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스스럼없이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섰다. 조용히 앉아 있는 루베르의 앞에는 차 한 잔 놓여 있지 않았다.
내게 할당된 방이라 하여도 궁의 안에 붙어 있는 것이고, 사용인을 불러 차 한 잔 내오라 명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을 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앉아 있었나 싶어 걱정이 불쑥 솟았다.
한켠에 놓여있는 찻주전자 아래에 놓인 4형 열 발산기의 전원을 켰다. 차를 대접할 준비를 하며 생각해 보니, 위험하거나 무서운 일이 있으면 내 방으로 찾아오라 일러둔 일이 문득 생각이 났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
루베르는 얌전히 고개를 내저었다. 고운 머리 끝자락이 살랑 흩어지는 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테이블 위로 찻잔을 먼저 내려놓고, 데워진 찻물을 조심스럽게 채웠다.
“그러면?”
“그냥⋯. 갑자기, 네가⋯ 보고 싶었어.”
대답할 말이 궁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니, 아이가 내게 그럴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것이 오늘 낮의 일이었다.
순간 눈앞이 깜깜했는데, 한켠으로는 기쁜 마음이 일었다.
옅은 죄책감이 마음을 찰박찰박 적셨다. 이러면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힘들어하는 아이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아이의 희고 마디가 굵은 손이 찻잔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감싸 온기를 훔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몫의 찻잔도 채운 뒤, 입술을 적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큼직한 창밖으로 별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아이가 또 서운했을까. 곰곰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낮에는 선배도 바쁘신 것으로 압니다.”
“⋯응.”
그러나 그 얼굴에 서린 슬픔과, 손끝에 고인 서러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밤에는, 언제든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궁에 있는 동안에는.”
“⋯왜?”
아이가 따져 물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까만 눈이 어둑했다.
“왜, 이런 것도⋯봐 줘? 이번엔, 내가 무례했잖아⋯.”
나는 한참 말을 골랐다. 이켠을 바라보는 시선에 서린 기대가 무거웠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가여웠다.
나는 진심을 꺼내 놓아야 하는 순간임을 알아챘다. 어설픈 거짓으로는 루베르를 달랠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나를 매섭게 다그쳤다.
“⋯선배가, 위태로워 보여서. ⋯신경이 쓰입니다.”
“⋯.”
루베르가 귀여워서, 또 가여워서, 어여뻐서. 녀석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걱정에 구겨 담았다. 나이가 차면 자연히 멀어질 것이니,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더운 찻물과 함께 삼켰다.
내 답을 들은 녀석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내 잔에 찻물을 마저 채웠다. 갈증이 나서 일찍이 찻잔을 비운 나와 달리, 루베르는 차 한 모금 마시는 데에도 시간을 퍽 많이 썼다.
눅눅해진 마음을 달래는 일이 참 힘이 들었다.
* * *
어김없이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서 씻고 사용인을 불러 몸단장을 하고 무도회에 나갔다. 높은 단상에 앉아 춤추는 사람을 바라보는 루베르를 지켜보았다.
오후에는 동무들의 손에 이끌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밤에는 루베르의 방문을 받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이제 황자 황녀들이 무도회를 구경하며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좀 더 자유로이 친밀해진 이들끼리 작은 모임을 만들어 궁의 여기저기에 마련된 자리를 사용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 시간에 루베르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
낯선 아해들의 안면을 익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역시 친하고 가까운 녀석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좋았다.
그 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루베르는 이제 서운한 티를 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시들시들하게 웃는 얼굴로, 간간이 맛 좋은 다식을 권하면서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태연한 태도는 내가 원하던 것이라 나 또한 반가이 별일 없던 사람처럼 굴어주었다.
내가 사양을 해도 더 맛 좋은 것, 더 어여쁜 것을 먹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 덕분에 몇 차례 크게 웃었다.
오늘은 무화과가 듬뿍 얹힌 타르트를 앞에 두고 앉았다. 반짝이는 시럽을 덧입은 타르트를 포크로 잘랐다.
그 안을 채운 속은 무르고 부드러웠으나, 그 겉의 타르트는 딱딱하여 예쁘게 자르기 어려웠다. 포크를 쓸 적에 오러를 조금 끌어왔더니 루베르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왜요.”
“아니, 아니⋯. 타르트를 자를 때에 오러를 쓰는 걸 처음 봐서.”
“저도 처음 써 봅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으응. 접시는 괜찮아?”
“예.”
그 정도 힘 조절도 못 할 내가 아니었다. 뻔뻔하게 대답하고 나니 나 또한 우스워 피식 웃었다. 어쨌든 단단한 것과 무른 것이 입 안에서 섞이니 식감이 꽤 좋아 만족스러웠다.
“노는 시간을 따로 두는 것은 좋지만, 매일 이렇게 놀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야⋯. 뭐, 그렇기도 해. 검도 못 들고 들어와서 심심하지.”
“일단 터놓은 연무장이 없으니⋯. 루벤과 대련을 하는 것도 안 됩니까?”
“으응. 황궁 안에서는 허락받지 않은 자는 날이 서지 않은 검도 들 수가 없어서⋯.”
“⋯음.”
그럼 루베르 이놈과 대련을 할 일이 요원해진다. 내심 지난해 내내 녀석과 검을 부딪친 일을 기껍게 여기고 있었던 내게는 무척 실망스러운 소리였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을 본 아이가 냉큼 입을 열었다.
“대신에, 내가 아카데미로 찾아가면⋯. 잠깐씩은 같이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카데미에?”
“으응. 전처럼⋯. 시험 끝난 주 주말에 내게 시간을 내줘.”
전처럼. 어쩐지 아득한 소리였다. 다음 학기에 아이가 아카데미에 없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어색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럽시다.”
“⋯응.”
“1황자궁과 2황자궁은 거리가 얼마나 멉니까? 웨슬리와 마주치는 일은 잦습니까?”
“어어, 아니⋯. 그,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가족들끼리도 약속을 미리 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어서⋯. 이번 신년제가 지나고 나면, 또 여름 사냥제까지 마주칠 일이 없을 거야.”
“⋯그래요.”
“응. 걱정하지 마. 잘 지내고 있을게.”
과연 그랬다. 대표적인 2황자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나는 리차드나 웨슬리와 독대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웨슬리는 리차드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리차드는 무도회에 얼굴을 비추는 것 외에는 어디에 가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뒤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티타임에서 종종 포플라 키아드리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정작 그녀가 홀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그렇게 걱정돼?”
“예.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화경의 무인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으나⋯.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 보여서요.”
“아버지가 있는데도?”
“⋯그래도.”
황제와 황후는 데뷔탕트가 이어지는 오팔 궁이 아니라, 나이 먹고 혼인한 귀족들이 모이는 수정 궁의 행사를 주도한다고 했다. 때문에 나는 황제의 얼굴을 아직 마주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늘 조직의 머리에 대한 회의감을 속에 품고 있었다. 귀족 연감 관리감찰 부서에서 제 역할을 다하여 루베르를 지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하도 많이 먹고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여 산책이 필요할 때에는, 오팔 궁뿐만 아니라 2황자궁까지 걸음하기도 했다.
루베르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루베르는 종종, 나중에 내가 황궁에 들어가게 됐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졸업하고 바로 황궁으로 들어올 수도 있어. 내 호위가 되는 건 어때? 지금 웨슬리도 리차드 형 옆에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음?”
“그럼 이렇게 같이 황자궁에서, 종종 나랑 대련도 하고⋯. 이렇게 서재에서 책도 읽고.”
내가 유일 산맥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훤히 비쳐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오래 쉬어 본 적 없는 검이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녀석을 보았다. 루베르는 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하릴없이 사치스러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신년제의 마지막 날인 1월 보름날까지 꽉 채워 노는 귀족은 많지 않았다. 신년을 맞이한 뒤 열흘이 지난 즈음에서 내 동무들은 슬슬 저들끼리 무리를 만들어 따로 티파티를 연다 모임을 만든다 하며 궁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웨슬리를 핑계 삼아 오팔 궁의 숙소에서 시간을 죽이던 나 또한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어둑한 밤, 잠이 오지 않는다 찾아 온 루베르와 응접실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잠잠해졌을 적에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응? 아, 이제 자려고?”
“그 말이 아니라, 내일 아침에는 궁을 떠나 타운하우스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방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던 낯이 거짓말인 것처럼 시무룩한 기색이 내려앉은 흰 뺨이 참 곱다.
아이가 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감격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라 여겨 참아 넘겼다.
“⋯옆에 앉아도 돼?”
“그러세요.”
녀석이 앉을 자리를 비워주자, 냉큼 옆자리로 옮겨 앉은 루베르가 내 어깨에 고개를 폭 묻어 기댔다. 얕은 숨결이 간지러웠다.
무엇을 원하고 응석을 부리는지 빤히 알았다. 손을 뻗어 결 좋은 까만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려 주었다.
이 아이를 어여뻐하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라는 게 억울하게 여겨졌다.
“⋯내가.”
“예.”
“편지하면, 답장해 줄 거야?”
“예.”
가문의 일로도 그와 내가 떼어낼 수 없는 사이인 것을, 구태여 다시 묻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그것을 더 두려워하는 쪽이 루베르인지, 나인지 모를 일이다.
“⋯응. 내일 아침에, 언제 가? 배웅하고 싶어서⋯.”
“가기 전에 점심이라도 함께 들지요.”
“응.”
루베르가 자꾸 내 품에 파고들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이 귀엽고 가여웠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아이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몹쓸 짓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서운해 입술을 비죽이는 것을 달래고 어르는 동안 웃음을 참는 일이 참 어려웠다.