 방점이 세 개 이하라서 발음하기도, 외우기도 좀 쉬운 편이에요. 금방 해요, 걱정 말아요.”

“⋯.”

녀석이 늘 내게 그러던 것처럼 팔뚝을 꼬집어 혼내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이번 학기에는 시험을 볼 일이 거의 없다고 기뻐했던 일이 아득한 옛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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